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집 11권 동사본기의 단군본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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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19-11-14 10:4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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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강좌 자료] 2011년 7월 13일 임찬경 작성
『수산집(修山集)』卷之十一「동사본기(東史本紀)」의 단군본기(檀君本紀) 해석
조선의 왕을 단군(檀君)이라 하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신인(神人) 환인(桓因)이라고 한다. 환인에게 서자(庶子)가 있으니 환웅(桓雄)이다. 환웅은 태백산(太白山)에 살며 신웅(神熊)의 기이(奇異)로 박달나무 아래에서 군(君)을 낳았는데 단군(檀君)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은 단군의 이름을 왕검(王儉)이라고도 하였고, 성(姓)이 환씨(桓氏)라고도 하였다. 단군 시대에는 동하(東夏)1)에 군장(君長)이 없고, 백성들은 무지몽매(無知蒙昧)하였으며 금수(禽獸)와 더불어 무리지어 살았다. 단군이 비로소 백성들에게 편발개수(編髮盖首)2)를 가르치니 임금과 신하,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있게 되었고 음식과 거처에 절도(節度)가 있게 되었다. 그때 도당씨(陶唐氏)3)는 중국(中國)4)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또한 단군의 개국(開國)도 비롯되었으니 대략 무진년(戊辰年)5)으로 전한다. 9년의 홍수가 났을 때 팽오(彭吳)에게 명하여 높은 산과 큰 하천을 안정시켰으며,6) 우수(牛首)에 이르러 백성의 터전으로 삼았다. 단군은 대략 나이 수천 세에 죽었다. 아들인 부루(扶婁)가 물려받았는데 갑술년(甲戌年)에 도산(塗山)에서 하우씨(夏禹氏)에게 조회(朝會)하였다.7) 부루 이후에는 세계(世系)와 년보(年譜)가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단군은 죽지 않고 상(商)의 무정(武丁) 을미년(乙未年)에 아사달(阿斯達)의 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도 하였다. 혹은 주(周)가 세워졌을 때 기자(箕子)를 피하여 당장지경(唐莊之京)으로 갔는데, 나이가 천여 세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단군은 평양(平壤)의 언덕에 정착했다. 은(殷)과 주(周)의 사이에 후세의 자손들이 백악(白岳)으로 옮겼다. 단군은 일천오백팔년 동안 재위(在位)하였다. 기자(箕子)가 팔조(八條)의 가르침으로 대(代)를 이어 동하(東夏)를 다스리니 나라의 풍속이 바르게 되었다.
외사씨(外史氏)는 말한다. 대략 우하(虞夏)의 시대에 천하에 임금이 있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동방(東方)의 임금은 단씨(檀氏)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요(堯)와 같이 건국되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씨(徐氏)8)의 『통감(通鑑)』9)에서는 단지 신라와 고려 이후만 기재하고 『잡기(雜記)』10)에서야 단군을 언급했는데, 그 글이 바르지 못하고 경전(經典)에 맞지 않아 진신선생(縉紳先生)11)들이 그것을 언급하기 꺼렸다. 김부식(金富軾)이 전했던 천신(天神), 신시(神市), 천부삼인(天符三印), 단군년세(檀君年歲)를 유학자들은 대부분 믿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마니산(摩尼山)에 단군제천단(檀君祭天壇)이 있고 구월산(九月山)에는 삼성사(三聖祠)가 있으며 그 동쪽에 옛날의 소위 당장경(唐莊京)이란 것이 있어 때때로 아름다운 기운이 그 위에 있다고 들었는데, 총괄적으로 보면 사가(四佳)12)가 얘기한 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중국의 고사(古史)를 보니, 거기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란 이름이 드러나 있었다. 대략 단군은 처음 나온 성인이므로 중국에서의 복희(伏羲)나 신농(神農) 같은 임금일 것이다. 고기(古記)에서 글의 뜻이 매우 바른 것들을 골라서 취하여 본기(本紀)의 처음으로 삼았다.
[해설] : 고대 중국인의 독특한 문명관 혹은 세계관인 화이관(華夷觀)과 조선의 역사 서술의 한계
고대 중국인의 민족중심주의는 화이관(華夷觀)이란 독특한 세계관(世界觀) 혹은 문명관(文明觀)으로 존재하면서, 고대 중국인의 대내외적(對內外的)인 의식과 행동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중국(中國)’이라는 말 자체도 이러한 화이관(華夷觀)을 낳은 용어에서 출발하였다. 화이관(華夷觀)과 ‘중국’이란 용어의 성립에 대해 중국의 역사학자 갈조광(葛兆光)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대 중국의 ‘화이(華夷)’ 관념(觀念)은 늦어도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이미 형성되었다. 전국시대 아마도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상상(想像) 속에서 하나의 ‘천하(天下)’를 만들어냈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자기들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세계의 중심이며 또한 문명의 중심이라고 상상(想像)했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대지(大地)가 마치 하나의 바둑판처럼 생겼으며, 혹은 하나의 ‘회(回)’자(字)와도 같은 모양이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중심으로부터 사방의 변두리는 밖으로 끊임없이 확장되어 졌다. 중심은 왕이 있는 경성(京城)이고, 중심의 밖은 화하(華夏) 혹은 제하(諸夏)라고 했다. 제하(諸夏)의 밖은 이적(夷狄)이라고 인식했다. 대략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미 남이(南夷) 및 북적(北狄)과 서로 대응하는 ‘중국(中國)’이란 관념이 이미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고대 중국인의 ‘중국’이란 보통 문명에 관한 하나의 관념(觀念)이었으며, 명확한 국계(國界)를 지닌 정치지리(政治地理) 관념이 아니었다.13)
자연스러운 것이었겠지만, 이렇게 형성된 화이관(華夷觀)은 중국의 역사 서술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중국 고대의 사서(史書)나 사료(史料)들은 모두 위의 인용문에 언급한 바와 같은 화이관(華夷觀)이 형성된 시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그 때문에 중국 고대의 사서(史書)나 사료(史料)들의 대다수는 그 전제(前提)로서의 관점(觀點) 속에 화이관(華夷觀)이 철저히 내재화(內在化)되어 있기 마련이다. 즉 우리가 현재 중국사를 연구하기 위해 활용하는 사료 형태의 중국 측 고대사 관련 자료의 대부분은 화이관(華夷觀)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외국인들이 중국의 사서(史書)를 보면, 중국의 역사서술 속에서 주위의 다른 국가나 민족에 대한 중국 특유의 배타성(排他性)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것이다. 이는 바로 중국의 사가(史家)들이 지닐 수밖에 없는 화이관(華夷觀)이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 공자(孔子)의 춘추필법(春秋筆法)도 ‘천자(天子)’의 주(周)와 노(魯)를 중심에 세운 일종의 민족중심주의가 역사서술에 작용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사가(史家)들이 이러한 화이관(華夷觀)에 의해 역사를 서술하면서 중국 주변의 국가나 민족은 중국사 속에서 왜곡된 모습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중국보다 문명이 뒤떨어진 국가, 혹은 야만(野蠻)스런 미개인(未開人)의 국가로 기록되기도 했다. 고대사회에서 중국 주변의 거의 모든 국가는 중국에 조공(朝貢)하는 종속국(從屬國)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고대사회의 중국에 의해 주변의 국가는 어떻게 인식되었는지에 대해 갈조광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주위의 국가들이 ‘중국’에 비교하여 문명 등급이 낮다고 믿었고, 마땅히 ‘중국’에서 배우고 ‘중국’에게 조공(朝貢)을 바치며 또 배알(拜謁)해야 한다고 믿었다. 고대의 『직공도(職貢圖)』에 그려진 것은 각 변두리 민족의 대표가 중앙왕조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것인데, 항상 중국인의 황제는 특별히 크게 그렸고 외족(外族)의 사절(使節)은 매우 왜소(矮小)하게 그렸다. 그러나 어떤 연구자가 지적한 것처럼 고대의 문헌 속에 이러한 자아중심주의(自我中心主義)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중심(中心)’과 ‘변두리’의 영역 나뉨은 공간적으로 불완전하였으며, 또한 때때로 중심(中心)은 명확하였지만 ‘변두리’는 모호(模糊)하였다.14)
이러한 화이관(華夷觀)이 형성되고 또 중국사회에 보편적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이후 중국의 사가(史家)들은 중국의 역사를 더욱 더 오래된 것으로 설명하려 했고, 중국 문명의 우월성도 더욱 부각시키려 했으며, 중국이 더욱 더 오랜 시기부터 더욱 더 넓은 강역을 지니고 있었다고 설명하려 애썼다. 이는 화이관(華夷觀)의 대내외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화이관(華夷觀)으로 무장(武裝)한 고대 중국의 사가(史家)들이 이러한 시도를 끊임없이 해나감에 따라, 중국의 고대사는 시간적으로는 연이어 더욱 더 과거로 연장되어졌고 내용적으로는 기존의 역사체계의 앞 부분에 새로운 고대 왕조가 몇 차례 더 덧붙여지는 식으로 변화되어 갔는데, 고힐강은 이런 역사서술 현상에 대해 “중국의 고대사는 누층적(累層的)으로 조성(造成)된 것이며, 발생의 순서와 배열의 계통은 바로 완전하게 상반(相反)된다.”고 비판하였다.15) 또한 화이관(華夷觀)의 진전과 함께 고대의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지녀온 문명의 유구함과 우월성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더욱 더 많은 고대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내려 했다. 이로 인해 화이관(華夷觀)이 형성되어 본격적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전국시대 이후에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발생하였고 또 기존의 신화와 전설은 보충되거나 수정(修整)되어 졌으며, 황제신화(黃帝神話)는 신화를 넘어서서 황제가 인격을 부여받으며 실재적(實在的) 역사인물로 구체화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중국 상고(上古) 시대의 강역을 계속 확대시키면서. 전국시대의 사가(史家)들은 그 당시의 소위 전국칠웅(戰國七雄)이 확대한 영역만큼 혹은 그 이상의 넓은 지역을 이미 상주(商周) 이전 시기부터 소위 ‘중국’이 강역으로 갖고 있었다고 과장하려 했다. 이렇게 상고(上古) 시기 ‘중국’의 강역을 더욱 더 확대하여 역사기록처럼 남기려는 중국 사가(史家)들의 시도로써 완성된 결정판(決定版)이 바로 『서경(書經)』「하서(夏書)」‘우공(禹貢)’이다. ‘우공(禹貢)’에는 하(夏) 건립 이전의 우(禹)가 그들의 소위 ‘천하(天下)’를 구주(九州)로 확정하고 그 외곽(外廓)에 이(夷)와 융(戎)의 지역들을 설정해놓았으며, 또 이들 광대한 지역 전체를 통일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우공(禹貢)’에서 하(夏)의 정치 구역(區域)은 중앙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며 전복(甸服), 후복(侯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들 각 지역이 등급에 따라 공납(貢納) 등의 의무를 달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우공(禹貢)’에서 하(夏)의 정치력이 미치는 범위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유사(流沙)에 이르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위와 같이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전국시대 무렵의 중국 사가(史家)들이 상상(想像)으로 그려낸 ‘우공(禹貢)’에는 구주(九州)로 구성된 그야말로 완벽한 하나의 ‘천하(天下)’를 설정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공(禹貢)’이 읽혀지던 시기 이후의 고대 중국 사가(史家)들은 ‘우공(禹貢)’을 인용하면서, 하(夏) 이전 시기에 우(禹)에 의해 확립된 구주(九州)의 ‘천하(天下)’를 토대로 그 이후의 상(商) 및 주(周)가 발전하였고, 또한 춘추전국시대와 진한(秦漢) 등을 거쳤으며, 그 이후에도 오래도록 이 ‘우공(禹貢)’에 기록된 바와 같은 ‘중국’을 현재까지의 중국이 유구(悠久)한 역사로서 전승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심지어 현대의 중국 사학자들조차 아직도 ‘우공(禹貢)’의 기록을 근거로 하(夏)의 강역(疆域)과 역사를 서술하고 또 그에 맞추어 상(商)과 주(周) 및 그 이후의 강역과 역사를 서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과연 ‘우공(禹貢)’에 나오는 구주(九州)의 ‘천하(天下)’가 사실(事實)로서 실재(實在)했는가? 하(夏) 이전 시기의 우(禹)에 의해 확립된 구주(九州)의 ‘천하(天下)’를 토대로 그 이후의 상(商) 및 주(周)가 발전하였고, 또한 춘추전국시대와 진한(秦漢) 등을 거쳤고 또 그 이후 오래도록 이 ‘우공(禹貢)’에 기록된 바와 같은 ‘중국’을 유구(悠久)한 역사로서 전승하고 있다는 중국의 역사서술이 사실(史實)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중국 사학계에는 ‘우공(禹貢)’의 작성 시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굴만리(屈萬里)는 그의 저서에서 ‘우공(禹貢)’에서 양주(梁州)의 지리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이러한 묘사는 진(秦)의 목공(穆公)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으로 보았다. 또 ‘우공(禹貢)’은 양주(梁州)에서 철(鐵)을 바쳤다고 서술했는데, 이런 서술로 미루어 ‘우공(禹貢)’은 철기(鐵器)의 사용이 대량으로 이루어진 이후에야 작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굴만리(屈萬里)는 ‘우공(禹貢)’이 춘추시대 말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6) 위취현(衛聚賢)은 ‘우공(禹貢)’에 묘사된 여러 상황으로 미루어 그 기록은 전국시대 말기에 진(秦)의 누군가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17) 고힐강(顧頡剛)은 1923년에 호적(胡適) 등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공(禹貢)’을 전국시대에서 진한(秦漢) 사이에 작성된 위작(僞作)으로 보고 있다.18) 중국의 저명한 지질학자이며 역사학자인 정문강(丁文江 : 1887〜1936)도 1924년에 고힐강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禹)가 치수(治水)를 했다는 말은 절대로 믿을 수 없으며, 실제로 장강(長江)이나 황하(黃河) 모두에서 인공적으로 물길을 이끌어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정문강은 ‘우공(禹貢)’에서 철(鐵)을 바쳤다는 기록을 한 것에 의해서도 ‘우공(禹貢)’은 전국시대에 작성되었음을 의심할 바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19) 위에서 여러 중국학자들이 지적해낸 것처럼 사실 ‘우공(禹貢)’은 고대의 중국인들이 대략 전국시대까지의 정치경험을 토대로 상상(想像)해낸, 즉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상(想像) 속의 ‘천하(天下)’일 뿐 하(夏) 이전 시기의 사실(史實)을 반영한 서술은 결코 아니다. 필자도 여러 사료를 검토한 결과 ‘우공(禹貢)’의 작성 연대가 전국시대 말기에서 서한(西漢) 중기에 이르는 어느 시점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고대의 중국인들은 ‘우공(禹貢)’을 사실(史實)처럼 믿고 싶어했고, 고대 중국의 사가(史家)들도 ‘우공(禹貢)’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역사서술을 답습(踏襲)하게 되었다. 우리가 현재 검토하려 하는 조선의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의 사가(史家)들 또한 중국의 사가(史家)들 못지 않게 ‘우공(禹貢)’에 대한 비판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우공(禹貢)’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동사(東史)를 서술하고 있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사가(史家)들이 아무리 주체적인 서술을 하려고 해도, 결국에는 화이관(華夷觀)에 갇힌 서술을 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한국 상고사 서술의 어려움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原文] 檀君本紀 朝鮮王檀君者。祖曰神人桓因。桓因有庶子。曰桓雄。桓雄居太白之山。有神熊之異。而生君於檀樹下。號檀君。或曰。檀君名曰王儉。或曰。姓桓氏。檀君之時。東夏無君長。百姓蚩蒙。禽獸與羣。於是檀君乃敎民編髮盖首。始有君臣男女之分。飮食居處之節。時陶唐氏立於中國。而始檀君開國。盖在戊辰歲云。當九年之水。命彭吳。定高山大川。至于牛首。奠厥民居。檀君盖年數十百歲。終。子扶婁立。以甲戌之歲。朝夏禹氏於塗山。扶婁之後。世系年譜逸而不傳。或曰。檀君不死。以商武丁乙未。入阿斯達山爲神。或曰。至周。避箕子於唐莊之京。年千有餘歲云。檀君居平壤之邱。而當殷,周之際。後世子孫。徙於白岳。檀君立千五百八年。箕子以八條之敎。代莅東夏。方俗用正。
外史氏曰。盖虞夏之際。天下之有君久矣。然東方之君始於檀氏。幷堯而立。此其故何也。徐氏通鑑。獨載羅麗以下。而雜記言檀君。其文頗不經。縉紳先生難言之。金富軾所傳天神,神市,天符三印,檀君年歲。儒者多不信。余嘗聞摩尼山有檀君祭天壇。九月山有三聖祠。其東有古所謂唐莊京者。往往有佳氣其上云。總之不離。四佳所論者近是。余觀中國古史。其表見檀君王儉之名章矣。盖檀君首出聖人。在中國。其伏羲,神農之君乎。竊取古記文意頗雅者。爲本紀書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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