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집 삼한본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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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19-11-14 10:45: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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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집(修山集)』卷之十一「삼한본기(三韓本紀)」에 나타난 삼한에 대한 인식 [본문 역주] 대략 단군과 기자의 시기에 다른 부족이 있었는데, 동남에 예(濊)와 맥(貊)이 있고, 서남에 한(韓)이 있었으며, 동북에 부여(扶餘)와 말갈(靺鞨)이 있었다. 마치 중국에 만이(蠻夷)와 민월(閩粤)이 있던 것과 같다. 이 다섯 종족에서 한(韓)이 가장 컸다. 그 사람들이 진(辰) 땅에 거주하여 진한(辰韓)이라 했고, 변(卞) 땅에 거주하여 변한(卞韓)이라 했으며, 마(馬) 땅에 거주하여 마한(馬韓)이라 했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므로 진한과 변한의 사람들이 서한(西韓)으로 불렀다. 그 지역은 한강 이남에 있었으며 사방이 1천리였고, 78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모두 조선에 신속(臣屬)되어 공부(貢賦)를 내는데 마치 군현(郡縣)과 같았다. (중략 : 마한, 진한, 변한의 문화를 설명하는 부분.) 마한을 연 왕은 기준(箕準)으로 조선후(朝鮮后) 기자의 42세손으로서 왕 부(否)의 아들이다. 부가 죽고 즉위한 지 10여년에 박사 만(滿)이 서쪽 변경을 수비하다 반란을 일으켜 평양을 함락시켰다. 왕은 좌우의 궁인(宮人)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바다를 항해하여 한(韓)으로 들어가 금마(金馬)에 도읍했다. 여러 소국 54개를 공격하고 멸망시켜 군현(郡縣)으로 삼았다. 진한과 변한의 24개 국(國)도 역시 와서 신속하여, 직분을 다하고 공물을 바쳤다(修職貢). 그리고 왕은 조선의 옛 호칭을 바꾸어 마한이라 불렀고, 기자의 제사를 받들었다. 혹 조선 무강왕(武康王)이 즉 준(準)이라고 하는데, 어찌 준(準)이 한(韓) 땅에 거주하면서 옛 호칭 조선을 변화시키지 않았겠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준)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했는데, 그 이후의 역대 이름과 시호는 모두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오로지 나라를 세운 년수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왕 준(準)이 남쪽으로 건너간 87년 뒤에 후조선(後朝鮮) 왕 우거(右渠)가 한(漢)의 군대에 의해 멸망하였고 한(漢)은 처음으로 조선의 옛 땅에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의 사군(四郡)을 설치했다. 138년 뒤 진한 6부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임금으로 세웠는데, 국호는 서라벌(徐羅伐)이다. 167년 뒤 변한의 여러 국들은 서라벌에 항복했다. 169년 뒤 부여인 고주몽은 졸본을 근거로 했는데, 국호는 고구려이다. 187년 뒤 서라벌이 호공(瓠公)을 사자로 보내왔는데, 왕이 군대를 크게 벌려 위엄을 갖추고 불러들여, 진한과 변한은 본래 우리의 동맹국인데 혁거세가 임금이 된 이후 오래도록 직분을 다하거나 공물을 누락시켜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지 않으니 어찌 예(禮)라 하겠느냐고 말했다. 호공이 불손(不遜)하게 대답하자 왕이 노하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좌우에서 간(諫)하여 그를 돌려보냈다. 다음 해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고 서라벌은 사자를 보내 조문해왔다. 189년 뒤 고구려 왕 주몽이 죽었다. 190년 뒤 고구려 서자(庶子) 온조(溫祚)가 도망해와 서북의 100리의 땅을 나누어주었는데, 온조는 백제왕을 자칭하였고,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 200년 뒤 백제의 임금 온조가 신록(神鹿)을 사냥으로 잡아 바쳤다. 203년 뒤 온조가 한산(漢山)으로 옮기고 사신을 보내 천도를 알렸으며, 마침내 강계(疆界)를 획정하여 웅진(熊津)을 경계로 하였다. 214년 뒤 백제가 웅천(熊川)에 목책을 설치했다. 왕이 사자를 보내 백제의 임금 온조를 문책하며, 처음에 임금이 어려워 내게 귀의하니 과인은 100리로써 안거(安居)하게 했는데 임금을 대함이 야박하지 않았으니 나에게 보답하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 나라가 완전해지고 백성이 늘자 나를 적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높은 성과 깊은 못으로써 나의 봉역(封域)을 침범해오니 임금은 스스로 계책이 좋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온조는 부끄러워하며 마침내 그것을 헐었다. 백제는 말갈을 공격하여 그를 격파하고 포로를 바쳤다. 216년 뒤 백제의 임금 온조는 몰래 군사로 습격해와 왕도를 함락시켰다. 왕은 달려가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을 지켰다. 다음 해 두 성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장군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을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4년 뒤 군대가 패하여 죽고 마한은 망하였으며, 기씨(箕氏)는 제사되지 못하였다. 외사씨(外史氏)는 말한다. 나는 마한을 조선에 붙이고 위만을 그 뒤로 떨어뜨렸다. 그로써 정통과 비정통의 계통을 밝혔다. 기자의 자손들은 그 뒤 나뉘어 사방에 거주했다. 동방에 있는 자들은 국(國)으로 성을 삼았는데, 한씨(韓氏)가 있다. 기(箕)와 기(奇)가 음이 서로 비슷하여, 기씨(奇氏)가 있게 되었다. 중국에는 선우씨(鮮于氏)가 있다. 선우씨는 춘추 선우자(鮮虞子)의 후예로써 계통이 본래 가장 명확하기 때문에 동방에 온 자는 숭인전(崇仁殿)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숭인전은 본 왕조에서 기자묘를 평양에 세우고, 그 후예를 봉하여 숭인전감(崇仁殿監)으로 불렀다. 감(監)이란 종실의 칭호로 옛날의 자작이나 남작에 비교되며, 그로써 제사를 받들게 하는 예(禮)이다. 주근(周勤)은 나라가 망함에 외롭게 성을 지키다 죽어 홀로 세한(歲寒)의 절개를 지켰다. 또한 임씨(林氏)의 동사(東史)에 마한에 맹소(孟召)가 있어 복암성(覆巖城)을 지키고 백제에 항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 어찌 기씨(箕氏)의 인현(仁賢)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진한과 변한, 2한의 사적은 고찰할 수가 없으므로 독자적으로 세가(世家)를 세울 수 없다. 춘추에 기록된 황(黃), 수(隨), 기(紀), 괵(虢)과 같은 부류이다. [해설] : 이종휘의 삼한 인식과 삼한의 역사적 실체 단군과 기자의 정통이 삼한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이종휘는 단군조선-기자조선-삼한-후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기자의 후예인 준(準)이 서기전194년에 남쪽의 금마로 달아나 마한을 근거로 기자조선을 계승하고 있다가, 백제에 의해 서기9년(온조왕 27년)에 멸망하는 시점까지를 「삼한본기」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종휘가 주로 인용한 사료들은 『삼국지』, 『후한서』, 『삼국사기』 등이다. 필자 본인이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의 『동사회강(東史會綱)』도 보았다고 했는데, 필시 당시의 국내의 역사 관련 서적은 모두 참고했을 것이다. 「삼한본기」는 당시의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삼한의 정통성만 부각시킨 정도의 서술에 그쳤다. 좀 더 깊은 천착(穿鑿)을 통해 이종휘가 극복할 필요가 있는 기존 관점의 문제점이 당시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일까? 예(濊), 조선(朝鮮), 낙랑(樂浪), 현도(玄菟) 등의 개념을 더 천착(穿鑿)하여 삼한의 역사적 실체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대의 예(濊)는 춘추전국 시기에 지금의 요동, 산동의 두 반도 즉 발해 서안(西岸)의 연(燕)과 노(魯) 지역에 거주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예맥족이 일찍이 고대 예수(濊水) 부근의 예읍(濊邑)에 거주하였는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창현(滄縣) 서쪽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예(濊)의 본래 본거지를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경계 일대의 발해 연안지역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근거가 실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기전128년에 한(韓)에 내항(來降)한 예군(濊君) 남녀(南閭)를 토대로 설치된 창해군(滄海郡)이 발해 서안(西岸)의 하북성 지역에 있었고, 그 동북 일대의 난하(灤河) 서쪽에 조선(朝鮮)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예군(濊君)의 지역이 조선의 서쪽인 발해 서안에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의문은 북경시사회과학연구원(北京市社会科学院)의 상정(常征)이 그의 논문에서 제기한 하북성의 조하(朝河) 즉 조백하(朝白河)와 선수(鮮水 : 일명 龍鮮水)에서 그 이름을 취해 조선으로 했다며, 기자와 관련된 초기의 조선을 난하와 북경 사이의 발해 북안(北岸)에 위치시킨 관점을 재검토하게 만든다. 조선의 초기나 중기 그리고 후기의 위치를 한반도의 중부에 단단히 고정시켜 놓고 분석하는, 그 인식의 틀을 왜 고수하여야 하는가? 그 관점이 통설일 수 있지만, 사실(史實)과는 다를 수 있다는 학문적 가정이 연구자들에게 당연하게 선행되는 것이 바른 태도 아닌가? 다음으로 낙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얘기할 수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서기32년 4월 이후 최리(崔理)의 낙랑국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서기37년에는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낙랑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서기44년 9월에는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서기47년에는 잠우부락(蠶友部落)의 대가(大加)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漢)에 귀부(歸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후한서』「광무제기(光武帝紀)」하(下)에 의하면, 서기44년 가을 동이(東夷) 한국인(韓國人)이 무리를 끌고 낙랑에 와서 내부(內附)하였으며, 서기 47년에는 고구려의 한 무리가 낙랑에 와서 내속(內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한중(韓中)의 두 사서가 그 표현은 다르지만, 낙랑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후한(後漢)이 대립하고 있는 서기40년대 중후반의 상황을 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후한서』는 모두 고구려 모본왕(慕本王)이 서기49년에 후한(後漢)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은 물론 태원(太原) 등지를 공격한 사실도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기재로써 고구려와 후한(後漢)이 관련된 낙랑의 실체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이 사실과 관련하여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서기36년 낙랑이 신라의 북변을 침략하여 타산성(朶山城)을 함락시켰고, 서기37년에 고구려가 멸망시킨 낙랑에서 5천명이 와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다소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 기록들 사이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낙랑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서는 일정 정도 유용하다. 우리가 점하는 사료 해석에서 우선 고려해야 하는 점은, 분명 『삼국지』나 『후한서』에 기록된 삼한 관련 사실은 착오가 있을 수 있고, 작성 시점의 관점이 작용하여 서술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중국 서적 이외에 국내에 전해져온 유무형의 자료가 활용되면서, 일부분은 더욱 상세하게 서술되었겠지만 역시 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표1>참고도표. 四史의 비교
특히 조선과 낙랑 등에 대한 역사, 지리 등이 비록 간략하지만 처음으로 기록된 반고(班固)의 『한서』에서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고대사 관련 역사 해석의 오류가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고(班固)는 낙랑 및 조선과 관련하여, 자신이 직접 그려볼 수 있는 당대(當代)의 지도를 기준으로 했을 수 있으며, 이것이 오류의 시작일 것이다. 상정(常征)이 고대의 장성을 설명하면서, 장성은 고대에 황하의 발원지로부터 황하를 따라 제방 형식으로 쌓였고, 이것이 뒤의 군사기능을 지닌 장성이 되었으며 그 끝 지점은 바다에 이른다며 고대의 시각으로 고대의 사실(史實)을 보려 한 태도를 음미해보면 유용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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