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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인물] 조성환(曺成煥)
관리자 2019-11-14 11: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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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대종교인. 본관은 창녕(昌寧). 일명 욱(煜). 호는 청사(晴簑). 서울 출생.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군부의 부패함을 숙청하려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3년만에 칙령으로 특사되어 참위(參尉)로 임관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906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으며,1907년 1월 연해주로 망명하여 헤이그특사 파견때 이상설을 원조하였다. 

1908년 북경으로 가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뒤 귀국하여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郞)가 만주를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암살을 기도하였으나사전에 발각되어 거제도에 1년간 유형(流刑)되었다. 석방된 뒤 항일독립운동의 책원지인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였다. 

그 뒤 지린성 당국과 교섭하여 흑룡강성(黑龍江省) 오운현(烏雲縣)에 약5000호가 거주할 수 있는 농지를 마련하고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려고 기도 하였으나 러시아혁명으로 실패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일(徐一)․계화(桂和) 등과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결의한 뒤 상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8월 7일 다시 만주로 돌아와 서일․현천묵(玄天黙)․김좌진 등과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12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여 군사부장에 취임,청산리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청산리전쟁 이후 작전상 밀산으로 이동,전만군사단체(全滿軍事團體)를 통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여 외교부장이 되었다. 

그 뒤 대종교 총본사전리대판(總本司典理代辦)으로서 제2회교의회에서 홍범규제(弘範規制)를 수정하고 박찬익(朴贊翊)과 함께 정교가대형호(正敎加大兄號)로 승진하였다. 

1925년 대종교의 민족의식과 북로군정서의 정신을 계승하여 신민부(新民府)를 조직,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고,신민부가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이 학교의 고문으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1926년 북경에서 북경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北京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를 조직하였다. 

1936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으로 봉직하였으며,1937년 한국광복전선(韓國光復戰線)을 결성할 때에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이동녕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8년 군사학편찬위워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구사학을 편수하였으며,193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한국광복군 창설에 크게 이바지하였고,1941년 대원수부(大元帥府)의 막료로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다시 최고 원수부의 판공처장(辦公處長)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과 같이 환국한 뒤 한국장교단장․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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