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 [기자본기]를 통해본 고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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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19-11-14 10:4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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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집(修山集)』卷之十一「동사본기(東史本紀)」의 기자본기(箕子本紀) 해석 임 찬 경(국학연구소 연구원) 조선의 후(后)1) 기자(箕子)의 성은 자씨(子氏)이다. 혹은 이름이 서여(胥餘)였다고 한다. 은(殷)의 왕(王)인 성탕(成湯)의 16세 손(孫)으로써 마지막 제(帝)인 수(受)2)의 제부(諸父)3)이다. 처음 기(箕)에 봉(封)해지며 자(子)의 작위(爵位)를 얻어서 기자로 불리게 되었다. 기자는 은(殷)을 섬겨 태사(太師)가 되었다. 당시 은의 도(道)는 쇠(衰)하여, 경사(卿士)와 서민은 스승을 섬기는데 법도(法度)대로 하지 않고, 인륜과 도덕은 무너졌고, 대도(大道)는 거의 없어졌다. 기자는 홀로 하후씨(夏后氏)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정리했다.4) 또한 주(周)의 서백(西伯) 창(昌)은 유리(羑里)에 갇혀있으면서 복희(伏羲)의 역(易)을 해석했다. 당시 천하에서 주(周)의 서백(西伯)과 기자 서여는 모두 성현이었다. 마지막 제(帝)는 법도가 없었다. 왕자 비간(比干)은 간(諫)하다 죽었고, 미자(微子) 계(啓)는 은(殷)을 떠났다. 기자가 간해도 듣지 않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며 노비가 되었다. 그는 상(商)이 망하여 없어지더라도 자신은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말했다. 주(周)의 후(侯)5) 발(發)6)이 주(紂)를 멸망시킨 뒤 소공(召公) 석(奭)에게 명하여 기자의 구금을 풀어주었다. 왕(王)7)이 직접 그를 만나서, 은(殷)을 망하게 한 원인을 물으니, 기자가 차마 말하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천도(天道)를 물으니, 기자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설명하였다. (홍범구주 설명 부분 생략) 기자가 주왕(周王)을 위해 도(道)를 전한 뒤에 중국을 피하여 조선(朝鮮)으로 갔다. 은(殷)의 유민과 구신(舊臣)으로서 그를 따르는 자가 오천(五千)이었다.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의무(醫巫), 음양(陰陽), 복서(卜筮)의 무리와 온갖 기술과 재주를 가진 자들이 모두 갖추어졌다. 주(周)의 수신(守臣)도 기자의 성스러움 때문에 감히 가로막지 못하였다. 주왕(周王)이 그 얘기를 듣고 작위(爵位)를 봉(封)하여 후(侯)로 삼았지만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 처음 요수(遼水)8)의 동쪽에 거주했는데,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드니, 단씨(檀氏)는 백악(白岳)으로 옮겨갔다. 기자가 평양(平壤)에 이르자, 동쪽 백성들의 부로(父老)와 추장(酋長)이 모두 나와서 맞이했다. 기자가 말했다. 여봐라! 너희 무리들이 거칠고 더럽고 편벽한 곳에 있어서 예의(禮義)를 알지 못한지가 오래되었구나! 너희 백성에게 약법팔조(約法八條)를 줄 것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남녀유별(男女有別), 장소유서(長少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백성이 서로 죽이면 목숨으로 갚고, 서로 상하게 하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면 남자는 노(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데 스스로 속죄하려면 50만을 내야하지만 비록 죄를 면해 백성이 되어도 시집이나 장가갈 때 짝으로 삼는 자가 없을 것이다. 정전(井田)을 나누고, 백성의 재산을 정하였는데 70무(畒)로서 공전(公田)을 돕게 하였다. 전(田)의 모양은 전자(田字)와 비슷하여 주(周)의 제도와 조금 다르나 그 10분의 1을 냄은 같았다. 전야(田野), 도읍, 음식, 기용(器用), 변두(籩䇺), 의관(衣冠) 제도는 모두 중국과 같았다. 서쪽으로는 요하(遼河)를 넘었고, 동북쪽으로 홀한(忽汗)9)에 이르렀으며, 남쪽 끝은 바다에 닿으니 땅이 사방 4천에서 5천 리(里)였다. 예(濊), 맥(貊), 부여(扶餘), 한(韓)의 무리가 태도를 바꾸어 귀의(歸義)10)하였다. 기자가 동방을 다스린지 1년에 백성은 예의의 방도를 알았다. 3년째에는 백성이 크게 교화되어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의 나라가 되었다. 믿음과 겸양을 숭상하고, 유술(儒術)11)을 독실하게 하였다. 마을에는 개가 짖어 쫓을 도둑이 없고, 밤에도 집들이 문을 닫지 않았다. 부인들은 정조가 있고 믿음이 있어 음란하고 간사한 행위가 없었다. 대체로 동쪽의 백성은 부드럽고 착하여 쉽게 교화할 수 있었는데, 그 천성(天性) 때문이었다. 기자가 죽으니,12) 토산(兎山)13)에 장사지냈다. 태자를 즉위시켰는데 사서(史書)에서 그 명씨(名氏)가 누락되었다. 기자는 병술(丙戌)에 태어나 기묘(己卯)에 동국(東國)에 들어왔고, 무오(戊午)에 죽었다. 40년 재위했는데, 대체로 조선의 후(后) 기자는 주(周)의 무왕(武王)과 같은 시대였고, 향년(享年)은 모두 93세였다. (이하 ‘기자본기(箕子本紀)’의 내용은 다음 회에 다루고자 합니다.) 箕子本紀 朝鮮后箕子。姓子氏。或曰。名胥餘。殷王成湯十六世孫。末帝受諸父也。始封於箕。子爵。因號曰箕子。箕子仕殷爲太師。時殷道衰。卿士庶民師師非度。汩陳倫常。大道幾隱。箕子獨治夏后氏洪範九疇。而周西伯昌。拘於羑里。演伏羲之易。是時天下。周西伯,箕子胥餘。皆爲聖賢。末帝無度。王子比干諫而死。微子啓去之。箕子諫不聽。乃被髮佯狂爲奴。嘗曰。商其淪喪。我罔爲臣僕。周侯發旣克受。命召公奭。釋箕子之囚。王就見之。問殷所以亡。箕子不忍言。王乃問以天道。箕子陳洪範九疇。其大目。一曰五行。二曰敬用五事。三曰農用八政。四曰協用五紀。五曰建用皇極。六曰乂用三德。七曰明用稽疑。八曰念用庶徵。九曰嚮用五福。威用六極。其論皇極曰。無偏無陂。遵王之義。無有作好。遵王之道。無有作惡。遵王之路。無偏無黨。王道蕩蕩。無黨無偏。王道平平。無反無側。王道正直。會其有極。歸其有極。箕子旣爲周王傳道。乃避中國。走之朝鮮。殷之遺民舊臣隨之者五千。詩書禮樂醫巫陰陽卜筮之流。百工技藝皆具焉。周之守臣。以箕子之聖也。莫敢阻遏。周王聞之。因封之爵。爲侯而不臣焉。初居遼水之左。百姓咸歸之。於是有檀氏徙白岳。箕子至平壤。東民父老酋長咸來迎。箕子曰。嗟爾有衆。荒陋僻處。不知禮義之日久矣。予與爾百姓。約法八條。父子有親。君臣有義。男女有別。長少有序。朋友有信。百姓相殺。償以命。相傷。以糓償。相盜。男爲奴。女爲婢。自贖者人五十萬。雖免爲民。嫁娶無所售。畫井田。制民産。爲畒七十而助公田。田形類田字。與周制略異。然其什而一。一也。田野都邑飮食器用籩䇺衣冠制度。悉同于中國。西過于遼河。東北至于忽汗。南極于海。地方四五千里。濊貊餘韓之屬。革面歸義。箕子治東方朞年。民知有禮義之方。三年。民大化。爲詩書禮樂之邦。崇信讓。篤儒術。邑無狗吠之盜。夜戶不閉。婦人貞信。無淫辟之行。盖東民柔善。敎化易入。其天性然也。箕子薨。葬兎山。太子立。史失其名氏。箕子生於丙戌。以己卯入于東國。戊午薨。在位四十年。盖朝鮮后箕子周武王同時。而享年皆九十三云。箕子之治。省簡文條而用信義務。以德服人。嘗謂一日之亂。十年不定。生民塗炭。不能安其業。四十年之間。干戈措而不用。而强暴隣國。不敢相侵。東方大定。朝野無事。百姓皆歡樂之。以浿水比黃河。作歌以頌其德。其後三十餘世。至武康王。周燕伯僭稱王。將東略地。后怒謂羣臣曰。願從士大夫之力。擊周之僭賊臣燕伯。以西尊周室。大夫禮力諫。后乃止。使禮往見燕君通好。燕君亦止。不敢攻。後后亦稱王。王薨。太子立。史亦失其名謚。後王不修德。虐用其民。驕於隣國。燕乃遣兵來攻。我師大敗。縮地二千里。以滿潘汗爲界。遂失遼東。於是朝鮮遂弱。而箕子之業衰。至四十一世孫否。是爲王否。秦王嬴政滅周幷天下。自稱秦始皇帝。築長城至遼東。王畏之。臣服于秦。王薨。太子準立。是爲王準。時燕,齊,趙入于秦。舊民多亡歸之。漢皇帝滅秦。封功臣盧綰于燕。與朝鮮浿水爲界。燕王綰亡。燕人衛滿率黨數百千人東渡浿。求居塞內空地。藩屛王國。王拜爲博士。錫圭封之百里。令守西鄙。博士滿乃招納燕,齊亡命。徒衆漸盛。詐遣人稱漢兵十道至。欲入宿衛。遂叛襲平壤。王戰不勝。浮海南奔韓。滿遂據朝鮮。箕氏都平壤。傳世四十二。凡九百二十九年。盖箕氏亡。在周君王赧入秦後六十三年。其歷年亦大槩相同云。其後千五百有餘年。我太祖立國南平壤。文物禮樂。絶而復興。 外史氏曰。余觀西海有首陽山。其南有所謂夷齊兄弟嶼者。然則箕子之避周。伯夷叔齊。亦隨之東遊耶。余觀中國輿地。霍州首陽。迫近豐鎬。而孤竹國在遼水之西。豈二人者。自其故國。遂來於斯歟。是未可知也。其後孔子又欲居九夷。由是觀之。天生東國。爲君子避世之所耶。吁亦奇矣。當殷周之際。泰伯,虞仲去之吳。箕子居朝鮮。吳至闔廬。而竟不變文身之風。朝鮮仁賢之化。至于今不絶。亦可以見箕子之聖矣。孔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信矣哉。朝鮮侯伐燕尊周。以明春秋之義。倘其克成。可與齊桓,晉文中國侯伯侔矣。大夫禮之諫。抑獨何哉。難免君子之誅矣。雖然。侯則烈哉。侯則烈哉。 [해설] : 기자조선(箕子朝鮮)이란 역사관점의 성립과 그 허구(虛構)의 역사화(歷史化) 과정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며, 그 극복을 전제로 한국상고사는 물론 중국상고사의 올바른 정립(正立)도 가능할 것이다. 필자는 2009년 4월 19일 하남성(河南省) 하택시(菏泽市) 조현(曹縣) 정장향(鄭庄鄕) 왕승보촌(王勝普村)에 있는 기자총(箕子塚)의 실체를 직접 확인했다. 기자 또는 기자조선의 위사(僞史) 여부를 검토하기 위한 답사였다. 하남성과 산서성(山西省) 등지에 기자의 유적 몇 곳이 있었는데, 이런 유적을 확인하면서 기자의 실재(實在)를 확인하고, 또한 사서(史書) 기록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기자조선은 『한서(漢書)』 이후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가상(假想) 국가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기자를 한국사와 결부시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기자조선은 허구(虛構) 그 자체였다. 중국 고대의 문헌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封)했다는 인식은 복승(伏勝 : 서기전260∼서기전161년)이 편찬했다고 전하는 『상서대전(尚書大傳)』권(卷)2「주서(周書)」의 “武王釋箕子之囚,箕子不忍周之釋,走之朝鮮,武王聞之,因以朝鮮封之,箕子既受周之封,不得無臣禮”란 기록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상서대전(尚書大傳)』은 복승(伏勝)의 직접적 저작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가 사망한 뒤에 그의 학생인 장생(張生)과 구양생(歐陽生) 및 그 뒤의 박사(博士)들이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서대전(尚書大傳)』의 정확한 작자와 책의 완성 시기는 불투명한 것이다. 『상서대전(尚書大傳)』과 함께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관점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사료(史料)는 사마천(司馬遷 : 서기전145년∼기전 87년)의 『사기(史記)』이다. 사마천은 서기전 108년 한(漢)의 무제(武帝)가 조선에 대한 전쟁을 벌일 당시에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령(太史令)으로서 그 전쟁을 지켜보았고, 뒤에 그 전쟁의 경과와 결과를 중심으로 「조선열전(朝鮮列傳)」을 기록하였다. 『사기(史記)』에서 사마천은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인식하였고,14) 팽오가(彭吳賈)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다고 인식했으며,15) 조선의 지리위치는 물론 연(燕) 및 진한(秦漢)과 조선의 교섭과 전쟁에 관해서도 언급하였고,16) 「조선열전」에서도 진한(秦漢) 이후의 연(燕)과 조선의 관계 및 조선의 멸망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사관(史官)으로서 서기전 108년 직접 무제(武帝)의 조선 정벌 전쟁을 목격하고 기록한 사마천은 『사기』「효무본기(孝武本紀)」에서 “조선을 정벌했다”고 짧게 기록했고, 「조선열전」에서도 “이로서 조선을 평정(平定)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을 뿐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선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조선의 멸망 시점으로 기록된 서기전108년으로부터 거리가 상당히 있는 시기의 사관(史官)인 반고(班固 : 서기32년∼92년)의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나타나고 있다. 관련 부분을 해석하고, 원문을 덧붙이면 아래와 같다. 『前漢書』卷28下「地理志」第8下 元菟郡17)과 樂浪郡은 武帝 때에 설치하였는데 모두 朝鮮, 濊貊, 句麗의 蠻夷이다. 殷의 道가 衰하자 箕子는 朝鮮으로 갔다. 顔師古는 “『史記』에는 周의 武王이 商의 紂王을 정벌하고 箕子를 朝鮮에 봉했다고 하였으니,18) 여기의 기록과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箕子는 그 나라 백성들에게 禮義와 농사짓고 누에치고 길쌈하는 것을 가르쳤다. 樂浪과 朝鮮의 백성들에게는 어기는 것이 금지된 8조가 있었다.19)顔師古는 “8조 모두를 확인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20) 상대를 죽인 자는 마땅히 그에 맞게 죽음으로 갚았다.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보상을 시켰다. 도둑질을 한 자는 남자의 경우는 그 집의 奴僕을 삼고 여자의 경우는 그 집의 女婢를 삼았는데, 속죄를 원하는 경우는 1인당 50만을 내놓게 하였다. 비록 풀려나 일반 백성이 된다 하더라도 세속에서는 오히려 부끄러워하였으니, 시집가고 장가갈 때에 짝을 구할 수가 없었다. 顔師古는 讎를 匹이라 하였으며, 짝을 이루는 한쪽을 讎라 하며 售로 읽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나라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을 하지 않았으니, 대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다. 부인은 정조와 신의를 지키고 음탕하거나 간사한 짓을 하지 않았다. 顔師古는 辟는 僻로 읽는다고 하였다. 농민들은 먹고 마실 때 籩豆21)를 사용하였다. …… 그러나 東夷는 천성이 유순하여 三方의 外族과 달랐다. 顔師古는 三方은 南西北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孔子께서 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비탄하시고 바다를 항해하여22) “九夷에서 살고 싶어 하신 것”23)은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顔師古는 “『논어』에 ‘孔子께서 말씀하시길 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날까 하는데 아마 나를 따라올 사람은 由24)일 것이다’라고 했는데,25) 뗏목을 타고 東夷로 가고 싶어 하신 것은 그 나라에 仁賢한 사람의 교화가 있어서 바른 도리를 행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原文] 史部/正史類/前漢書/卷二十八下/地理志第八下 …… 元莬樂浪武帝時置皆朝鮮濊貉句驪蠻夷殷道衰箕子去之朝鮮 師古曰史記云武王伐紂封箕子扵朝鮮與此不同 教其民以禮義田蠶織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 師古曰八條不具見 相殺以當時償殺相傷以穀償相盜者男沒入為其家奴女子為婢欲自償者人五十萬雖免為民俗猶羞之嫁取無所讎 師古曰讎匹也一曰讎讀曰售 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戸之閉婦人貞信不淫辟 師古曰辟讀曰僻 其 田 民飲食以籩豆… 然東夷天性柔順異於三方之外 師古曰三方謂南西北也 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 師古曰論語稱孔子曰道不行乗桴浮於海從我者其由也歟言欲乗桴筏而適東夷以其國有仁賢之化可以行道也 …… 『한서』「지리지」에서 반고(班固 : 서기32년∼92년)는 조선과 관련하여 몇 가지 서술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는 기자와 조선을 정치 및 문화적으로 밀접히 연결시킴으로써 뒤의 역사가들이 기자조선의 존재를 설정하는 근거를 만든 것이다. 둘째는 공자(孔子)가 가서 살고 싶어했다는 구이(九夷)를 조선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반고(班固)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서술의 오류를 범함으로써, 조선을 주(周) 시기부터 중원(中原)과 관계를 맺는 주변국으로 규정하려 했으며, 진한(秦漢) 이전 춘추전국 시기에 구이(九夷)를 포함한 동이(東夷)의 영역에 조선이 포괄되고 있었다는 역사논리를 형성하려고 하였다. 반고가 『한서』를 기본적으로 완성한 시기는 동한(東漢) 장제(章帝) 건초(建初 : 서기 76년∼84년) 연간으로서 「지리지」는 그 당시의 역사지리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반고는 『한서』의 「무제기(武帝紀)」 및 「조선전」에서 조선을 평정(平定)하고 “眞番, 臨屯, 樂浪, 玄菟”의 사군(四郡)을 설치했다고 기록했는데, 정작 「지리지」에는 낙랑과 현도만을 기록하였다. 이는 「지리지」 작성 당시에 진번과 임둔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 두 군(郡)에 대한 이해도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낙랑군과 조선에 대해서는 그가 인식한 그대로 기록을 남겼지만, 그 기록의 방식과 내용에는 문제가 많다. 서기전 108년 무제(武帝)가 설치한 낙랑군은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 북경의 동남쪽 일대에 있었는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이곳의 낙랑군은 서기 37년에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에 의해 완전하게 멸망하고 말았다.26) 동한을 건국한 광무제(光武帝)는 당시 중원 지역의 내란 평정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 있었고, 때문에 고구려의 낙랑군 정벌에 대해서는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중원의 통합을 어느 정도 완성한 광무제는 서기 44년(光武帝 建武 20년, 大武神王 27년)에야 뒤늦게 고구려에 의한 낙랑군 멸망에 대한 대응조치를 취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평양 일대에 있던 옛 낙랑국(樂浪國) 지역을 정벌하여 낙랑군을 새로이 설치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大武神王) 27년(서기 44년) 9월에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27) 이때 광무제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낙랑은 이미 서기 37년에 고구려가 멸망시켰던 동한(東漢)의 낙랑군 지역이 아니라, 그 이전인 서기 32년(大武神王 15년, 光武帝 建武 8년)에 고구려가 점령한 최리(崔理)의 낙랑국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에 의한 최리의 낙랑국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大武神王) 15년(서기 32년) 4월 왕자 好童이 沃沮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마침 樂浪王 崔理가 그곳을 순행하다가 好童을 보고 “君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니 혹 北國神王의 아들이 아니냐?”하며 드디어 그를 데리고 돌아와 사위로 삼았다. 그 후 好童이 귀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崔理의 딸에게 “너의 나라 武庫에 들어가 鼓角을 부수면, 내가 禮로써 맞이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맞지 않겠다.”고 하였다. 樂浪에는 鼓角이 있어 적병이 오면 저절로 울리기 때문에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崔理의 딸은 잘 드는 칼을 가지고 武庫에 들어가 북의 가죽과 吹角의 주둥아리를 부순 후 好童에게 알렸다. 好童은 大武神王에게 樂浪을 습격하자고 하였다. 崔理는 鼓角이 울리지 아니하므로 방어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군사가 성 아래에 몰려든 후에야 鼓角이 부숴진 것을 알았다. 마침내 그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28) 위의 『삼국사기』 기록처럼 원래 지금의 평양 일대에는 최리가 낙랑왕으로서 지배하고 있던 낙랑국이 있었다. 비록 명칭이 비슷하지만, 이 낙랑국은 서기전 108년 서한(西漢)의 무제(武帝)가 지금의 북경 동남쪽 일대에 설치했던 한사군 중의 낙랑군과는 다른 하나의 독립국이었다. 평양 일대에 있던 이 낙랑국은 서기 32년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되어 고구려에 복속되었고, 서기 44년에 동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다시 이곳에 낙랑군을 새로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광무제의 이러한 군사행동은 일찍이 서기 37년에 현재의 북경 동남쪽 일대에 위치한 낙랑군을 점령하여 그를 기반으로 더욱 세력을 서쪽으로 확장하려는 고구려와 정면에서 전면적인 군사대결을 피하면서, 고구려 배후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적대적 관계인 고구려의 앞뒤 두 방향에서 고구려의 군사적 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전략적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고구려가 서진에 집중하고 있어서 광무제의 한반도 낙랑군 건설이라는 우회적인 방법이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광무제의 이러한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광무제가 평양 일대에 낙랑군을 새로 설치하자 주변의 정치세력들이 내부(來附)해 왔다.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낙랑군을 설치하던 그 해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고, 광무제는 소마시를 한(漢)의 염사읍군으로 봉하며 낙랑군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또한 건무(建武) 23년(서기 47년) 겨울에 구려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 여명이 낙랑에 투항하였다고 한다.29) 대승의 투항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閔中王) 4년 10월에 잠우부락의 대가 대승 등 1만여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漢)에 귀부(歸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30) 이렇듯 광무제가 서기 44년 한반도에 세운 낙랑군은 이미 그 자리에 오래 존속했던 낙랑국을 기반으로 주변을 통합하며 한반도 안에 하나의 한족(漢族) 중심 문화 및 정치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반고의 『한서』「지리지」는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작성되었고, 당연히 당시의 조선 및 낙랑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반고가 낙랑군과 관련한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단 한 줄의 『사기』 기록 등을 근거로 기자를 조선 및 낙랑과 연관시켜 『한서』「지리지」에 문헌적 근거가 전혀 없는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넣으며 역사를 조작한 것이다. 물론 서기 44년 광무제가 한반도에 낙랑군을 설치하면서, 반고가 『한서』를 저술하던 서기 80년 전후 시기의 동한(東漢) 학자들에게 당시 한반도에 있으면서 조선을 계승했던 여러 국가들(즉 三韓 등)의 사정이 잘 알려졌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공자(孔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九夷)가 바로 조선”이라는 등의 논리는 반고가 처음 만들어냈으며 전혀 역사사실과는 맞지 않는 조작으로 그 어디에서 정확한 문헌적 근거도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다. 『한서』「지리지」에 보인 조선, 기자, 구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그 뒤의 여러 서적에서 그대로 답습되며 오히려 그 내용이 확대되었고 또 더 왜곡되었다. 허신(许慎 : 약 서기 58년〜147년)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이(夷)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 자는 오래 삶으로서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게 되었고, 공자가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므로 구이에 가서 살고자 바다를 떠돌겠다는 말도 있게 되었다.”라고 할 수 있었고,31) 응소(應劭 : 약 153년〜196년)는 『풍속통의(风俗通义)』에 “동방의 사람은 살리기를 좋아하니(好生 : 생명을 구함), 만물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되는 것과 같다. 이(夷)라는 것은 근본이다.”라고 기록했다며 후인(後人)들이 그 글을 두루 인용했는데,32) 『한서』「지리지」에서 비롯된 동이, 조선 및 구이와 관련된 이러한 해석들이 『후한서』「동이열전」에서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이후 중국 학계에서 구이 및 동이를 조선과 관련시켜 해석하는 주요한 문헌 근거로 되었다. 한국에서도 공자가 가서 살고자 한 구이(九夷)를 조선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존재하는데, 이는 기자와 공자를 숭배하는 근세조선의 사대적 유학에 얽매어 그런 견해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며, 철저하게 문헌 고증을 통해 얻은 결론은 아니다. 일찍이 여정덕(黎靖德)이 1270년에 출간한 『주자어류(朱子语类)』에서 “九夷에 대하여 앞선 무리들 중에서 혹 箕子를 가지고 증거를 대며 朝鮮 따위를 말하였는데, 그것이 맞는지요?”라고 물으니 朱子가 “그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옛날 中國에도 夷狄이 있었으니 魯에 있었던 淮夷와 周에 있었던 伊雒의 戎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기록하였다.33) 淸 시기의 학자 孫詒讓(서기 1848년〜1908년)은 『墨子閒詁』에서 孔子가 가서 살고자 한 九夷는 실제로 淮泗34) 일대에 있었으며 북쪽으로 齊 및 魯와 접경을 이루고 있었고 때문에 『論語』에서 “공자가 九夷에서 살고 싶다”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35) 20세기 이후 중국에서 東夷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누적되고, 문헌 고증연구 수준도 향상되면서 東夷 및 九夷의 실체에 대해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다. 『한서』「지리지」의 東夷, 九夷, 箕子, 朝鮮, 樂浪 및 玄菟에 대한 기존 해석의 오류를 극복하려는 한국 학계의 노력이 절실하다. 1) 후(后) : 「동사(東史)」의 ‘단군본기’는 “조선의 왕 단군”이란 표현으로 시작되고 있다. 『서경(書經)』에 의하면 후(后)는 제(帝)의 제후(諸侯)들을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순전(舜典)」의 “이 해 이월에는 동쪽을 순행하시어 태산에 이르러 제사를 모시고, 차례로 산천을 제사지내고, 동쪽 제후들을 만나(歲二月,東巡守于岱宗,柴望秩于山川,肆覲東后)”에서 제(帝)인 순(舜)에 상대적 개념으로 쓰인 동후(東后)에서 후(后)의 쓰임새를 알 수 있다. 기자(箕子)를 조선의 후(后)라고 칭함은 주(周)의 제후와 비교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2) 수(受) : 상(商)의 마지막 왕인 주(紂)의 이름이다. 3) 제부(諸父) : 아버지의 여러 형제들이란 의미이다. 4) 하후씨(夏后氏)의 홍범구주 정리 : 하(夏)의 우왕(禹王)이 신구낙서(神龜洛書)를 응용하여 수토(水土)의 혼란을 평정하였는데, 기자가 이를 본받아 홍범구주를 완성한 상황을 말한다. 낙서(洛書)는 홍범구주와 팔괘(八卦)의 근원이 되었다고 전한다. 5) 후(侯) : 상(商)이 멸망하기 전에는 주(周)가 서방의 한 제후국이었다는 의미에서 무왕(武王)인 발(發)을 후(侯)라고 표현했다. 『춘추(春秋)』를 보면, 제(帝) 또는 천자(天子)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위계를 엄격히 따지면서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사(東史)」도 이러한 호칭을 엄격히 따지면서 서술되고 있다. 이종휘(李種徽)도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을 따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6) 발(發) : 상(商)을 멸망시킨 주(周)의 무왕(武王)이다. 7) 왕(王) : 위의 본기에서 주(周)의 무왕(武王)을 ‘후(侯) 발(發)’로 표현했다가 상(商)을 멸망시킨 이후에는 왕(王)으로 다르게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엄격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구분을 가능케 하는 저자 이종휘(李種徽)의 심리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8) 요수(遼水) : 이종휘(李種徽)는 그의 『수산집(修山集)』권(卷)14「동국여지잡기(東國輿地雜記)」의 ‘수경(水經)에서 요수(遼水)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동료하(東遼河)를 요수(遼水)로 인식하고, 그 일대를 기자가 처음 옮겨왔던 지역으로 설명하고 있다. 9) 홀한(忽汗) : 「동사세가(東史世家)」‘발해세가(渤海世家)’에서 언급되는 홀한주(忽汗州) 일대를 흐르는 현재의 목단강(牧丹江)을 홀한주(忽汗河)라고 했다. 이종휘(李種徽)는 그 일대를 홀한(忽汗)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0) 귀의(歸義) : 중화(中華) 중심주의에 따른 표현이다.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 귀화는 교화(敎化), 덕화(德化)에 귀복(歸服)한다는 의미로 주변의 세력이 중앙의 세력에 포함되는 것을 의미했다. 귀화와 비슷한 용어인 내복(來服)·내귀(來歸)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내재돼 있고 귀화·귀의(歸義)·귀조(歸朝) 등은 중화사상과 유교적 덕치사상(德治思想)이, 내투(來投)·투화(投化)·걸속(乞屬) 등은 무력적인 의미가 포함됐다. 11) 유술(儒術) : 유술(儒術)과 유학(儒學)은 구별된다. 유술(儒術)은 용(用)의 의미가 짙고, 유학(儒學)은 체(體)의 의미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술(儒術)이 먼저 행(行)해지다가 경학(經學)으로서의 유학(儒學)이 확립되었다. 전국시대 말에서 서한(西漢) 중기까지는 유술이 그리고 그 이후 시대에는 유학이 성행하였다. 기자가 동쪽의 조선으로 옮겨와서 이 지역의 백성들이 유술(儒術)을 돈독하게 하게 되었다는 위의 표현은 조선의 문명국임을 강조하려는 표현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전혀 사실(史實)과 맞지 않는 그릇된 인식이다. 중국 고대사에서도 유술(儒術)이 정치적 목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서한(西漢) 이후로 볼 수 있다. 12) 훙(薨) : 기자의 사망에 대해 제후의 죽음이란 격(格)에 맞추어 훙(薨)으로 표현했다. 13) 토산(兎山) : 토산(兎山)은 황해도 금천군(金川郡)과 신계군(新係郡)에 걸쳐 있었던 옛 지명이다.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14)『史記』卷38「宋微子世家」第8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15)『史記』卷30「平凖書」第8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16)『史記』卷6「秦始皇本紀」第6, 『史記』卷12「孝武本紀」第12, 『史記』卷25「律書」第3, 『史記』卷6「秦始皇本紀」第66『史記』卷6「秦始皇本紀」第6 및 『史記』卷38「宋微子世家」第8. 17)元菟郡 : 玄菟郡인데 ‘玄’ 자를 避諱하기 위해 ‘元’ 자로 표기했다. 언어 사용에서 왕명이나 중요 인물의 이름에 쓰였거나 당시까지도 쓰이고 있는 일정 글자의 사용을 피하는 규범으로서의 避諱는 儒學의 사회적 영향력 확대와 함께 제도화되었고 唐宋 시대부터 엄격하게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避諱 사례는 遼 시기에 興宗의 이름 耶律眞宗에 대한 避諱를 위해 族名인 女眞을 女直으로 바꾼 것을 들 수 있다. 18)顔師古가 인용한 武王이 箕子를 朝鮮에 봉했다는 기록은 『史記』卷38「宋微子世家」第8의 “武王乃封箕子於朝鮮”이다. 중국 고대의 문헌에서 箕子를 朝鮮에 봉했다는 인식은 伏勝(서기전 260∼서기전 161년)이 편찬한 『尚書大傳』卷2「周書」의 “武王釋箕子之囚箕子不忍周之釋走之朝鮮武王聞之因以朝鮮封之箕子既受周之封不得無臣禮”란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19)『漢書』의 “箕子去之朝鮮”과 “教其民以禮義田蠶織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란 기록은 朝鮮의 역사 및 문화 해석의 중요한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사료이다. 주의할 점은 우선 “教其民以禮義田蠶織作”과 “樂浪朝鮮民犯禁八條”로 분명히 나누어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箕子가 예의, 농업, 누에치기, 길쌈 등을 가르친 내용을 설명하고 그 뒤에 樂浪朝鮮 백성들이 지니고 있었던 독특한 규범인 ‘犯禁八條’를 설명한 것으로 나누어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後漢書』「東夷傳」에서는 『漢書』의 관련 기록을 변형시켜 “箕子教以禮義田蠶”“又制八條之教”로 기록하고 있다. 즉 『漢書』에서는 ‘犯禁八條’를 箕子가 제정했다고 직접 언급하지 않았는데, 『後漢書』는 예의와 양잠을 가르친 이외에 箕子가 또한 ‘八條之敎’도 제정했다고 변형시켜 기록한 것이다. 물론 箕子가 朝鮮에 갔다는 기록은 『漢書』 이전의 문헌에 있지만, 箕子가 朝鮮에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밭농사 및 양잠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漢書』 이전의 문헌에는 없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班固의 추론에 의한 것이다. 20) 顔師古의 주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기581년에서 645년까지 생존했던 안사고가 당시의 대부분 서적들을 토대로 주석을 달면서도 ‘범금팔조’의 전체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21)籩豆 : 고대의 식기로서 대나무로 만든 것을 籩이라 했고 나무로 만든 것을 豆라고 했다. 새로운 뜻이 파생되어 籩豆는 제사지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농사짓는 일반 백성들이 籩豆로 식사를 했다고 말한 것은 班固가 낙랑과 조선의 문화수준이 그만큼 높았음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22)海 : “設浮於海”란 원문을 위에서 “바다를 항해하여”라고 해석했는데, 실제로 바다를 항해하기보다는 “먼 곳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떠돈다”는 의미이다. 중국 고대에서 ‘海’ 자는 바다, 큰 물이나 강의 의미도 있지만 ‘먼 곳’이란 의미가 강했다. ‘변경’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어, 고대의 중국인들은 사방의 변경을 ‘四海’로 인식했고 外族으로 둘러싸인 그들의 통치범위를 ‘四海之內’로 표현하였다. 23)孔子 시기의 九夷 : 『論語』「子罕」에 나오는 “子欲居九夷”란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孔子(서기전 551년〜서기전 479년)는 春秋时期 鲁国 사람이다. 孔子가 살던 시기의 九夷는 지금의 중국 山東省 남부와 江蘇省 중부 이북 일대에 있었다. 서기전 473년 越王 句踐이 吳를 멸망시키고 “九夷를 兼倂하며” 제후 중의 覇主가 되었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説苑』卷1「君道」“越王勾踐與吳人戰大敗之兼有九夷”), 孔子가 인식하고 말한 九夷도 越王 句踐이 兼倂했던 九夷와 같은 일대에 있던 같은 유형의 九夷였을 것이다. 孔子가 말한 그 九夷를 朝鮮 및 箕子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관점은 班固(서기 32〜92년)의 『漢書』「地理志」에서 비롯되었는데, 물론 班固의 이러한 관점에 대한 문헌적 근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한국에도 孔子가 말한 九夷를 朝鮮 및 箕子와 연관시키는 관점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근거로 인용하는 문헌이 바로 『漢書』「地理志」와 이 「地理志」를 근거로 후대에 작성된 문헌들이다. 한국의 그런 관점은 近世朝鮮의 孔子와 箕子를 숭배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철저한 문헌고증을 거친 것은 아니다. 24) 由 : 仲由 즉 子路(서기전 542년∼서기전 480년)를 말한다. 季路라고도 불렸으며, 孔子 주변에 있던 인물로 魯의 정치가이며 武人이다. 孔子와 함께 14년 동안의 유랑생활을 했으며, 공자와 관련되어 많은 일화가 남겨진 인물이다. 25)顔師古가 인용한 『論語』의 원문은 「公冶長」第5의 “子曰道不行乘桴浮于海從我者其由與”이다. 26) 『三國史記』 卷14「高句麗本紀」2 大武神王 20年 “王襲樂浪滅之”. 27)『三國史記』 卷14「高句麗本紀」2 大武神王 27年 28)『三國史記』 卷14「高句麗本紀」2 大武神王 15年 29) 『後漢書』 卷85「東夷列傳」75 韓 및 句驪. 30)『三國史記』 卷14「高句麗本紀」2 閔中王. 31) 《說文解字》卷5「羊部」“夷俗仁仁者壽有君子不死之國孔子曰道不行欲之九夷乘桴浮於海有以也”. 32)『禮記集說』卷32 “謂之夷者風俗通云東方人好生萬物觝觸地而出夷者觝也”. 『後漢書』卷115「東夷傳」第75東夷에도 이런 구절을 인용하며 그 출처를 『風俗通』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風俗通』에 그런 구절은 존재하지 않는다. 四庫全書 子部 『風俗通義』卷6「角」에는 “謹按劉歆鐘律書角者觸也物觸地而出戴芒角也五行為木五常為仁五事為貌凡歸為民”이란 구절이 존재한다. 결국 范曄이 『風俗通』에서 인용했다는 『後漢書』卷115「東夷傳」第75東夷의 “夷者柢也言仁而好生萬物柢地而出”이란 기록과 또한 이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며 『風俗通』으로 출처를 밝힌 후대 문헌의 기록들은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漢書』「地理志」에서 九夷 및 東夷와 朝鮮에 관하여 班固가 범한 사료 인용과 해석의 오류가 『後漢書』「東夷傳」에서 이런 모양으로 확대되며 더 왜곡된 것이고, 그 이후의 중국 사학자들이 그 오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33)『朱子语类』卷36「論語」18 子罕篇上 “問九夷前軰或以箕子為證謂朝鮮之類是否曰此亦未見得古者中國亦有夷狄如魯有淮夷周有伊雒之戎是也”. 34)淮泗 : 淮泗 지역은 淮河의 하류 일대로서 중국 남방과 북방의 분수령이 되는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東夷의 지역으로 夏 시기에 淮泗 지역은 九夷에 속했으며, 商 시기에는 淮夷의 人方 부락에 속하였다. 西周 시기에는 淮夷 즉 九夷의 徐国과 郯国에 속했다. 春秋时期에 淮泗 지역은 淮夷의 徐国과 齐鲁의 郯国에 속했으며, 战国时期에 이 지역은 齐의 古郯国과 남방의 九夷에 속하였다.
35)『墨子閒詁』卷5「非攻中」“商蓋即商奄則九夷亦即淮夷… 若然九夷實在淮泗之閒北與齊魯接壤故論語子欲居九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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