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 [기자본기]를 통해본 고조선 인식(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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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19-11-14 10:4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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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강좌 자료] 2011년 9월 21일 임찬경 작성 『수산집(修山集)』卷之十一「동사본기(東史本紀)」의 기자본기(箕子本紀) 해석(2) 기자의 다스림은 법률 조문을 줄여 간단하게 하며 신의(信義)로 권하고 덕(德)으로 사람을 따르게 했다. 일찍이 하루의 난리에도 십년이 안정되지 못하여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지고 그 생업이 편안할 수 없다고 하는데, 40년 동안 무기를 놓고 쓰지 않고, 강포(强暴)한 이웃나라도 감히 서로 침략하지 않아, 동방(東方)이 크게 안정되고 조정과 민간이 아무 탈 없이 편안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기쁘게 이를 즐겨서, 패수(浿水)를 황하(黃河)에 비유하여 노래를 지어 그 덕(德)을 칭송하였다. 그 뒤 30여 세(世)인 무강왕(武康王)에 이르러 주(周)의 연백(燕伯)이 자기 분수(分數)에 넘게 왕을 자칭(自稱)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 하였다. 후(后)가 분노하여 사대부의 힘으로써 주(周)의 그릇된 신하인 연백(燕伯)을 공격함으로써 서쪽으로 주(周)의 왕실을 높이고자 한다고 군신들에게 말했다. 대부(大夫) 예(禮)가 힘써 간언하니 후(后)가 그만 두고 예(禮)를 보내 연군(燕君)을 만나 우호관계를 맺었다. 연군(燕君)도 그만 두고 감히 공격하지 않았다. 뒤에 후(后)도 왕을 칭했다.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였는데, 역사에 그 이름과 시호(諡號)가 전하지 않는다. 뒤의 왕들이 덕을 닦지 않으며, 그 백성을 모질게 부리고, 인접 국가에 교만하니, 연(燕)이 군사를 보내 공격해 왔다.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고, 땅이 2천 리(里)가 줄어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으며, 요동을 상실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로서 조선은 약해지게 되었고, 기자의 업(業)도 쇠퇴하게 되었다. 41세(世) 손(孫) 부(否)에 이르니, 그가 부왕(否王)이다. 진(秦)의 왕 영정(嬴政)이 주(周)를 멸하고 천하를 병합하여 스스로 진시황제(秦始皇帝)라 칭했으며, 요동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 왕이 그를 두려워하여 진(秦)에 신하로 복종하였다. 왕이 죽고 태자 준(準)을 즉위시켰으니, 그가 준왕(準王)이다. 그때 연(燕), 제(齊), 조(趙)가 진에 들어가니, 옛 백성 다수가 준왕(準王)에게 망명해왔다. 한(漢)의 황제가 진(秦)을 멸망시키고 공신(功臣)인 노관(盧綰)을 연(燕)에 봉했으며, 조선과는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였다. 연의 왕 노관이 도망가고,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다수의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변경 안의 공지(空地)에 거주하면서 왕국을 지키기를 원했다. 왕은 박사(博士) 벼슬을 내려, 규(圭)를 하사하고 백 리를 봉해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시켰다. 박사 만(滿)은 이에 연(燕)과 제(齊)의 망명을 불러들여 무리가 점차 커졌는데, 사람을 보내 한(漢)의 군대가 열 갈래의 길로 쳐들어오니 들어가서 숙위(宿衛)하겠다며 거짓말을 하고 결국 배반하여 평양을 습격했다. 왕은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떠서 남쪽의 한(韓)으로 도망가니, 만(滿)이 마침내 조선을 점거했다. 기씨(箕氏)는 평양에 도읍하여, 42대를 이었으니 무릇 929년이다. 대략 기씨가 망한 것은 주(周)의 군왕(君王) 난(赧)이 진(秦)에 복속한지 63년 뒤여서 그 역년(歷年)도 대개 서로 같다고 전해진다. 그 1천5백여 년 뒤 우리 태조가 남평양(南平壤)에 나라를 세우니, 문물예악이 끊어졌다 다시 일어났다. 외사씨(外史氏)는 말한다. 내가 서해를 보니 수양산(首陽山)이 있고, 그 남쪽에 이른바 백이(伯夷) 및 숙제(叔齊) 형제의 섬이란 것이 있었다. 그러한 즉 기자가 주(周)를 떠날 때 백이와 숙제도 역시 기자를 따라 동쪽으로 옮긴 것인가? 내가 중국 땅을 살펴보니, 곽주(霍州) 수양(首陽)은 풍호(豐鎬)에 매우 가깝고, 고죽국(孤竹國)은 요수의 서쪽에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그 고국(故國)으로부터 결국 이곳으로 온 것인지, 그것은 잘 알 수 없다. 그 뒤 공자 역시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면, 하늘이 동국(東國)을 만들어 군자(君子)가 세상을 피하는 곳으로 삼으려 했으니, 역시 참 놀랍다. 은주(殷周) 때에 태백(泰伯)과 우중(虞仲)은 오(吳)로 갔고, 기자는 조선에 머물렀다. 오(吳)는 합려(闔廬) 시기에 이르러서도 필경 문신의 풍속이 변하지 않았으나, 조선의 인현(仁賢)에 의한 교화는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았다. 역시 기자의 성스러움을 알 수 있다. 공자는 군자가 그곳에 머문다면 어찌 누추하겠느냐고 말했는데, 믿을 만하다. 조선의 후(侯) 연(燕)을 쳐서 주(周)를 높여 그로써 춘추(春秋)의 도리를 밝혔다면, 아마 그 이룬 것이 가히 제(齊)의 환공(桓公)이나 진(晉)의 문공(文公) 등 중국 후백(侯伯)과 같은 것이다. 대부 예(禮)의 간언은 어찌하여 그리한 것인가? 군자의 형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후(侯)는 빛난다. 후(侯)는 빛난다. [해설] : 기자조선(箕子朝鮮)에 대한 인식 형성과 그 문제점 극복의 과제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성종(成宗) 4년 계사(癸巳)(1473년) 4월 18일… 평안도 관찰사 이계손(李繼孫)에게 하서(下書)하였다. 듣건대 도내(道內) 평양(平壤)에 기자묘(箕子墓)라고 일컫는 것이 있어 정자각(丁字閣)을 짓고 사람을 차임(差任)하여 수호한다고 하니, 그 수호하는 사람의 수와 치제(致祭)하는 여부를 자세히 상고(詳考)하여 알려라. 또 기자묘라고 일컫는 것이 어느 시대에 비롯하였으며, 전기(典記)로서 징험할 만한 어떤 것이 있는지 아울러 상고하여 알려라.” 사실 고려 중엽 이후 기자를 국조(國祖)로 숭배하는 의식이 형성되었지만, 그런 인식을 공유하는 조선의 유학자(儒學者)들에게도 기자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정립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기자에 대한 체계적 서술과 그러한 인식의 확산은 조선 중엽 이후에 이루어졌다. 이이(李珥)가 1580년에 저술한 『기자실기(箕子實記)』에서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동방은 기자의 망극한 은혜를 받았으니 그 실적에 대하여 마땅히 집집마다 읽고 사람마다 익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선비가 남의 갑작스런 질문을 받으면 분명히 답변할 사람이 적으니, 그것은 여러 가지 서책이 없어져서 이것을 널리 배울 수 없는데 연유하는 것인가 한다. 윤공 두수(尹公斗壽)가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중국천자께 조현(朝見)하였더니 중국 조정의 사인(士人)들이 기자의 한 일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하여 왔다. 윤공이 단독으로 대답하지 못함을 민망스럽게 여겼다. 이미 돌아온 뒤에 널리 경·사·자·서(經史子書)를 참고하여 사실을 수집하고 성현의 논하신 것과 그 이하 시인이 읊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워 모아 서책을 만들어 서명(書名)을 기자지(箕子志)라고 하였으니, 그 공로가 참으로 컸고 후학에게 또한 지극히 좋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겠다. 다만 생각되는 것은 경전을 뒤섞어 편찬하였으므로 계통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珥)가 이에 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서 기자지 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골라서 요약하여 한 책을 만들고, 나라를 세운 경과와 세계(世系)며 지나온 연수 등을 대략 서술하고 책이름을 기자실기(箕子實紀)라 하여 읽기에 편리하기를 바란다.” 조선의 사학(史學)으로는 기자 혹은 고대 조선과 관련된 사실(史實)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자료를 체계적 및 비판적으로 탐색하여 축적할 수 없었고, 연구도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으며, 극복을 위한 연구방법론도 형성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당시의 역사 연구 풍토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영조 46년 경인(庚寅)(1770년) 1월 17일 …사직(司直) 김응순(金應淳)이 상소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동방 문헌은 그릇된 것을 그릇 전하여 지금 고징(考徵)할 수 없습니다. 기자 이전은 비록 있으나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자에서 기준(箕準)까지는 42세(世)가 되었으니 그 사이의 사적(事蹟)을 전하는 것이 자세해야 함에도 전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 이후로부터 연혁(沿革)과 시종(始終)에 대하여 그 학설이 한결같지 아니합니다. 조선(朝鮮)의 칭호에 있어 중국사서(中國史書)에 나타난 것은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한다.’하였고, 《동사(東史)》에 기재되어 있는 경우는 ‘동쪽에 해가 먼저 밝는다고 하여 조선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국호(國號)는 쉽사리 알 수 있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자세하지 않으니, 더구나 다른 의심스런 경우이겠습니까? 지금 이에 관한 책을 속히 이루고자 하나 그릇됨을 고증할 즈음에 정밀하냐의 여부를 모두 궁구할 수가 없으니, 반드시 1, 2년은 걸려야만 비로소 실마리가 잡힐 것입니다.” 기자와 조선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검토는 아직 논란 속에 진행 중이다. 사실(史實) 관계를 밝히려면 다음의 단계에 따른 고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1. 문헌 검토 : 기자와 조선을 연결시키는 초기의 기록 검토 1) 『상서대전(尙書大傳)』「殷傅」 “주나라 무왕은 은(殷)을 정벌한 후에 기자를 풀어 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치욕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도망했다. 무왕이 이를 듣고 그를 조선후에 봉하였다. 기자는 이미 주나라의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신하의 예가 없을 수 없어 (무왕) 13년에 내조하였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에 대해서 물어보았다(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武王因其朝而間鴻範)。” 2) 『사기(史記)』 : 「秦始皇本紀」 “地东至海暨朝鲜,西至临洮、羌中,南至北向户,北据河为塞,并阴山至辽东。”, 「孝武本纪」 “其明年,伐朝鲜。”, 「律書」 “历至孝文即位(-179),将军陈武等议曰:“南越、朝鲜自全秦时内属为臣子,后且拥兵阻阸,选蠕观望。高祖时天下新定,人民小安,未可复兴兵。今陛下仁惠抚百姓,恩泽加海内,宜及士民乐用,征讨逆党,以一封疆。”, 「宋微子世家」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朝鮮列傳」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3) 『한서(漢書)』 기록 2. 고고학 자료 1) 기후 관련 유물 검토 2) 하북성, 요령성, 한반도 일대의 유물 분포 비교 3) 선우황(鮮于璜 : 서기165년 건립) 비석 비문 검토
3. 기타 인문학 자료 : 지리, 정치학, 인류학, 문화학 등의 자료
4. 종합 검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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