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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강좌

민족주의자 신명균의 삶과 활동
관리자 2019-11-14 10: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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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 신명균의 삶과 활동
  
박용규
  
1. 머리말
  
주산(珠山) 신명균(申明均,1889-1940)은 한말과 일제시대에 한글학자와 교육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일제말기 자살로 삶을 마감하였기에 그의 행적이 조명되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40년 양력 11월 20일 그는 자결(51세)하였다. 그래서 이후 그의 업적은 해방 뒤 지금까지 묻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 한글운동에 중추적 활동
  
신명균은 경성부 출신으로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자의 삶을 시작하면서 한글 연구와 보급 활동을 하였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911년 그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을 만나 한글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당시 주시경이 제자들에게 자국사상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3년 3월에서 1914년 4월까지 신명균은 조선어강습원 초등과 강사로써 활약하였다. 주시경은 국권회복의 일환으로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하였다. 신명균은 자신이 ‘선생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있다.’라고 밝혀, 스승 주시경의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하였다. 
한편, 그는 1914년에서 1922년까지 8년간 독도(뚝섬)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다. 1927년에는 보성전문학교에서도 강의하였다. 이후 1930년에서 1934년까지 동덕여고보에서 근무하면서 조선어과목을 가르쳤다. 
주시경 사후 그는 동료들과 조선어연구회, 조선어학회를 조직하여 스승의 유지를 계승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가 그의 한글 연구는 조선어연구회의 조직과 함께 맞춤법과 한자음 표기에 집중하였다. 아울러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사전편찬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조선어연구회의 월례회에 참여하였고, 한글 강연과 동인지 ??한글??을 발행하는 등 한글 보급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던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가 신명균은 조선어학회에서 한글의 통일과 보급에 중추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는 철자법 제정위원으로써 한글 맞춤법통일안 완성에 기여하였고,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하여 표준어의 제정에 도움을 주었다. 이를 위해 그는 한국 민족의 문법의 통일에 기여하고자 ??조선어문법??(1933)을 저술하였으며,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조선 민중에게 널리 소개하고자 하여 ??조선어철자법??(1934)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민족어의 규범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아울러 그도 한글강연과 강습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을 편집하고 간행하는 업적도 남겼다.
이처럼 그는 일제시대에 합법적 공간을 이용하여 한글운동이라는 문화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글운동은 우리민족의 말과 민족문자인 한글을 연구·정리·보존하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운동이었기에, 이 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이요 언어독립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신명균의 경우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한글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는 한글운동을 통해 한국민족의 문화수준을 향상시켜 일제를 타도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3. 인문사회과학 서적의 간행
  
신명균은 이중건이 경영한 중앙인서관에서 출판일을 주관하면서 수십 종의 잡지와 서적과 신문을 발행하였다. 당시 중앙인서관은 진보적인 청년들의 연락처와 집합소 역할을 하였다. 그는 청년들이 자신의 출판사에 와서 사회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환영할 정도로 청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우선 십여 종의 잡지를 창간하여 발행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검열에 걸려 차압 및 삭제된 것이 많았다.
다음으로 그는 각종 서적을 발간하였다. 첫째, 한글과 관련된 서적과 고전문학자료를 집대성하였다. 그는 ??한글역대선??(1933), ??주시경선생유고??(1933)가 그것이다. 이어서 그는 ??조선문학전집 제1권-시조집??1(1936), ??조선문학전집 제2권-가사집??(1936), ??조선문학전집 제5권-소설집??1(1936), ??조선문학전집 제6권-소설집??2(1937), ??백옥루?? 등을 이병기, 김태준과 함께 편집하였다. 그가 한국의 고전문학작품을 편찬함은 한국 민족의 문화를 영구히 보전하고자 함에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는 역사 관계 서적을 간행하고 논설을 발표하였다. ??청년상식총서1-역사편, 조선역사??(1931)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상고사, 중고사, 근세사, 최근세사로 시대구분을 하여 단군조선에서 1910년의 조선왕조 멸망까지를 서술한 통사였다. 청년들에게 조선 역사의 기초 상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제도권 교육에서 일제는 일본사만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한국의 역사책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신명균은 한국의 최근세사를 대원군의 집권 이후부터 기술하면서 을사늑약 이후 의병과 지사들의 저항을 높게 평가하였다. 민종식·최익현·임병찬·유인석 등의 의병활동을 강조하고, 스티븐스를 제거한 전명운·장인환의 의거와 이등박문을 사살(射殺)한 안중근의 의거 및 총리대신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의 의거를 자세히 기술하였다.
송병준, 이용구 등 매국노에 대해서도 신랄히 비판하였다. 또 일제의 침략과 그 매국세력에 맞서 민간인이 각성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셋째, 그는『社會主義槪論』(1931),『카프詩人集』(1931) 등과 같은 사회주의 관련 서적도 발행하였다. 
넷째, 노동자와 농민·부녀자들이 볼 수 있도록 순한글로 쓴 신문인 ??서울시보??를 1934년에 발간하였다. 주간지로 한 달에 4회 발간하였다. 이 신문의 주간(主幹)은 그와 이극로가 맡았다. 이 신문은 세계 사정과 시사와 가정 및 농촌에 유익한 기사를 순 한글로 작성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1934년 10월 20일자 ??서울시보??에 대해 출판법 위반을 적용하여 차압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이 신문은 1935년 1월 5일호까지 발간되었다.
  
  
4. 사회·청년 단체와 대종교 활동
  
대중계몽 활동과 야학교육을 지원한 사회단체인 조선교육협회와 청년단체인 대종교 청년회에 관여하였다. 그러면서 일제의 압제에 맞서 언론집회압박탄핵회와 전조선청년당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특히 신명균은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대종교 남도본사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이곳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만주에 있던 대종교총본사에서 개최된 중요한 회의에 경성대표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1924년 4월 23일에서 26일까지 4일간 만주 영고탑 대종교총본사에서 대종교 교의회(3대 교주 윤세복 주관)가 개최되었을 때, 그는 김준환, 남홍팔과 함께 조선경성 대종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교의회에 27명이 참석하였는데, 그 안건은 전교주 고(故) 김교헌과 전리 고(故) 서일에 대한 경칭(敬稱)의 건, 홍범 규칙 개정에 관한 건, 본사 간도 용정촌으로 이전에 관한 건 등이었다. 그는 이를 논의하고 귀국하였다. 물론 일제의 경찰은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신명균이 대종교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반제국주의 투쟁에 참여
  
1930년대 초반 동덕여고 교원시절에는 사회주의 운동가인 이관술과 함께 학생들의 동맹휴학투쟁을 지원해주었고, 전시파쇼체제기에는 사회주의자인 박헌영·김태준과 만나 반제투쟁을 논의하였다.
일제는 중일전쟁이후 전시파쇼체제로 들어가면서 민족운동가에 대한 대대적 탄압과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조선어 교육을 정규과정에서 폐지하고, 창씨개명까지 강요하였다. 
1940년 9월경 국문학자이며 경성제대 강사로써 경성콤그룹에 가담한 김태준이 “나는 박헌영 등과 함께 주의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고 하자, 조선어학회의 중진인 신명균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은 약소민족이고 독립을 해야 하므로 민족운동이 원칙이지만, 오늘날 여러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공산주의운동도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조선인은 자유를 주장하고 이 방면의 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해야만 된다.” 
이처럼 신명균은 민족해방운동의 근본노선에 대해 민족주의 운동이 원칙이지만, 공산주의 운동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던 것이다.
신명균의 사상 경향에 대해 사회주의 작가 홍구(洪九,1908-?)는 ‘선생은 우리와 주의나 사상이 같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젊은 사람이 품은 사상에는 반대를 아니 한다는 것보다 당연히 (사회주의 사상을:필자) 가져야 된다고 하시며, 가진 사람이 똑바른 사람이며 이 세대에 맞는 사람이며 그 사상을 버리고 무슨 사상을 가질 것이 있겠느냐’고까지 말씀하시는 것을 본적이 있다고 기술하였다. 이로써 보면 우리는 신명균이 청년들의 사회주의 사상을 인정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명균·이극로와 같은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은 일제라는 공동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을 지지하였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6. 자결로 일제에 저항
  
그렇다면 이렇게 민족운동에 정열적으로 매진한 신명균이 ‘왜 자결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 의문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제가 신명균이 이사·상무이사로 17년간 활동한 조선교육협회를 1938년 4월 2일 강제로 해산시킨 사실을 들 수 있다.
한글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어학회에 대해서도 일제는 1930년대 말엽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맹하라고 압박하였다.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조선어학회도 해산이 불가피하였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외래어표기법의 통일과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마무리 중이었다. 이 일의 완성을 위해 조선어학회는 1939년 2월 6일 임시총회를 열어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들어갔다. 조선어학회의 간판도 ‘국민총력조선어학회연맹’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간판의 교체도 용납할 수 없었던 신명균은 자결을 시도하였다.
1940년에 접어들자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같은 해 2월부터 8월 10일까지 신고하도록 다그쳤다. 조선민중의 징병·징용을 손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횡포에 항의하여 죽음을 선택한 인사도 있었다. 
결국 일제가 한국 민족의 언어와 성명을 박탈하였기에, 신명균의 비분은 말할 수 없었고, 이것이 그가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조건이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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