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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인물] 이병기(李秉岐:1891-1968)
관리자 2019-11-14 10: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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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가람(嘉藍)으로 전북 익산(益山)에서 출생했다. 한성사범(漢城師範)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고문헌(古文獻) 수집과 시조연구에 몰두,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지에 《한강(漢江)을 지나며》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조시인으로 출발했다. 한편 한국고전(韓國古典)에 대한 주석 및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국문학자로서의 자리도 굳혔다. 

1926년 최초로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고 《시조란 무엇인가》 《율격(律格)과 시조》 《시조와 그 연구》 등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이병기는 우리나라 현대시조의 개척자 혹은 아버지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시조 증흥을 통하여 우리의 국문학을 살찌우게 한 인물이다. 그는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직접 배웠으며, 특히 창씨개명의 거부와 일체의 친일적 내용이 담긴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은 대쪽같은 애국자이기도 했다. 
이병기의 이러한 정신적 배경 또한 대종교와 무관치 않은데, 그는 대종교 신앙이야말로 오랜 세월 전부터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흘러왔으며, 후손들의 믿음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던 인물이다. 또한 전래의 삼신(三神)의 의미가 바로 한배님임을 밝히고 우리 민족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이미 녹아있는 종교적 성정(性情)임을 강조하면서, 대종교를 국교(國敎)의 가치로 인식했다.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고 1939년에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을 발간, 《문장(文章)》지 창간호부터 《한중록주해(恨中錄註解)》를 발표하는 등 고전연구에 정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피검, 함흥(咸興) 형무소에 수감되어 l년 가까이 복역하다 1943년 가을에 기소유예로 출감한 후 귀향하여 농사와 고문헌연구에 몰두했다. 
광복 후 상경,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각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다. 

1948년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 등을 역주(譯註) 간행했고, 

1954년 학술원회원이 되었으며, 이 해 백철(白鐵)과 공저로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를 발간,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했다. 시조시인으로서 현대적인 시풍을 확립하였고, 국문학자로서는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주해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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