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 강좌(4)-삼일신고에서의 참(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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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19-11-14 10:40: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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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에서의 참
머리말
삼일신고의 다섯 번째 장 이후는 사람과 만물에 대한 내용이다. 다섯 번째 장은 그 중에서도 먼저 알아야 될 것으로 하느님이 만물에게 내린 참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친다. 참과 가달과 길은 사람이 풀어야 될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이어서 인류가 발생된 이후로 수많은 학자와 성현들이 이에 대해 논하고 있고 현대에는 뇌과학 등이 발달하여 분석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참과 가달, 길과 18 지경 모두 필요한 것이고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보거나 듣거나 말하는 것 등 어느 하나라도 장애가 생기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큰 불편을 느낀다. 그리고 숨쉼(息)을 못하면 몇 분 이내에 죽는다. 이렇게 중요한데도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성품이나 마음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인생의 묘미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삼일신고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니 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제 5 장 참
가. 구성 참 장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받는 세 참은 성품과 명과 정기이다. 사람은 그것을 옹글게 받고 다른 만물은 치우쳐 받는다. 참 성품은 착함과 악함이 없으며 위밝은이가 통한다. 참 명은 맑음과 흐림이 없으며 가운데밝은이가 안다. 참 정기는 후함과 박함이 없으며 아래밝은이가 보전한다. 참으로 돌이켜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人物同受三眞 曰 性命精 人全之 物偏之 眞性 無善惡 上哲通 眞命 無淸濁 中哲知 眞精 無厚薄 下哲保 返眞一神 인물동수삼진 왈 성명정 인전지 물편지 진성 무선악 상철통 진명 무청탁 중철지 진정 무후박 하철보 반진일신)
이 장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사람과 만물이 세 참을 받음에 대한 내용이고 뒷부분은 세 참에 돌이키라는 내용이다. 앞 장들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 장의 형식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렇지만 내용은 성품과 명과 정기의 셋에 대한 말씀이므로 삼일이 중시됨은 마찬가지다. 계속되는 장들도 모두 두 부분으로 나뉘지만 내용은 다 셋으로 하나 되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참전계경의 보답과 응답 장들의 6 개 절들도 2 부분으로 나뉘지만 각 부분들의 내용은 상중하의 셋으로 나뉜다.
나. 주석 사람과 만물이 같이(同) 동질의 세 참을 받으므로 사람과 다른 만물이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고 동료와 같이 비슷한 종류이며 사람은 다른 만물들도 사람만큼 존중해야 된다. 편(偏)은 ‘치우치다’, ‘한쪽’, ‘반쪽’ 등의 의미이어서 여기서는 전부가 아닌 일부라는 뜻으로 쓰인다. 사람은 온전하게 다 받고 다른 만물은 일부만 받으니 그 양을 적게 받는다. 각 사람이나 동식물들이 다른 성품을 받으므로 성품의 본질은 착하여 같지마는 그 모양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뒤에 참으로 돌이켜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고 했으므로 세 참은 자연이나 다른 존재로부터가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받는다. 참전계경에도 제 5 사 도화(導化)에 성품과 몸을 하늘이 주었음을 말하고 제 131 사 고부에 이치와 기운을 하느님이 사람에게 부여했다고 말한다. 만물이 세 참을 받았으니(受) 의당 하느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한 공경해야 한다. 앞 장들에서도 하느님을 공경해야 됨을 공부하였다. 우리가 사람에게서도 무엇을 받으면 감사하듯이 하물며 우리의 생명이 있게 하는 세 참을 받았으니 하느님에게 감사함은 지당하다. 사람과 만물은 세 참을 받았으므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참 성품은 착함과 악함이 없다’ 함은 참 성품이 선악에 중립이 아니라 순수하게 착하므로 비교대상이 없고 선악의 구별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참전계경의 제 132 사 양천성(養天性)도 ‘하늘성품은 원래 착하지 않음이 없으나’ 와 같이 하늘이 사람에게 준 성품은 원래 착함을 가르친다. 참 명과 참 정기도 마찬가지로 각각 순수하게 맑고 순수하게 후하다. ‘없음(無)’이 하느님의 무한성을 나타낸다는 것은 앞 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유한한 사람이 만든 물건이나 사람이 하는 일은 완벽한 것이 없으나 하느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져서 하느님이 준 세 참은 완전하게 순수하다. 성품(性)에 참(眞)을 붙인 것은 사람의 성질이나 성격 등이 아니라 하느님이 준 사람의 본래의 참 성품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명과 정기에도 참 자를 붙였다. 성품에 통하는 만큼 덕이 커지고 명을 아는 만큼 지혜가 밝으며 정기를 보전하는 만큼 힘이 세다. 하느님은 무한하게 통하고 알고 보전하기 때문에 한덕과 한지혜와 한힘을 가지신다. ‘참으로 돌이켜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함은 밝은이들이 참으로 돌이켜 하느님과 하나가 됨을 말한다. 참전계경에서는 돌이킴을 돌아볼 고(顧)를 사용하였다. 제 131 사 고부(顧賦)를 보면 ‘고부란 부여된 바를 돌아보는 것이다. 한울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은 이치이고 기운이다.’ 라고 했다. 여기서 기운은 사라지지는 않고 흩어졌다 모였다만 하므로 그 명은 무한하다고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이치와 기운이 각 사물이 나누어 가지면 그 사물의 성품과 명과 정기로 표현된다.
다. 성품 참 성품이란 사람이 사람 되게 하는 또 만물이 만물되게 하는 참된 정체성이다. 즉 사람이나 만물이나 성품을 가짐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갖는다. 참 성품은 마음이 판단할 때 마음에게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 주므로 마음을 인도하는 빛이고 마음이 사물을 판단할 때 기준이 된다. 위급한 사람을 보면 성품은 당장 구하라고 마음에 알리며 불쌍한 사람을 보면 성품은 그를 도와주라고 마음에게 알린다. 이러한 성품이 하느님이 사람에게 내려준 참 성품이다. 참전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참 성품은 착하여 스스로에게 정성을 들이고 남에게 신의가 있고 남을 사랑하며 남을 돕는다. 이렇게 간단한 경우에는 잘 알 수 있는 것이 성품이지만 우리가 일생을 공부해도 다 알 수 없는 것이 또한 성품이다. 사람이 성품을 가짐으로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으니 사람이나 동물이 가지면 성품이고 사물이나 물질에서는 이치로 볼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 공부는 이러한 사람이나 사물이나 물질 등의 이치를 배우는 공부로써 그 양은 일생 배워도 다 못 배우며 인류는 지금도 알 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고 할 정도이다. 뒤에 나오는 우리의 몸이나 뇌가 매우 복잡하듯이 이 성품이나, 명, 정기, 마음, 기운 등도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질세계에서 보면 물질의 성(性), 즉 성품은 물리인데 지금까지의 어떠한 사람도 물리를 다 알아낸 사람이 없고 지금도 모든 과학자들이 밤낮 없이 구명해내려고 연구 중에 있다. 사람의 성품은 이렇게 복잡한 물리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알아내니 성품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비우고 내적으로 성품을 깨우치는 수행의 길도 끝이 없다. 사람은 이 성품을 통하기 전에는 잘 모르는 것이지만 꼭 알아야 되고 알고 싶은 것이며 이것을 알면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우주를 아는 것이 된다. 성품은 사물과 물질에서는 그러한 바인 소이연(所以然) 즉 이치가 되고 마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야 되는 바인 도덕적 소당연(所當然)이 된다. 성품에 통하면 신통한 능력을 얻을 수도 있지만 일상생활은 범상하다. 일상의 일은 모두 사람의 성품과 마음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고 다만 마음은 자유롭다. 그래서 다른 종교들도 ‘범사에 감사하라’ 나 ‘평상심이 도이다’ 라든가 ‘문을 여니 소나무는 푸르고 구름은 흐른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고 한다. 하늘이 계시를 통하여 명을 내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성품을 공부하는 것은 아니고 명으로 세상일을 이룰 때 하는 것이다. 성품(性)은 마음을 나타내는 심(小)과 태어남의 生이 결합되어진 글자로 태어나면서 가지는 마음의 뜻이 있으며 지금은 성품의 뜻으로 사용된다. 중국에서는 성품이란 말을 본능적 욕구나 타고난 성품 등으로 사용하다가 맹자가 처음으로 하늘이 준 성품의 뜻으로 사용했다. 맹자의 진심장구상 편에 ‘마음을 다한 사람은 성품을 알고 성품을 안 즉 하늘을 안다.’ 라고 하였고 인의예지 성품의 실마리인 측은지심(惻隱之心) 등의 사단(四端)에 대해 설명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성선설이라 부른다. 송대에는 그전부터 중국에 수입된 불교가 인간의 내면에 대한 구조와 본질을 말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유교와 도교도 성품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게 되며 유불도의 합일 경향이 나타난다. 유교에서는 성리학이 발달하여 성품이나 마음, 감정 등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주자가 중용 제 1장의 주석에서 ‘하늘이 사람과 만물에 부여하는 것이 명이며 사람과 만물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성품이다’ 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말은 나중에 성품이 명이고 명이 성품이 되는 식으로 성품과 명을 비슷하게 보는 견해로 된다. 도교는 주로 도를 닦고 명을 알기 위한 수련을 중심으로 하다가 성품도 닦는 성명쌍수(性命雙修)를 하게 된다.
라. 명 명(命)에는 목숨, 명령, 운명 등의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여기서는 하늘이 내린 명 즉 천명이므로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는 수명이나 운명, 소명 등의 뜻을 가진다. 명은 시간적인 것으로 사람이 살아갈 때 일정 기간 맡아서 해야 될 일을 하늘이 주는 명령이다. 명은 시간상에서 자기가 차지할 분수이기도 하므로 계산이 되며 세상이 유지되도록 질서를 주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는 명 중에서 가장 큰 일이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는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며 죽을 때도 대부분 언제 죽을지 알지도 못하면서 죽는 것은 하늘의 명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연령별로 주어진 일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된 태아는 뱃속에서 어머니로부터 오는 영양을 섭취하면서 점차 자라는 것이 그의 명이다. 태아가 아무리 뛰어난 자질이 있고 태몽이 좋아 후에 큰일을 할 사람이라도 뱃속 시절에 그 외의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요즈음은 태교를 하니 그 공부나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다. 태어난 후에는 어렸을 때 배우고 커서 일하다가 나이 들면 점차 활동은 축소된다.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나이에 따라 나이에 맞게 행동하는 제한이 있으니 그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명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때가 있고 공부도 때가 있다고 한다. 직장에 취직하거나 일을 배움에도 때가 있어서 나이가 들면 남의 밑에 들어가 일을 배우기도 쉽지가 않다. 직업에도 명이 있어서 어떤 이는 공무원이 되고 어떤 이는 상인이 되고 어떤 이는 다른 뭐가 되고 한다. 각 사람마다 다른 일을 해야 이 세상이 유지가 되는 것이니 각 사람의 명은 다르다. 이렇게 성품이나 정기가 비슷하다고 해도 명이 다르면 하는 일이 달라진다.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각각 그 명이 달라 가는 길이 다른 것이다. 이 명은 자기 뜻에 맞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어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태어날 때 일생의 명이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일부 사람들의 태몽은 간략하지만 그 사람이 태어나 일생 동안 어떠한 일을 하며 어떻게 살지를 알려준다. 예언을 잘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일생을 예언하면 그 사람이 그 예언대로 사는 경우도 있다. 명이 어떤 식으로 나에게 오든 사람은 자기의 명을 알아서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해야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명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지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정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해야 자기의 명을 안다고 할 수 있다. 그 일을 하면서 착하게 행하거나 악하게 행함은 각자의 마음과 의지에 달려있고 그 행실은 다음 명을 받을 때 영향을 줄 것이다. 경은 각 사람의 명이 순수하게 맑다고 말하므로 사람이 명대로 하는 일은 신성한 것이며 사람의 영혼은 그 수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은 순수하게 맑기 때문에 기운이 명대로 하면 기운도 맑아져 그 기운의 수명도 길어진다.
마 정기 정(精)은 엄밀하게 말하면 정기와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만 대종교에서는 정기로 번역하고 있다. 정이라고만 하면 이 뜻 외에 情, 正 등과 같이 여러 가지 뜻이 있어 사람들이 혼동하기 때문인 것 같다. ‘산천의 정기를 타고나’ 에서나 ‘사람의 정기는 눈에 모여 있다.’ 등에서 쓰이는 정기에는 기(氣)의 의미를 더 많이 포함한다. ‘생식에 의해 받은 정(精)은 선천적 정이고 음식으로부터 얻는 정은 후천적 정이다.’, ‘신장은 정을 갈무린다. 신장의 정은 인체를 성장 발육생성시키고 기타 장부의 정상적인 생리활동을 유지시키는 활력의 기초이다.’, ‘정을 소모하면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뼛속 정수에 정이 들어있다.’ 등에서의 정(精)은 사람의 신체가 존재할 수 있게 활력을 주는 고형적인 그 무엇이다. 도가의 정기신(精氣神) 수행법에서의 정은 생식의 정(精)이다. 삼일신고와 비슷하게 정을 말하는 문헌은 여러 가지가 있는듯한데 몇 가지 예문은 다음과 같다. 『관자』(管子) 내업(內業) 편에 ‘모든 사물의 정(精), 이것이 생명을 이룬다.’, ‘무릇 사람은 생명이다. 하늘로부터 그 정이 나왔고 땅으로부터 그 몸 즉 형체가 나왔으며 이것들이 합쳐짐으로써 사람으로 된다.’ 는 말이 있다. 이는 몸에 정이 있어야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다는 말이다. 『성명규지』(性命窺知) 총론 중에는 ‘몸 가운데의 정은 죽은 듯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다. 강건하고 치우침이 없이 바르며 순수한 정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보존되면 바로 성품이 깃들이는 곳이요 명의 뿌리로 되는 것이다. 정기는 만물이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며 활동하는 데에 필요한 참된 몸이다. 영혼이 불멸하므로 정기는 영체(靈體)나 유체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활동에 제한이 있고 일을 못하게 되므로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천하게 된다. 아무리 큰일을 맡을 능력이 있어도 내 몸이 아프면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몸은 참 정기에 의지하여 후하면 귀하고 박하면 천해진다. 경은 사람의 참 정기는 순수하게 후하다고 말하므로 사람은 원래 모두 귀하다.
바. 성품과 명과 정기의 삼일 세 참인 성품과 명과 정기는 붙어 있어서 하나라도 빠지면 나머지는 존재하지 않는 셋으로 하나 되는 삼일이다. 소도경전본훈의 ‘하나를 잡아서 셋을 품고 셋이 모여 하나됨 (執一含三 會三歸一)’과 같이 성품과 명과 정기는 삼일이 되어 떨어질 수 없다. 만물은 각기의 성품을 지니고 시공간에서 존재하므로 개체는 그것의 정체성이 되는 성품과 시간상에서 차지하는 명과 공간상에서 차지하는 정기가 다 갖춰져야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건물에서도 세 요소를 볼 수 있다. 건물에는 그 용도가 있고 건물이 존재하는 기간이 있으며 차지하는 장소와 크기가 있어서 용도인 건물의 성품과 시간적인 건물의 명과 공간적인 건물의 장소와 크기 등의 세 요소를 볼 수가 있다.
사. 보전과 앎과 통함 보(保)는 ‘보전하다’나 ‘유지하다’의 뜻으로 물질이나 몸을 보전하거나 재물이나 무력, 정력, 힘 등을 보전 유지한다와 같이 쓰인다. 사람이 무엇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통하지는 못하면서도 그 상태를 보전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몸의 오장육부나 신체의 각 기관에 대해 잘 몰라도 건강을 유지할 수는 있다. 지(知)는 안다는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여 지식을 쌓을 수 있다. 철학자가 삶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따지고 분석하여 체계를 이룰 수 있다. 과학자나 다른 학자들도 연구를 열심히 하여 새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도 있다. 수행하는 사람이 경전을 열심히 외우고 공부해서 경전에 대해 박식할 수는 있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 뜻을 체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앎에 대해 공부한 것이다. 그래서 지식과 학문적 성과를 얻거나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을 때의 일시적인 기쁨은 누릴 수 있지만 마음의 평화를 체득한 것도 아니고 다섯 고통의 근심걱정에서 해방될 수도 없다. 통(通)함은 통달하다는 뜻도 있고 하나로 툭 터짐과 같고 그냥 아는 것과는 달리 뭔가를 깨고 나와 통한다는 뜻도 있다. 경의 뒤에서 성품에 통하고 공적을 마침은 한 뜻으로 되게 수행한다 했으므로 통함은 수행해서 얻어진다. 빠르게 성통하는 수행은 사량 분별로 하지 않는다. 빠른 성통 공부는 마음의 작용을 멈추고 즉 마음에 한 생각도 없이 비우고 성품을 보도록 전념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처럼 이치를 배우고 일상생활에서 착한 생활을 하는 것은 서서히 수행해가는 길이다. 일생을 착한 일을 하고 덕을 쌓으며 하늘집의 계단과 문을 통과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과 몸이 변하여 성품에 조금씩 통하게 된다. 깨달음은 한 순간에 올 수도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진적으로 올 수도 있다. 야생마를 길들일 때 조련사가 말의 특성에 따라서 어떤 말은 무작정 올라타서 말이 날뛰어도 길들여질 때까지 제어하여 마침내 길들이는 경우도 있고 어떤 말은 우리에 가두어 먹이를 주면서 서서히 길들이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다. 빠른 공부를 하여 성품에 통한 사람은 마음 비움을 알기 때문에 하는 일이 저절로 착하다. 성품에 통하지 못하였지만 착함을 행하고 덕을 쌓아나가는 것은 비록 그 착함을 행함에 노력은 들지만 서서히 나아져서 나중에는 힘들이지 않고 착함을 행한다.
아. 세 밝은이 수행의 방법에는 지감법, 조식법, 금촉법 등과 같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래밝은이가 하는 수행 방법이 따로 있고 가운데 밝은이가 하는 수행이 따로 있고 위밝은이가 하는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수행해서 정기를 보전하여 차력사처럼 힘을 기를 수도 있고 기운 수련을 해서 신선처럼 수명을 늘릴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수행의 부수적인 성과이다. 성명정은 셋이 삼일이기 때문에 한쪽을 위주로 하는 수행을 해도 전적으로 한쪽만 수행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정기를 보전하는 수행을 하기 위해 경전을 소리 내어 외우는 금촉법을 한다 해도 그 경전의 뜻을 전혀 모르고 외우지는 않는다. 또한 금촉법을 하면서 마음을 비우게 되니 지감도 행하고 독경의 운율이 있어서 조식도 자연 조금이라도 행하게 된다.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참에 돌이켜 성품에 통하는 것이다. 경전의 교화신 장에 하늘집에 이르는 것은 성품대로 착함을 행하여 착함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라 함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품은 경 전체에 걸쳐 골고루 5 번이나 나와 강조되고 있으며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는 수명을 늘리지 않아도 되고 힘을 기르지 않아도 되며 우선 성품에 통해야 되고 그 다음 명대로 공적을 완수해야 한다. 보전과 앎과 통함은 위, 가운데, 아래의 수행의 세 단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참에 돌이키는 수행을 시작하여 어느 정도 진행되면 자기의 몸을 함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정기가 보전된다. 이 단계의 수행자는 성품에 통하지도 않았고 자기의 명을 몰라서 자기가 하늘로부터 받은 일은 모르며 오로지 참에 돌이키며 정기를 보전하는 사람이므로 아래밝은이라 한다. 수행이 더 진행되어 아직 성품에는 통하지 못했더라도 정기를 보전하고 자기의 명을 알아 정성스럽게 수행하고 일하는 사람은 가운데밝은이이다. 수행에 더욱 정진하여 정기를 보전하고 명을 알고 성품에 통하면 위밝은이의 단계에 오른다. 성품에 통하면 마음을 비우고 마음에 원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아무 할 일이 없다. 나에게 주어지는 명이 무엇이든 그것을 알고 그에 순응해서 수행할 따름이고 몸을 함부로 쓰지 않기 때문에 정기를 보전한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든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마음이 비워 있다. 성품에 통하고 공적을 완수한다는 성통공완(性通功完)에서 공적 완수는 자기에게 주어진 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성품에 통한 이는 이미 정기를 보전하고 자기의 명을 알기 때문에 성통공완은 성품에 통한 밝은이가 보전된 정기를 가진 몸으로 자기에게 내린 하느님의 명을 알아 맡은 일을 충실히 완수함이다. 참에 돌이켜 수행함은 보전과 앎과 통함을 고루 갖추게 되므로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마음과 영혼, 건강한 기운을 저절로 지니게 된다.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 육체를 학대하거나 망치는 일이 없다. 참전계경 제 131 사 고부에도 ‘아래밝은이는 부여된 바를 돌아보고 가운데밝은이는 부여된 바를 거느리며 위밝은이는 부여된 바를 부린다.’ 라 하여 밝은이의 단계를 셋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부여된 바는 이치와 기운 또는 세 참이다. 아래밝은이는 참을 돌아보아 보전하는 정도이고 가운데밝은이는 참을 알므로 참을 거느리고 위밝은이는 참에 통하니 참을 부릴 수가 있다. 이치와 기운은 사람의 안과 밖에 모두 있으므로 안에 있을 때는 참에 통하는 것이고 안팎에 있는 이치는 부릴 수가 있는 것이다. 경은 밝은이의 단계를 상중하 세 단계로 대강만 분류해 놓았다. 그렇지만 사람마다의 참에로의 돌이킴에는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다. 또한 같은 통함이라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통하여 통한 사람들을 모아 놓아 서로 비교해보면 그 우열과 성격은 각기 다르다. 깨우침에도 단계가 있음은 도교의 도계와 불교의 개달음에 초견성부터 시작함에도 보인다. 사람으로서 완전하게 통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성품에 통했다 해도 하늘집의 계만선 문만덕의 어느 단계에 머무르는 것이니 통한 사람도 불교에서 보임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공적을 쌓아야 한다.
자. 생명과 물질 물리에서는 자유도 즉 무질서도인 엔트로피가 높은 쪽으로 물질 상태가 변한다. 비평형상태는 엔트로피가 높은 쪽으로 상태가 변하여 그 계에서 최대가 될 때 멈춰서 평형상태가 된다. 주위보다 온도가 높은 동전이 에너지는 높지만 스스로 움직여 높이 뛰어 오를 수도 없는 것도 동전을 구성하는 분자들이 그 자유를 희생하고 일시에 한쪽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이어에서 바람이 한 번 빠지면 다시는 저절로 타이어에 공기가 채워져 부풀어 오르지 못한다. 이것은 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결코 모여서 타이어 안으로 들어가 구속되어 밀집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타이어에 바람을 다시 넣어 엔트로피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 들어가는 원리를 파악하여 기계를 만들고 에너지를 사용하는 일을 해야 한다. 즉 엔트로피 즉 무질서를 줄여 질서를 되찾기 위해서는 이치 즉 물리가 파악되어야 하고 또한 에너지가 소모되어야 한다. 이렇게 이치를 파악하는 존재가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정신이다. 경전은 가장 큰 정신인 하느님이 만물을 만드니 그 물질의 원리는 바로 하느님의 성품대로 창조하신 것이다. 정신을 가지는 생물은 하느님이 주신 성품에 의거해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고 무질서한 물질세계에서 질서를 찾아간다.
무신론자들은 생명체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명체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몸 밖에서 태양열을 받거나 양식을 먹고 에너지를 받아 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고 하여 생명체의 활동도 엔트로피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영혼불멸과 고도의 정신적 현상은 설명하지 못한다. 생명체에 정신이 없다면 생명체는 그저 고깃덩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게 바로 무질서로 돌아가는 엔트로피 증가의 물질세계 법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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