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국학강좌

後漢書 東夷傳의 새로운 해석을 통한 東夷 인식
관리자 2019-11-14 12:00:05
첨부파일

<東夷 관련 토론> 개요(2009년 7월 15일 수요일) 

- 제목 : 後漢書 東夷傳의 새로운 해석을 통한 東夷 인식

  

1. 後漢書의 사료 가치

  

398년에 山陰(지금의 浙江省 紹興)에서 태어난 范曄은 420년 宋이 건국된 뒤 尚書外兵郎, 新蔡太守, 尚書吏部郎, 秘書監 등을 역임했지만 傲慢한 성격으로 인하여 관직 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432년 宣城太守로 좌천되며 范曄은 10卷의 本紀와 80卷의 列傳으로 된 後漢書의 집필을 시작하였고, 그 뒤 左衛將軍 및 太子詹事 등을 역임하면서 10여년 동안 後漢書의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445년 宋 文帝의 彭城王 劉義康을 皇帝로 옹립하려 시도하다가, 徐湛之의 密告로 사로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范曄의 死後 梁의 劉昭가 司馬彪가 저술한 續漢書에서 律曆, 禮儀, 祭祀, 天文, 五行, 郡國, 百官, 輿服 등의 八志 부분에 註釋을 붙여 30卷의 補注後漢志를 편찬하여 後漢書에 첨부하였다. 이로써 本紀 10卷, 列傳 80卷, 志 30卷으로 이루어진 後漢書의 체재가 완성되었다.

後漢書는 光武帝(재위 25~57년)부터 献帝(재위 189~220년)까지 後漢 13代 196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 역대 왕조의 正史인 二十五史 가운데에서도 司馬遷의 史記, 班固의 漢書, 陳壽의 三國志와 함께 四史로 일컬어지며 중시된다.

後漢書 卷85의 東夷列傳은 陳壽의 三國志 魏書 卷30 烏丸鮮卑東夷傳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일부 새로운 사실도 있으며, 한국 古代史 연구에 중요한 史料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東夷列傳에서 東夷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東夷의 전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데, 한국 고대사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四史의 한국 고대사 관련 기재 비교

  

<표1>. 四史의 비교

사서

저자 생몰 년대

사서 저술 년대

서술대상 역사

한국사 관련 서술 부분

史記

司馬遷

(BC135~BC90년)

BC104~BC91년

黃帝~漢 武帝

(?~BC101年)

朝鮮列傳

漢書

班固

(32~92년)

54~82년

前漢~王莽

(BC206~24년)

朝鮮傳

三國志

陳壽

(233~297년)

280~290년

三國時代

(220~265년)

魏書東夷傳

後漢書

范曄

(398~445년)

432~445년

後漢

(25~219년)

東夷列傳

  

위의 <표1>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史記와 漢書의 朝鮮 인식을 알 수 있다.

史記와 漢書는 朝鮮列傳 및 朝鮮傳에서 “燕人 滿이 朝鮮의 왕이 된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여, 漢 武帝가 朝鮮과 벌인 전쟁의 과정과 그 전쟁으로 인한 朝鮮의 멸망 그리고 그 전쟁의 功過에 따른 상벌”까지 기록하고 있다.

漢書는 史記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몇 글자가 첨삭되었을 뿐 내용에 변화는 없고, 단지 漢書에는 史記의 기록에 없는 四郡의 명칭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이 크게 다른 점이다.

史記는 列傳의 형식을 빌어 匈奴, 東越, 南越, 朝鮮, 西南夷 등 漢의 사방에 있는 여러 국가와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그 중 朝鮮列傳은 漢의 동북방 강역 등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史記와 漢書의 朝鮮列傳에는 漢이 燕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北京 일대와 灤河 以西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유하게 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史記와 漢書의 朝鮮 관련 기록 일부 분석(별첨 사료 참조)

  

2)三國志 魏書東夷傳에서 처음으로 東夷傳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三國志에서 東夷傳을 처음 기록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에 대한 분석(별도 설명 참조)

  

3)後漢書 東夷列傳에서 東夷의 개념과 역사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三國志 편찬 이후 140여년 뒤에 저술된 後漢書의 東夷列傳은 三國志 東夷傳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옮겨 놓았지만, 列傳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은 그 내용을 보충하였다. 

이 부분의 내용은 東夷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東夷의 역사를 서술하며, 秦의 통일로 淮水와 泗水의 東夷가 소멸되는 과정과 秦始皇 死後와 漢 武帝 시기 및 그 이후 東夷의 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後漢書 東夷列傳에 실린 東夷 인식 분석(별첨 사료 참조)

  

  

3. 後漢書 東夷列傳에 나타난 東夷에 대한 새로운 해석

  

중국에서의 東夷 연구 전문가인 山东大学 美术考古研究所 所长인 刘凤君은 최근 《창락골각문과 수양산 암서 상호 증명[昌乐骨刻文与首阳山岩书互证]》이란 글을 발표하며 “사실 上古時代에 東夷民族은 중국인과 일본인 및 한국인의 공동 조상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2009년 7월 8일자 人民网).

좁은 의미에서의 上古史의 東夷는 山東半島로부터 淮水 유역에 거주하였던 嵎夷․淮夷․萊夷․徐戎 등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東夷는 渤海․黃海를 둘러싼 오늘의 중국 江蘇省, 山東省, 河北省, 遼寧省, 吉林省, 黑龍江省 및 한반도 일대에 분포되어 살던 民族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東夷族은 서쪽의 華夏族과 더불어 古代 中國民族을 형성한 근간이었던 동시에 韓國上古史의 주인공인 韓․濊貊系가 그 주류를 이룬 종족인 까닭에, 이에 대한 연구는 韓中 양국의 민족형성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東夷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많은 기록을 남겼음은 물론 현재까지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고대에 嵎夷의 지역으로 알려진 산동성 靑州市는 현재 东夷文化生態园을 건립중이며 靑州市, 桓台縣, 烟台市, 青島市, 日照市 등과 강소성의 連雲港 등 각지의 박물관 및 유적지에서는 漢族과 차별화되는 東夷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문화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작년 3월 30일 山东大學, 山东師範大學, 山东省社會科學院, 山东省历史學會가 주최하고 青州市가 주관하는 東夷文化硏究討論會를 靑州市에서 개최하는 등 東夷와 관련된 깊이 있는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또한 2007년에 山東省 昌樂縣에서 殷墟의 甲骨文보다 천여년을 앞서며 東夷文化의 초기 문자일 가능성이 높은 东夷甲骨文을 발견하여 “中國文字史 중 하나의 중대 발견”으로 평가하였으며, 2008년 7월 30일 중국문자 연구의 권위 있는 전문가인 王宇信 교수 등이 昌樂에 모여 이 東夷文字가 河南 安陽의 殷墟甲骨文보다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아울러 이들 문자를 다른 문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昌樂骨刻文字’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東夷의 문화에 대해 다양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 중국 전역에서 벌이는 제3차 전국문물일제조사와 맞물려 東夷의 유적에 대한 발굴작업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韓致奫(서기 1765~1814년)이 『海東繹史』에 東夷 관련 문헌기록을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는 등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지만, 현재까지 東夷에 대한 연구성과는 만족스럽지 못한 실정이다. 金庠基(1947)는 東夷는 원래 중국의 서북부에 있다가 동쪽으로 이동하며 한 갈래는 山東半島 쪽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갈래는 다시 東進하여 渤海灣을 따라서 遼東 지방을 거쳐 韓半島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韓․濊․貊의 이동설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金庠基(1954)는 종족으로서 광의의 東夷 개념을 정의하며 淮夷 및 徐戎 등과의 관계를 분석하여 東夷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여러 학자들이 한민족의 형성이나 濊貊과 관련하여 東夷를 언급하기도 했고, 고고학 영역에서 東夷를 다루기도 했으며, 중국 문헌의 東夷傳에 기록된 東夷를 분석하여 그 개념을 정의하는 연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연구성과는 실로 미미하였다.

한국 上古史에서 東夷 연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이유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 東夷의 중심세력이었던 우리 민족이 後期 新羅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특히 朝鮮時代에 접어들어 당당하게 東夷族의 후예임을 내세우지 못하고 중국의 亞流인 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東夷의 역사와 문화를 감추고 은폐하는데 스스로 앞장섰기 때문이다.

둘째, 일제강점기 36년을 거치면서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古代史 자료들마저 인멸되고 또 사대적 역사학자들은 일제 植民史觀의 영향으로 民族魂과 自主意識이 극도로 빈약해졌기 때문이다.

申采浩가 “朝鮮史는 內亂이나 外寇의 兵火에서보다 朝鮮史를 著作하던 其人들의 손에서 蕩殘되었다 하노라.”라고 비판했듯, 우리 上古史의 중요한 부분인 東夷史는 한편으로는 중국의 中華主義에 의해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오랜 事大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연구하지 못한 원인으로 인하여 그 실체가 밝혀지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東夷가 누구인지 또 우리 한민족과 東夷는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관련이 있는지 東夷의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내왔다.

일본의 八木獎三郞은 “夏商周 三代의 東夷는 舊東夷이고 秦漢 이후 滿洲 및 朝鮮 등의 東夷는 新東夷로서 新東夷인 우리 한민족은 秦漢 이전 중국의 舊東夷와는 무관한 것”처럼 주장하는 견해를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현재 한국의 상당수 학자들이 이런 견해에 동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紅山文化는 물론 중국 河北省과 山東省 일대의 고고자료를 통해서, 중국 사서에 남겨진 기록들을 통해서 이제 東夷의 實體가 충분히 드러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그 동안의 관점과 편견을 극복하고 東夷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한국 상고사를 체계화시켜야만 한다. 

⇒歷史地理學 관점, 고고학 관점에서 東夷의 강역과 문화(별도의 부연 설명)

이전글 만주지역 항일운동
다음글 2025년 제4회 국학강좌(2025. 5. 30), <읍루-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