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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인물] 박찬익(朴贊翊)
관리자 2019-11-14 11: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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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별명은 박정일(濮精一)․박순(濮純). 호는 남파(南坡). 경기도 파주출신. 

1904년 관립상공학교(官立商工學校)에 재학중 국권회복을 위하여 여러 차례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하였다. 

1907년에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나라가 일본에 강점당하자 박승익(朴勝益) 등 10여명과 같이 저항운동을 하다가 1910년 겨울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였다. 

북간도에서 독립투쟁가 이상설․백순(白純) 등의 지도로 독립투쟁을 계획하는 한편,대종교 중광교주인 나철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2년에는 화룡현 삼도구 청파동에 한국인학교를 설치하고 애국사상과 자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대종교의 정교직을 맡아 포교에도 힘썼다.
1915년 북긴도를 떠나 길림으로 피신하였다가 상해로 가서 신규식과 제휴하여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하고 노령의 동지와 긴밀히 연락하였다.

1918년 12월 조소앙(趙素昻)․김좌진 등 39인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남을 계기로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 등 30여인의 독립지사와 같이 이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원이 되었다. 또한 서울에서 1919년 4월에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 박은식․신채호 등과 같이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19년 8월 정의단(正義團)이 서일(徐一) 중심으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개편되었을 때 외교처장직을 겸섭하여 이 단체를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시켰다. 

1921년 7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外事局長)겸 외무차장대리로 외교업무를 전담,대중외교에 전념하였다. 이때 외무총장 신규식이 외무총장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외교업무를 대섭(代攝)하였던 것이다. 

그해 8월에는 안창호와 같이 재정적으로 궁핍하여진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하여 의연금모금에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921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임시정부에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간사로 선임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1월 중국 호법정부(護法政府) 총통 손문(孫文)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1922년 9월에 신규식이 죽자 동제사의 이사장이 되어 한중합작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의거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김구(金九)를 도피시켰다. 

1933년 5월 김구와 같이 난징중앙군관학교(南京中央軍官學校) 구내에서 장개석(蔣介石)과 면담하여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고 한국인 청년을 입교시켜 군간부의 양성에 기여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를 충칭(重慶)으로 이전시키고 10월 국무위원이 되었으며,1945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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