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 강좌(2)- 하늘조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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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19-11-14 10:3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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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에서의 하늘과 삼일신의 조화 머리말 삼일신고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장은 하늘과 삼일신의 조화 작용에 대한 내용이다. 하늘에 대한 삼일신고의 묘사는 세상의 그 어떤 설명보다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여 아무 흠이 없다. 바로 이어지는 삼일신의 조화에 대한 모습은 동아시아의 주요 종교들에서 주장하는 신의 모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니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제 1 장 하늘 가. 구성 하늘 장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황제가 이르되 수상 팽우여! 저 푸른 것이 하늘 아니며 저 까마득한 것이 하늘 아니다. 하늘은 허울도 바탕도 없고 처음도 끝도 없으며, 위아래 사방도 없고 겉도 속도 다 비어서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무엇이나 싸지 않은 것이 없다. (帝曰 元輔彭虞 蒼蒼非天 玄玄非天 天 無形質 無端倪 無上下四方 虛虛空空 無不在 無不容 제왈 원보팽우 창창비천 현현비천 천 무형질 무단예 무상하사방 허허공공 무부재 무불용) 이 장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황제가 이르되 수상 팽우여!’ 의 첫 부분은 황제가 팽우를 불러 삼일신과 만물에 대해 가르치고자 시작하는 부분이다. 황제가 말하는 이 부분이 삼일신고의 이름에 고(誥)가 들어간 연유이다. ‘파란 것도 하늘이 아니며 아득한 것도 하늘이 아니다’ 의 두 번째 부분은 사람들이 육안으로 보는 보통의 하늘은 형상 있는 하늘 (有形之天유형지천) 일 뿐 하늘의 실체는 아니라는 뜻이며 앞으로 본론을 이야기하겠다는 서두이다. 세 번째 부분은 형상도 없고 끝도 없고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느님의 본체인 하늘의 본 모습을 설한다. 나. 주석 원보(元輔)는 고구려 시대의 수상에 해당하는 관직의 이름이었고 팽우(彭虞)는 단군 시대에 땅을 개척한 사람의 이름이다. 현(玄)은 검을 현도 되지만 오묘할 현도 된다. 도가에서는 노자나 다른 도교 경전에 많이 쓰이며 최치원의 난랑비문에도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다는 구절이 있다. 우리가 보기에 하늘은 낮에 볼 때는 푸르고 까마득하지만 밤에 볼 때는 검고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이는 햇빛과 공기에 의해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하늘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허울과 바탕(形質)이 없다 함은 하늘에는 물질들이 가지는 성질이나 성품이 없다는 말이다. 단예(端倪)는 첫 끝과 맞 끝의 공간적인 한계도 되고 장자의 대종사 장에 보면 일의 시작과 종말이란 뜻으로 쓰여 시간의 한계도 된다. 그러므로 처음도 끝도 없다 함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한하다는 말이다. 위아래 사방도 없다함은 하늘이 3차원으로 구별 없이 대칭적으로 펼쳐져 있음을 말한다. 허(虛)는 큰 언덕에 올라가 툭 터진 곳을 보는 모양으로 밖으로 빈 모양이며 공(空)은 공구로 뚫어 놓은 구멍의 빈 곳이라서 공극(空隙) 등과 같이 안으로 빈 모양이다. 그래서 대종교에서는 겉도 속도 다 빈 하늘의 모습을 체허천 이공천(體虛天 理空天) 이라 하여 허울은 밖으로 비어 무엇이든지 싸고 이치적으로는 안으로 비어 무엇에든지 없는 곳이 없다고 해석하였다. 그렇지만 하늘의 허울은 현대과학에서는 시공간으로 그 크기가 무한하게 크고 나뉘기는 무한하게 작게도 나뉘어 그 허울 자체가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무엇이나 싸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과학의 이치도 마찬가지로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 모두 일관된 논리로 설명한다. 허울과 바탕, 단예와 상하사방은 뒤에 하느님이 만물에게 준 세 참인 성품과 수명과 정기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허울과 바탕이 없음은 하늘의 성품 즉 특성을 말함이고 단예가 없음은 그 수명이 무한하다는 말이다. 허울과 단예와 상하사방이 없다 함은 하늘이 공간적으로 무한하게 펼쳐져 있음이므로 그 정기가 없다고 하면 없을 것이고 무한히 충만 되었다고 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일신고와 마찬가지로 소도경전본훈의 다음과 같은 예문들은 하늘이 비어 있다 하고 하느님의 본체가 허하다고 한다:
하늘의 근원은 이 하나의 큰 허무 빈 것일 뿐이다. (天之源 自是一大虛無空而已) 하늘의 하느님[神]은 능히 그 빈 것을 본체로 하고 주재한다. (天之一神能體其虛而乃其主宰也) 그러므로 한 기운은 즉 하늘이고 즉 빈 것이다. (故一氣卽天也卽空也) 다음 장에서 보듯이 만물을 창조할 때 하느님은 가장 먼저 하늘을 내신다. 하늘은 하느님의 본체이기도 하지만 하늘은 우리 사람과 만물이 그 안에서 사는 집이라 할 수 있어서 하느님은 이 집을 우리에게 먼저 지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대종교에서는 하늘을 큰 울 즉 한울이라고도 한다. 교화신 장의 ‘하늘은 하느님의 나라’ 라고 한 것은 하늘이 하느님과 만물이 머무는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비어있는 하늘은 만물을 하나로 연결시켜준다. 사람이 하늘에 속해 있지만 또한 사람 속에도 하늘이 있어서 우리를 안과 밖으로 관통하고 있다. 우리가 보려고만 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도 하늘의 모습을 볼 수가 있고 어떤 것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다. 참전계경 제 296 사 주수(株守)에도 ‘스스로 착함 지키기를 줄기가 뿌리를 지키듯 하여 하늘 기틀이 스스로 있다.’ 라고 하여 하늘이 사람 안에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수행인들이 ‘만물이 하나이다.’ 또는 ‘비어있다(空)’, ‘없음(無)’ 등의 진리를 체득하기 위해 수행한다. 이러한 화두들은 모두 하늘의 특성을 말하므로 하늘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일신고의 ‘하늘’이라는 화두로 수행하는 것도 아주 좋은 것이다. 경의 뒤에 나오는 ‘성품’ 또는 ‘내가 무엇인가’ 의 화두로 수행함도 좋다. 유불도 삼교에서 모두 일기(一氣)나 허공에서 세상이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 수행자들이 허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부처가 다 깨달았다 함은 철저하게 마음을 비우고 공함을 알았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하늘은 인문학적으로 보면 사람과 만물이 함께 살고 있는 큰 집이며 신학적으로 보면 하느님의 본체임과 동시에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조화 작용의 결과이다. 하늘은 도솔천이나 대라천 등과 같이 특정 세계를 지칭하는 뜻을 가지지 않으며 과학적으로 보면 우주에 무한히 펼쳐진 시공간이다. 다. 물리학의 허공 한동안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진공이라 불러왔다. 물리학에서의 진공은 삼일신고의 허공과 같은 의미이다. 영국의 물리학자 디락(P. A. M. Dirac, 1902~1982)은 진공을 다르게 생각했다. 상대론적 양자역학으로 계산하면 입자의 질량은 양수와 음수(陰數)값을 다 가질 수 있다. 세상에 음수 값의 질량을 갖는 입자는 없다. 그러나 디락은 음수의 질량을 갖는 입자들은 관측되지 않을 뿐이고 이 입자들이 진공을 빈틈없이 가득 메우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바다 속에 지능을 가진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하자. 바다 속에 있는 한 이 물고기는 바닷물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텅 빈 공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바닷물 가운데 기포가 일어나면 물고기는 이 기포를 입자 하나가 새로 생겨난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진공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공간이 무엇인가로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면 사람은 ‘빈틈없이 차 있는 상태’와 ‘텅 빈 상태’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진공이 어떤 입자들로 빈틈없이 가득 차 있는 상태라면 진공에서 입자가 하나 없어진 상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기 위해 이 입자를 전자(電子, Electron)라고 부르자. 이 상태에 전자를 하나 집어넣으면 다시 진공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전자를 하나 집어넣을 때 진공으로 돌아가는 상태라면 이런 상태는 진공에 구멍이 하나 뚫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진공에 구멍이 뚫어지면 진공은 더 이상 진공으로 관측되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진공에 뚫린 구멍에서 관측되는 것은 구멍이 가진 물리량일 것이다. 진공에 뚫어진 이 구멍을 반입자(反粒子, Antiparticle)라고 부른다. 반입자의 질량은 정확하게 대응하는 입자의 질량과 같을 것이고 다른 물리량은 대응하는 입자가 가진 물리량과 크기는 같고 부호는 반대일 것이다. 진공과 반입자에 대한 이러한 추론은 이미 1930년에 디락이 구멍이론(Hole Theory)이라는 이름으로 제안한 것이다. 디락의 구멍이론이 나왔을 때 당대의 뛰어난 물리학자들이 모두 비웃었으나 1931년에 전자의 반입자인 양전자(陽電子, Positron)가 실제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실험적으로 확인된 바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립자에는 대응하는 반입자가 존재한다. 디락의 이론이 실험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양자장론(量子場論)에서는 진공을 디락의 바다와는 약간 다르게 설명한다. 양자장론에서는 진공을 입자-반입자가 쌍으로 결합되어 있으나 관측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본다. 진공 속의 이들 입자와 반입자는 정지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진공과 현상계도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생멸을 반복하고 있는 이 입자들은 현상계의 입자들과도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이러다가 적당한 에너지의 자극이 오면 어떠한 입자와 반입자로 생성된다. 그림 1은 하나의 예로써, 광자 즉 빛에 의해 전자와 반전자 즉 양전자가 생성되고 그 두 입자가 결합하여 진공으로 돌아가면서 다시 광을 내는 반응을 보인다. 입자와 진공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진공에서 이 우주가 탄생했다고 믿을 정도이다. 허공의 시공간은 또한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설명된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허공에 대해 아직도 풀리지 않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허공에서 광자가 진행하는 모습과 전자기장이나 중력장 등이 허공에 생성되는 것 등의 현상들을 고려할 때 허공중에 계측되지 않는 어떠한 매질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 1. 광자에 의해 생성전자와 그 반입자인 양전자가 허공에서 광자를 내면서 없어지거나 된다. 제 2 장 조화신 가. 구성 조화신(造化神) 장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그 위에 더 없는 으뜸자리에 계셔,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을 가지시고 하늘을 내며 무수한 누리를 주관하고 만물을 창조하시되, 티끌만한 것도 빠뜨림이 없고, 밝고도 신령하시어 감히 이름 지어 헤아릴 길이 없다. 그 음성과 기운에 접하고자 원해도 친히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지만, 자기 본성에서 씨앗을 찾아보라. 언제나 너희 머릿속에 내려와 계신다. (神 在無上一位 有大德大慧大力 生天 主無數世界 造甡甡物 纖塵無漏 昭昭靈靈 不敢名量 聲氣願禱 絶親見 自性求子 降在爾腦 신 재무상일위 유대덕대혜대력 생천 주무수세계 조신신물 섬진무루 소소영영 불감명량 성기원도 절친견 자성구자 강재이뇌) 이 장의 내용은 하느님이 자신의 본체인 하늘을 내고 만물을 창조하는 조화신으로서의 작용에 대한 글이며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 ‘하느님은 그 위에 더 없는 으뜸자리에 계셔,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을 가지시고’ 는 하느님의 첫 자리와 창조하는 세 가지의 큰 능력에 대한 말씀이다. ‘하늘을 내며 ... 이름 지어 헤아릴 길이 없다.’의 둘째 부분은 스스로에 대한 조화 작용과 무수한 세계를 주재하고 만물을 창조하는 작용에 대한 말씀이다. 끝 부분은 하느님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무한하여 직접 볼 수 없으나 그의 모습이 만물의 머릿골[腦] 속에 성품으로 담아져 있으므로 만물은 스스로의 안에서 그 씨를 구할 수 있음에 대한 말씀이다. 나. 주석 하느님이 더 없는 으뜸자리에 계심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이 말은 만물은 스스로 높다고 교만하지 말고 높이 계신 하느님을 경배하라는 말이다. 참전계경의 제 2 사 경신에는 해 달 별들, 바람 비 벼락, 이들은 모습 있는 하늘이며, 보지 못하는 사물이 없으며 듣지 못하는 소리가 없는 이는 모습 없는 하늘이다. 모습 없는 하늘을 하늘의 하늘이라 이르며 하늘의 하늘이 곧 하느님이다. 사람이 하늘을 공경하지 않으면 하늘도 사람에게 응답하지 않으니 풀 나무가 비 이슬 서리 눈을 받지 못함과 같다. 이라 하여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사람이 하느님을 공경해야 됨을 가르친다. 자기를 낮추고 하느님을 공경해야 되는데 수행하는 사람 중에도 유아독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자기가 옥황상제라고 떠들며 돌아다니는 사람까지 있다. 이러한 사람은 수행을 더 해서 진실한 하느님이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의 능력은 다른 피조물의 능력과는 다르므로 덕, 지혜, 힘에 큰(大)을 붙여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으로 구별하였다. ‘무수한 누리를 주관하고 만물을 창조하시되’ 의 구절에서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에 무수한 누리를 주관함이 먼저 나옴은 하느님이 무수한 세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구상하면서 각 세계에 맞는 생물과 무생물들을 창조하시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티끌만한 것도 빠뜨림이 없고’ 의 구절은 우주의 어떠한 물질이나 생명도 저절로 난 것이 없고 하느님이 그의 뜻대로 지으신바 됨을 말한다. 밝음(昭)은 지적으로 밝음이고 영(靈)은 영적으로 신령하심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지적인 능력과 함께 정신적 영적인 능력을 언급하여 우리가 지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 하느님을 따라야 됨을 함축한다. 하느님은 감히 이름 지어 헤아릴 길이 없으므로 어떠한 그림이나 조각, 말로도 형용될 수 없다. 이 장에는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는 재(在)가 2회 나온다. 하느님이 그 위에 더 없는 으뜸자리에 계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작용의 본 자리이며 그 하느님의 씨앗(子)이 성품으로써 사람의 머릿속에 내려와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변화하심이 무수한 곳에 있는 것이니 그 나타나는 상(相)이다. 하늘이 내 안과 밖에 다 있는 것처럼 하느님도 내 밖에도 있고 내 안에도 있는 것이다. 이를 서양에서는 범재신론이라고 말한다. 하느님 자신의 성품을 우리의 머릿골 속에 넣어 그 속에서 하느님 모습을 발견하라 함은 사람에게 자율성과 창조성을 부여하는 최고의 조화의 원리이다. 각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참 성품을 받았으므로 인권이 존중되며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자율적으로 생각하며 성품을 닦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대지고의 유일신을 하늘에서 가장 높이 계신 분이라 하는 뜻으로 하느님이라 부른다. 대종교에서는 하느님을 큰 얼이라는 뜻으로 한얼님이라고도 부르고 크게 밝은 신이라 하여 한배검이라고도 부른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들에서도 확인이 되지만 우리 조상들은 조화신으로서의 하느님을 조물주(造物主)라고도 불렀다. 다. 하느님이 먼저 계심 동양 사상에서는 우주는 한 기 (一氣)나 도(道), 태극, 무극, 태허, 태일, 무(無), 공(空) 등으로 표현되는 하나가 자동으로 움직인 후 신이나 정신 등이 생겼다고 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말한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와 이를 이어받은 운급칠첨(雲笈七籤)의 ‘도가는 처음에 없음(無)에서 비롯하였으며 감응하여 묘일(妙一)로 생겼다. 묘일에서 나뉘어진 삼원(三元)이 이루어졌고 ...후에 삼신이 생기고 ..’ 등의 구절들은 신이나 정신 이전에 하나가 있다고 주장한다. 송대 유학의 “태극은 양의(兩儀:음양)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고 팔괘에서 만물이 생긴다” 라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송(宋)대 장횡거(張橫渠)의 ‘태허는 기이다. 기는 태허에서 생기고 모여서 만물을 생성하며 기가 흩어지면 함께 만물은 소멸하나 기는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 등의 구절도 만물 이전에 하나의 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에서도 하느님의 개념이 없고 모든 것이 공이나 색이나 같다고 한다. 이러한 유불도의 사상들은 이치나 도에 의해 세상이 움직인다고 설명하며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인 입장에 서있다. 동아시아의 주요 신화에서도 천지창조를 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유일신의 모습은 없다. 한국의 단군 신화와 일본 신화에는 천지창조에 대한 내용이 없다. 중국의 반고 신화를 보면 반고는 알에서 깨어나 세상을 개벽시키기는 했으나 나중에 죽으면서 그 몸의 일부들이 해, 달, 사람 등으로 화한다. 이러한 반고는 천지창조를 하는 유일 절대신이 아니다. 이런 반면에 삼일신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느님의 모습을 설명한다. 큰 덕과 지혜와 힘을 가진 인격신 하느님이 먼저 계시고 그 하느님이 첫 번째로 내신 것이 하늘이며 다음으로 무수한 세계를 주관하면서 만물을 빠뜨림 없이 창조한다고 가르친다. 동양에서 만물의 시원이라고 하는 일기(一氣) 또는 허공 즉 하늘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하느님의 지은 바 된 것이다. 삼일신고에 하늘이 나타나는 곳은 다음과 같이 세 곳이다. 하늘은 ... 겉도 속도 다 비어서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무엇이나 싸지 않은 것이 없다. (天 ... 虛虛空空 無不在 無不容) 하느님은 ... 하늘을 내시고 (神 ... 生天) 하늘은 하느님의 나라이다. 하늘집이 ... (天 神國 有天宮) 이 문구들 중 어떤 것도 하늘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하지 않는다. 하늘은 오직 허공만을 의미하며 물리적으로 말하면 시공간이다. 허공에 기운(氣)이 있다면 그 허공 속의 기운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이나 사람의 정신이 작용해야 된다. 참전계경의 제 17 사 허령(虛靈)에는 마음 즉 사람의 정신이 있는 빈곳에서 이치와 기운이 생김을 가르친다. 허령이란 마음에 가려진 바가 없어 밝은 색이 영롱함이다. 빈곳에서 이치와 기운이 생겨 크게는 하늘 누리를 두르고 가늘게는 작은 티끌에 들어간다. 그 이치와 기운이야말로 빈 것이고 또 신령스런 것이다. 라. 하느님의 씨앗 씨앗인 자(子)는 그 어버이로부터 태어난 것이므로 씨앗이기도 하지만 자식이기도 하다. 기독교에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삼일신고는 모든 사람이 성품만 통하면 하느님의 자식 됨을 깨닫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과 사람이 단지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머문다거나 주종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원래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인 것처럼 친밀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점은 이 경에서 경 전반에 걸쳐서 일관되게 말해지고 있는데 그 구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 자기 본성에서 씨앗을 찾아보라. 언제나 너희 머릿속에 내려와 계신다. (神 ... 自性求子 降在爾腦) 성통공완한 사람은 뵙고 영원한 쾌락을 얻는다. (性通功完者 朝 永得快樂) 참에 돌이키면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返眞一神) 큰 하느님 기틀을 내나니 성통공완이 이것이다. (發大神機 性通功完 是) 성통공완하면 하느님을 뵙는다는 말은 신하가 왕을 뵙는 것 같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뵙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쾌락을 누린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도 친히 뵙는다는 말과 유사하며 큰 하느님 기틀을 낸다는 말은 내 안에 하느님의 씨앗이 있으므로 성통공완하면 그것을 깨우쳐 보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 네 구절 모두 일관되게 사람이 하느님의 자식이 되어 하느님께 이르러 친히 뵐 수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마. 계시 경전은 소리(聲)나 기운(氣)으로 원도(기도)하면 하느님이 직접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리(聲)나 기운(氣)으로 원도함은 원도하는 중에 뭔가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계시를 보여 달라고 원하는 것이다. 소리는 말소리도 포함한다. 말소리는 계시의 다른 것들과는 달리 특별하여 구체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고 지시할 수 있다. 기운은 뒤에 나오는 마음과 기운과 몸의 기운으로도 볼 수 있고 기척이나 기색 등의 소리 이외에 우리가 지각하거나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뜻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든 가능하며 또한 밝고도 신령하시어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모습이기 때문에 이러한 소리나 기운으로 원도하면 보이시지 않는다. 그렇지만 원도한다고 목소리가 들리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성품이 머릿골 속에 내려와 있으니 성품에 따라 살고 하늘이치대로 살면 서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참된 성품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하늘로부터 음성을 들을 수도 있고 환영을 보는 이도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도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계시는 하느님이 직접 한 일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신령이나 밝은이, 또는 다른 영들이 하는 말이나 작용이다. 혹은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부터의 계시일 수도 있다. 진실로 믿고 수행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원도하거나 꿈을 꾸는 동안에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거나 무언가 신비로운 것을 보거나 기운이나 기척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아플 때 원도하여 원기를 회복하고 병이 나을 수도 있고 마음이 낙심될 때 원도하여 기운을 회복하고 마음을 바로 잡을 수도 있다. 대종교에서는 홍암 대종사가 묵계 즉 계시를 받은 적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성령이 계시를 준다고 하고 이슬람교의 마호멧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듣고 사람들에게 전했다 한다. 계시를 받는 이들은 그들의 계시만의 절대적이라 말하고 있지만 계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계시를 해준 영에 따라 그 성격이 다르며 그 시대생황에 맞게 내리는 상대적인 것이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를 잘 못 알고 자기가 받은 계시만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계시라 하여 주장하면 시간과 지역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억지가 된다. 역사적인 예를 들면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이다.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절대적이라 믿고 이슬람교도들은 코란을 절대적이라 믿는데 동일인인 예수에 대한 계시 내용은 서로 달라 갈등은 계속된다.
삼일신고는 계시가 아니라 성품을 보라고 단정적으로 가르친다. 성품은 하느님의 모습이므로 계시를 받았다 해도 성품에 맞아야 되며 우리의 성품에 어긋나지 않아야 된다. 계시는 특정인에게 특정한 시간에 내려진 것이니 이것이 보편적인 성품에 맞아야 됨은 당연한 것이다. 이 경에는 하느님이 특정한 시대에 어떤 특정한 민족에게 직접 내려와 선민했다는 신화적인 요소도 없다. 하느님은 모든 종족에게 공평하게 세 참을 내려주고 오직 자기가 지은 행함에 의해 그 결과가 정해진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보지도 않았고 믿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종교적인 이유로 강제적으로 믿어야 되는 특정 사건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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