[국학인물] 김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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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19-11-14 11:3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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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무장항일운동 분야에서 먼저 꼽을 수 있는 인물이 김학소(金學韶)다. 그는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1910년대 초반 대종교에 입교하고 이름 또한 대종교명인 혁(赫)으로 개명했다. 일찍이 대한제국 육군정의(正尉)로 근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비분하여 항일 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19년 3.1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일경의 눈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에 대종교계 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무장항일 투쟁을 하던 흥업단의 부단장으로서 활동하였다. 1920년 봄에는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徐一)과 경리담당인 계화(桂和)와 계속 병력증강에 힘써 백초구(百草溝) 기타 각지에서 약300명의 장정을 모집하고 대일 항쟁에 전념하였다. 또한 1922년 통의부(統義府)의 군사부감으로 선출되어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924년 초에 북만지역으로 돌아와 현천묵(玄天黙)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고 조성환(曺成煥)ㆍ나중소(羅仲昭)ㆍ김규식ㆍ이장녕ㆍ김필(金弼)ㆍ권영준(權寧濬) 등 대종교 동지들과 함께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북만 영안현(北滿寧安縣)에서 재야혁명가들을 모집하여 대종교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동년 3월 10일에는 발해의 고지(故地)인 영안의 성내(城內)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의사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임명되어 민사부위원장인 최호(崔灝), 군사부위원장인 김좌진, 참모부위원장 나중소, 외교부위원장 조성환, 법무부위원장 박성태(朴性泰), 경리부위원장 유정근(兪正根), 교육부위원장 허빈(許斌), 연락부위원장 정신(鄭信), 실업부위원장 이일세(李一世), 심판원장 김돈(金墩)과 함께 재만동포의 안정과 대일항쟁을 위해 진력하였다.
또한 신민부에서 군인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되자 교장에 임명되어 부교장 김좌진, 교관 박두희(朴斗熙)ㆍ오상세(吳祥世)ㆍ백종열(白宗烈)등과 함께 신민부 군인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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