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인물] 이상설(李相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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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19-11-14 11:0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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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대종교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호는 보재(溥齋). 충북 진천출신. 7세 때 입양되었다.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시영․이회영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영어․프랑스어를 익히며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재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秘書監秘書郞)이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고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이 요구하는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배척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올렸는데,고종이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상소가 연이었다. 1905년 학부협판(學部協辦)과 법부협판을 역임했으며,11월초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그는 대신회의의 실무책임자인 참찬이었으나 일본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 조약이 고종의 인준을 거치지 아니한 사실을 알고 고종이 순사직(殉社稷)의 결심으로 5적을 처단하고,5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11월말 민영환의 자결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봄 이동녕․정순만(鄭淳萬) 등과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하여,8월경 그곳에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동녕 등과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6,7월경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고,제국주의열강의 이권협상의 성격을 띤 회의였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909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과 항카오 (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에 땅을 사서 100여 가구의 한국교포를 이주시키고,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년 6월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道義軍)을 편성하였다. 8월에 국권이 상실되자,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블라디보스톡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한민장(韓民長)․김학만․이종호(李鍾浩)․정재관․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출되어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1913년 이동휘․김립(金立)․이종호․장기영(張基永)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사관을 양성하였다.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 1915년 상해 영조계(英租界)에서 박은식․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유홍렬(劉鴻烈)․이춘일(李春日) 등의 민족운동자들이 화합하여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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