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인물] 신규식(申圭植:1879-19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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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2019-11-14 10: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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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공집(公執)이며, 호는 예관(睨觀)·일민(一民), 때로는 아목루실(兒目淚室)이라는 필명을 사용했고, 청주(淸州)에서 출생하였다. 관립 한어학교(漢語學校)와 육군무관학교를 나와 육군 부위(副尉)로 진급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죽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실패, 오른쪽 눈만 실명하였다. 그래서 예관이라는 호를 썼다고 한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며,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활동하다가 국권피탈의 소식에 분개, 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대종교 종사(宗師) 나철(羅喆)에 의해 구조되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 쑨원[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가담하였다.
1910년 스스로 해외시교(海外施敎)를 자임하여 상해로 떠나는데, 당시 중국관내의 한국인 대부분이 동삼성일대(東三省一帶)에 모여 활동했으므로 상해일대에서 한국인 활동은 전무한 상태였다.
조국을 광복하는 일을 하나의 공작(工作)이나 포부로만 생각지 않고 일종의 종교요 신앙으로 보았던 것이다. 까닭에 그는 한민족이 부흥하려면 반드시 대종교가 발전해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대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국민의 민족정신이 그만큼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인물이다.
그리고 1911년 10월 진기미를 따라 무창의거(武昌義擧)에 참가하면서 한국 독립지사로서는 중국 신해혁명에 투신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또한 신규식은 중국혁명지사들의 문학단체인 남사(南社)에 가입함을 인연으로 하여 환구중국학생회에도 참여함으로써, 인재양성을 위한 조직적 협조를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실상 이 단체의 중국 측 주요인사들이 후일 손문(孫文) 광동정부의 주요직을 많이 맡았고 국민당정부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므로, 상해임시정부의 수립과정에서나 수립 후의 정치․외교항쟁의 과정에서 중국혁명정부와의 긴밀한 유대가 가능했고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신한혁명단 또한 신규식․박은식․이상설․유동열 등 대종교의 중심인물들이 주동이 되어 만든 것으로 당시의 세계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망명정부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이후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리고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議政院) 부의장에 선출, 법무총장을 거쳐 1921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었다. 이 해 광동[廣東]의 신생 중화민국 정부에 대사로 부임,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고 중국의 북벌서사식(北伐誓詞式)에도 참가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다.
저서에 《한국혼(韓國魂)》 《아목루(兒目淚)》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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