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인물] 안확(安廓:1886-19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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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19-11-14 10:5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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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자산(自山)이며, 필명으로 운문생(雲門生)·팔대수(八大搜) 등을 사용했고,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우리의 문명과 문학, 그리고 음악 등의 정신적 근원을 상고사상에서 발견코자 했던 근대 국학의 중심인물이다. 1916년경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대종교 비밀결사적 성격이 강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마산지부장을 맡고, 3 ·1운동 때는 마산시위를 주동하였다. 이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1921년 조선청년회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인, 이듬해에는 신천지사(新天地社)의 편집인이 되었다. 1928년부터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촉탁으로 일하면서 음악 및 국문학 관계의 방대한 왕실 소장 자료들에 접하여 훈민정음의 악리(樂理) 기원설 제시, 가시(歌詩) 장르 설정(삼대목체 ·정읍체 ·첩성체 ·경기체 ·장편 ·시조)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안확의 사관은 당대의 대종교계통의 국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사관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의 『조선문학사』를 문학을 통한 우리 민족의 국민사상사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모음(母音)의 발달이 세계 언어 중 가장 많고 우수한 경어(敬語)가 풍부하며 민족성이 온아하고 순후한 것은 이러한 상대 문학의 사상에서 유래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상고문학의 기원을 대종교의 ‘종사상(倧思想)’에서 기원한다고 보고, 상고 문학의 기원을 종교적 신화에서 발견코자 했으며 그 종교적 신화의 한국적 원형을 ‘종화(倧話)’에서 찾고자 했다. 까닭에 안확은 이러한 ‘종’의 관념이 일반 국민의 중심사상을 구성하여 생활 깊이 파고드니, 그 주관적 의식의 발달이 개인 윤리의 역사를 나타내고 그 객관적 도덕질서의 발달이 사회 윤리의 역사로까지 발전하여 고대 한국의 인문사(人文史)를 형성했다고까지 말했던 인물이다. 안확은 「삼일신고」를 인도의 『베다(Veda)』, 페르시아의 『벤디다드(Vendidad)』, 그리고 히브리의 『구약(舊約)』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더욱이 대종교의 영향은 안확의 문학사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고유사상과 외래사상과의 관계를 대립이 아닌 ‘협화(協和)’의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 사회진화론과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는데, 이 ‘협화’의 개념 역시 대종교의 영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풍류도의 ‘접화군생’과 일맥하는 가치다.
1945년 8 ·15광복을 맞아 정당활동에 뜻을 가졌으나 1946년 11월에 급환으로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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