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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인물] 이극로(李克魯:1897-1982)
관리자 2019-11-14 10: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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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宜寧) 출생으로 호는 고루를 썼다. 

이극로는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파리대학과 런던대학에서 음성학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1929년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했다. 

한힌샘 주시경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1921년에 결성한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조선어사전편찬․한글맞춤법제정․외래어표기․표준어사정 등의 굵직한 국어의 당면문제들을 추진해 나가는데, 이극로는 간사장(幹事長)으로서 사실상 어학회를 이끌었다. 


1912년 만주 회인현(懷仁縣)에서 대종교를 처음 접하고 대종교의 중심인물이었던 단애 윤세복과 백암 박은식, 그리고 국어연구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백주(白舟) 김진[金振: 대종교에서는 金永肅으로 많이 알려짐(필자 주)]을 만나 한글사랑에 눈을 뜬 인물이다.
1914년 이극로는 회인현 대종교 교당에서 단재 신채호도 처음 만나 영향을 받은 듯 하며, 윤세복을 따라 백두삼림 무송현(撫松縣)으로 들어가서는 대종교 계열의 학교인 백산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이극로는 당시 대종교 중심인물이었던 백산 안희제의 주선으로, 신성모․안호상 등과 중국 상해를 통해 구라파 유학을 떠났다. 

특히 이극로는 베를린대학에 조선어과(朝鮮語科)를 설치해 전세계에 우리 국어․국문 그리고 우리 문화를 최초로 선전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대종교정신을 통한 국어사랑에 초지일관했다.
또한 일제 말에 임오교변(대종교지도자일제구속사건)과 조선어학회사건도 모두 이극로와 연관이 된 것이다. 

임오교변이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널리펴는 말」이라는 글이 단서가 된 것 같이, 조선어학회사건은 만주에서 윤세복이 「단군성가(檀君聖歌)」라는 가사를 지어 경성에 있는 이극로에게 보내 작곡을 의뢰했는데, 이 가사가 조선어학회 이극로의 책상 위에서 일경(日警)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조선어학회사건의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귀국, 조선어학회 주간으로 있으면서 《조선어사전》을 펴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8·15광복으로 풀려나, 조선어학회 회장,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회장을 지내면서 정계에 들어섰다.


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내고,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그대로 남았다. 같은 해 9월 북한 제1차 내각의 무임소상(無任所相), 1949년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1966년 이후 본격화된 북한 언어 규범화운동인 ''''문화어운동''''을 주도하였다.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에는 《실험도해조선어음성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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