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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강좌

後漢書 東夷傳의 새로운 해석을 통한 東夷 인식-참고자료1
관리자 2019-11-14 09:4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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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01)

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卽渡, 馳入塞, 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卽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下略)

  

  

조선왕 滿은 예전의 燕 사람이다. 

처음 燕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眞番과 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망시킨 이후에는 遼東의 변방까지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복속시켰다.

燕王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들어가자 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명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遼東의 요새를 나와 浿水를 건너 秦의 예전 空地인 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眞番과 朝鮮의 蠻夷 및 예전 燕과 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王이 되었으며 王儉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때는 마침 孝惠와 高后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遼東太守는 곧 滿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蠻夷의 君長이 漢 天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天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眞番과 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아들을 거쳐 손자 右渠 때에 이르러 유인해낸 漢의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天子에게 入見치 않을 뿐만 아니라, 眞番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天子에게 謁見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元封 2년 漢은 사신 涉何를 보내어 右渠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右渠는 끝내 天子의 命을 받들려 하지 않았다. 涉何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朝鮮의 裨王 長을 찔러죽이고 바로 浿水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天子에게 朝鮮의 將帥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天子가 그 功을 기려 꾸짖지 않고, 涉何에게 遼東東部都尉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朝鮮은 涉何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급공격해 涉何를 죽이니, 天子는 죄인을 모집하여 朝鮮을 치게 하였다.

그해 가을에 樓船將軍 楊僕을 파견하여 齊로부터 渤海를 건너게 하고, 군사 5만으로 左將軍 荀彘는 遼東에 출격하여 右渠를 토벌하게 하였다. 右渠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左將軍인 卒正 多는 遼東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출병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多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斬刑하였다. 樓船將軍은 齊의 병사 7천명으로 먼저 王險에 이르렀는데, 右渠가 城을 지키고 있으면서 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아내고, 곧 성을 나와 樓船을 치니 樓船軍은 패배하여 흩어져 도망갔다. 장군 양복은 믾은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左將軍도 朝鮮의 浿水 西軍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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