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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칼럼] [종사상] 국학의 실체
관리자 2019-11-14 15: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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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학의 실체는 우리의 고유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인간 사상(事象)의 출발이 종교와 뗄 수 없다는 인식과도 밀접하다. 중국 국학의 근본이 유교와 뗄 수가 없고 일본 국학의 토대가 그들의 신도와 별개가 아님도 이것과 유사한 것이다. 
일본의 국학이 일본 신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중국의 근대 국학 역시 고학(古學) 부흥을 제창했는데, 중국의 고학이란 유학(儒學)을 포함한 선진(先秦)의 제자학(諸子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근대 국학에서도 종교철학적 속성을 강조했음을 확인시켜 주는데, 근자에 중국 인민대학의 국학원 설립이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고전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 것에서도, 현금 중국 국학의 뿌리도 유교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국에 자본주의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일면서, 흔들리는 사회주의의 이념 문제를 중국의 전통 가치인 유교에서 찾아 세우려는 것이다. 얼마 전(2005년 9월 초)에도 200명이 넘는 중국 지도자와 화교(華僑) 학자들이 모여 유학연구대토론회(儒學硏究大討論會)가 벌어졌다. 여기서 도출된 것이 “유학에서 사회 충돌을 피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世界日報』, 2005년 9월 27일자) 즉 중국의 국학도 중국의 전통 종교인 유교의 토대 위에서 지속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한국사상사의 초두를 장식하는 부분이 토착고신앙(土着古信仰)이며, 그 자체가 중요한 맥락을 이루면서 한국사 전반에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들어 온 불교와 유교 또한 토착고신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특히 고신앙 방면은 일제시대 민족적 성향을 가진 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배경에도 단군신앙의 영향이 컸다는 것도 주목된다. 
까닭에 김교헌이 칭한 ‘神敎’나, 신채호가 말한 ‘仙敎(東國古代仙敎考)․수두敎(朝鮮上古文化史)․朗家(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그리고 최남선이 칭한 ‘부루敎’, 박은식의 ‘國魂’, 정인보의 ‘얼’, 이능화의 ‘神敎’, 안확의 ‘倧思想’ 등은 신라 최치원의 ‘玄妙之道’와 함께 小異相通하는 명명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은 후일 단군신앙을 근대적으로 부활시킨 홍암 나철이 국학의 선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도 되는 것이다. 
나철의 사상 속에는 국학적 요소인 국어․국사․국교․철학․민속․수행 등이 두루 나타난다. 나철의 국학은 사상적 정체성과 시간적 연속성, 그리고 공간적 차별성과 보편적 개방성의 속성을 두루 갖춘 국학으로, 문․사․철이 회통되어 나타나는 국학이라는 점에서 순수 국학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이러한 가치가 우리 고유의 단군신앙의 중흥과 함께 성숙되었다는 것은, 나철 국학의 정신적 배경을 알게 해 주는 동시에, 근대 국학의 선각자라는 홍암의 위상을 확인시켜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의 국학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닫혀 있는 국학이 아니라 열린 국학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향후 세계화 시대의 국학연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국학을 통해 학문의 보편적 원리와 그 의의를 정립하고, 세계학문의 길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길을 모색해야 하며, 국학을 넘어서는 국학을 해야 세계를 향하는 길이 열린다는 주장에도 부합되는 가치다.
기존 국학연구의 업적이 전술한 바와 같이 삼국시대를 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이전의 시대로 국학의 자취를 재구(再構)해 감에 있어 사료의 빈곤과 재야사서의 문제에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조 세조의 수서령(收書令)으로 자취를 감춘 서책들인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表訓)․삼성밀기(三聖密記)․삼성기(三聖記-安含老元董仲)․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사량훈(河沙良訓)․문태산옥거인업등삼인기록(文泰山王居仁業等三人記錄)․수찬기고(修撰企所)․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虱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만 보더라도 대부분이 우리 순수국학의 중요한 맥이 될 수 있는 신교사서(神敎史書)와 연관됨을 상기한다면, 우리 고신앙의 흐름이 험난한 역정 속에서도 우리 민족사의 줄기에 끊임없이 흘러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민족의 민족적 특징이 고조선 원민족(선민족 proto-nation or pre-nation)부터 시작되고 있고, 한민족의 형성사는 고조선 원민족의 형성사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민족사회학적 분석이 주목된다.
원민족은 본질적으로 혈연공동체인 부족으로부터 본질적으로 문화공동체인 전근대민족(때로 지역에 따라서는 근대민족)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민족으로서, 기본적으로 정치․군사․언어․문화․신앙․관습의 공통적 결합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이다. 원민족에 나타나는 군사공동체의 특징은 지배지역과 지역주민을 끊임없는 정복에 의하여 확대해 가려는 강렬한 운동을 촉발시켜 꾸준히 민족형성으로 팽창해 가는 동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도 단군 시대부터 종교와 군대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음은 일찍이 최남선에 의해서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군사공동체의 특징은 신채호의 주장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신채호는 신라의 화랑이, 단군시대의 무사도에서 출발하여 고구려를 거쳐 신라의 정신으로 연결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花郞의 別名은 國仙이라 하며 仙郞이라 하고, 高句麗 皂衣의 別名은 仙人이라 하여, 『三國遺事』의 花郞을 ‘神仙之事’라 하였은 즉, 新羅의 花郞은 곧 高句麗의 皂衣에서 나온 者요, 高句麗史의 ‘平壤者 仙人王儉之宅’은 곧 仙史의 本文이니 壇君이 곧 仙人의 始祖라, 仙人은 곧 우리의 國敎이며 우리의 武士道이며 우리 民族의 넋이며 우리 國史의 꽃이거늘….” 

그는 단군시대의 선인을 국교(國敎)이며 민족사의 정화(精華)로 보고, 이것을 계승한 화랑을 종교의 혼(魂)이요 국수(國粹)의 중심이라고 강조했다. 까닭에 그는 중국문화가 발호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중국화하려던 시기에도 조선을 조선답게 지켜온 것이 화랑이라고 극찬했다.  
한편 신채호가 단군시대의 이러한 정신을 국학(國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즉,

“夫餘․馬韓 等 十餘國의 이름을, 그 沿革을 찾으면 다 壇君 때부터 있던 稱號라. 後世에 國學이 끊어져 그 根源을 찾지 않고 다만 그 자취를 따라 이 이름은 이 때에 나고, 저 이름은 저 때에 났다고 해 왔다.” 

라는 기록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사담체(史談體) 소설인 「꿈하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단군시대로부터 흘러오는 신교적(神敎的) 인물들을 열거함에 있어, 굳은 신앙을 보여 준 동명성제․명림답부, 밝은 치제(治制)를 행한 초고대왕(백제)․선왕(발해), 높은 이상을 펼친 진흥대왕․설원랑, 역사에 밝았던 신지선인․이문진․고흥․정지상, 국문에 힘을 쏟았던 세종대왕․설총․주시경, 육군(陸軍)에 능했던 태조(발해)․연개소문․을지문덕 등을 열거하면서,

“國學에는 비록 도움이 없지만 일방의 교문에 통달하여 朝鮮의 빛을 보탠 佛學의 元曉․義湘, 儒學의 晦齋․退溪….” 

라고 서술함을 볼 때, 국학(國學)과 불학․유학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신채호에 있어서의 국학과 국수(國粹)의 의미가 서로 상통하는 용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일찍이 국수의 정신을, 그 나라에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풍습․관습․법률․제도 등의 정신이라고 주창한 바 있는데, 신채호는 1910年 「東國古代仙敎考」를 발표하기 전에는, ‘國粹(「國粹保全論」․1908年)’와 함께, ‘國民魂(「國民의 魂」․1909年)’과 ‘精神上國家(「精神上 國家」․1909年)’라는 표현으로 우리의 고유가치를 나타내려 했다. 그는 重하고 强한 것이 ‘國民魂’이라 하면서, 이것만 지키면 나라가 결코 망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또한 민족이 독립할 정신․자유할 정신․생존할 정신, 국위를 선양할 정신․國光을 煥發할 정신 등을 ‘國民魂’이라고 밝히면서, ‘形式上의 國家’에 우선하여 ‘精神上의 國家’를 강조하고 있다. 이 국수정신의 출발을 단군에 접맥시킨 것이다. 
한편 박은식도 국학이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는 국학을 국교(國敎)․국어(國語)․국문(國文)․국사(國史)와 함께 국혼(國魂)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는 국혼과 국백(國魄)을 대비시키면서, 나라의 멸망은 국혼과 국백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나라의 근본인이 되는 국혼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 속성을 가짐으로, 국혼을 굳건히 하면 국백이 일어나 광복이 될 것으로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박은식이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한 국학이라는 말은 다른 하위 개념(국교․국어․국문․국사)에 비해 그 의미가 모호하고, 박은식 또한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국학에 대해 뚜렷한 의미 규정이 없다. 다만 논리적 접근을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의 유추가 가능하다. 즉 동위 개념의 설정에 있어 의미의 상호배타성을 고려한다면, 국어․국문․국사와는 다른 가치로써 국교와 중복되지 않는 철학․사상 혹은 풍속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까닭에 신채호의 국학과 상통하는 박은식의 개념 용어는 국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이것은 신채호의 국학과 박은식의 국혼이 문(文)․사(史)․철(哲)을 토대로 한 우리 고유의 정신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채호가 단군의 선교(仙敎)를 중국의 선교가 아니라고 밝히면서, 단군선교에 대한 무지(無知)와 그 종교의 침체를, ‘국수(國粹)의 무너짐’이라고 한탄함을 볼 때, 신채호의 국수 혹은 국학이 단군신앙에 연결되는 것임이 확인된다. 또한 박은식도 단군신앙을 부흥시킨 대종교를 우리 민족의 삼신을 믿는 최고(最古)의 종교로 보고 그 신조(信條)가 족성(族性)과 국성(國性)을 보지(保持)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 있어서 국혼(國魂)의 토대가 단군신앙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체계는 최남선의 ‘부루교(敎)’나 ‘신도(神道)’, 정인보의 ‘조선얼’ 그리고 안재홍의 ‘한․’이나 ‘태백진교(太伯眞敎)’, 안확의 ‘종사상(倧思想)’과 이능화의 ‘신교(神敎)’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안호상은 전래 단군신앙 속에서 형성된 역사와 철학을 국학이라는 명칭으로 개념화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순수국학의 본체 혹은 사유범위를 우리의 단군신앙(神敎 혹은 仙敎)과 연관된 문․사․철로 테두리 짓는 것이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국학적 요소들이 보편성을 내포할 수 있는가가 문제될 수 있지만, 이들의 국학적 사유에 원동력이 되었던 나철의 개방성을 본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우리의 국학의 범위와 연관하여, 배달글(한글)을 국어로 하는 우리의 사회가 언중(言衆)과 민족 그리고 국민이 일치되는 집단으로써 지구상에 보기 드문 언어사회라는 점을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역사의 인멸 속에서 유교사관과 불교사관이 대신해 온 한국사학사에, 근대민족사관의 틀을 제공한 것이 신교사관(神敎史觀)이라는 것을 더욱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더욱이 한국의 불교사상이 인도철학의 연장 위에서 성립하고 우리의 유교사상 또한 중국철학의 기반 위에서 의미를 가짐을 볼 때,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한국철학(한철학․삼일철학)이 단군신앙의 기반 위에서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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