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국학강좌

한국의 선도사관과 유교사관
관리자 2019-11-14 10:12:09
첨부파일

한국의 선도사관과 유교사관 - 정 경 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국학과교수/국학학술원원장)

  

1. 선도서와 선도적 역사인식

한국 고대, 선도가 등장함과 동시에 역사인식 면에서도 한국사를 선도적인 역사관(선도사관仙道史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선도사서仙道史書도 등장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한국사상계에서 불교나 유교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면서 불교적인 역사인식이나 유교적인 역사인식이 새로이 등장하였다. 특히 왕조의 통치이념으로 유교의 비중이 점차 높아져가는 추세였으므로 왕실이 공식적으로 편찬하게 되는 관찬사서에서 유교적 역사인식의 영향이 점차 강해져 갔다. 이에 따라 고려 중엽에 이르러『삼국사기三國史記』와 같은 전형적 유교사서도 등장하게 되었다. 

유교사관이 확립되고 관찬사서의 공식적 입장이 되면서, 유교사관과 대척적인 입장에 서있던 선도사관은 점차 비주류적인 역사인식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왕조시대 사서 편찬의 주역이 왕실이었다는 역사적 조건하에서 선도사관이 양성화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대 조건하에서 고대 이래의 선도사서들은 점차 민간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선도사서가 민간으로 흘러들면서 그 보존 여건이 더욱 열악해지게 되었고, 많은 선도사서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유교를 국시화國是化한 조선에 이르러 선도사서는 더욱 기휘忌諱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조선초 왕실이 선도관련 기록들을 수차례 수거하였던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한국 고대의 선도적 역사인식에 입각한 선도사서들은 적지 않았을 것인테, 지금 전해지고 있지는 않지만『삼국사기』중에 최치원이 인용하고 있는『선사仙史』와 같은 책자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많은 선도사서들은 후대에 ‘단군고기檀君古記’, ‘고기古記’, ‘잡기雜記’ 등으로 불리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편찬시에 이러한 종류의 책자들이 널리 참조되었다. 

고려초의 선도사서로는『신지비사神誌秘史』,『단군기檀君記』,『조대기朝代記』, 『구삼국사舊三國史』등이 있었다. 『구삼국사』의 경우 작자와 편찬연대가 불명확하고 현재까지 전하고 있지 않지만〈단군본기檀君本紀〉와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 등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 중엽에 유교사서인『삼국사기』가 편찬되기 이전에 이와 전혀 다른 역사인식을 보이고 있던 대표적인 선도사서로 이해된다. 

고려말에는 이명李茗(생몰년 미상)의『진역유기震域遺記』, 이암李嵒(1297~1364)의『단군세기檀君世紀』 등이 나왔다. 이외에도 전형적인 선도사서는 아니지만 고려말 이규보李奎報의『동명왕편東明王篇』이나 이승휴李承休의『제왕운기帝王韻紀』도 있다. 이들은『구삼국사』의 영향으로 단군과 동명왕을 같은 혈족관계로 인식하고 천손天孫의 후예로 보는 등 고조선-고구려의 계통을 강조하였다. 전형적 선도사서는 아니지만 선도적인 역사인식이 배어 있는 사서로 평할 수 있다. 

조선의 선도사서로는『태백일사』및『규원사화』가 가장 저명하다. 그리고 선도사서는 아니지만, 한국의 선맥을 짚어 내고 있는 선도서로 『청학집靑鶴集』,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 『백악총설白岳叢說』,『해동이적海東異蹟』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선도적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는 전형적인 선도사서인『태백일사太白逸史』와『규원사화揆園史話』, 선맥을 짚어 내고 있는 선도서인『청학집靑鶴集』,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 『백악총설白岳叢說』, 『해동이적海東異蹟』등이 있다. 

대체로 선도사서에서는 한국 고대사를 한국桓國-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고조선古朝鮮 계통으로 인식하였으며 이 전통이 다시 고구려高句麗-발해渤海와 같은 북방국가 계통을 중심으로 계승된 것으로 보았다. 또 이러한 역사의 중심에는 선도가 놓여 있었으며 중국의 도가道家나 도교道敎는 선도에서 파생되어 나온 지류일 뿐으로 보았다. 단, 선도서仙道書 중에는 선맥仙脈을 한인桓因이나 단군 계통으로 잡으면서도 통일신라 이후에는 선도의 선맥과 중국 도교의 도맥道脈을 뒤섞어 놓은 경우가 있었다. 통일신라 이후 중국의 도교가 도입, 국내에서도 도맥이 생겨나면서 선맥과 도맥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선도에 대한 이해 정도가 갈수록 취약해지면서 선도와 도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2. 성리학적 역사인식과 선도

유교조선의 개창세력은 기성의 구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면서 이를 위한 새로운 시대 이념으로서 성리학을 도입하였다. 성리학이 국가의 공식적인 통치이념, 곧 ‘국시國是’가 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성리학의 영향력은 강화되어갔다. 성리학은 한당유학이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보강하면서 경신된 유학의 일경향이었다.

여타의 사상에 비해 유학은 특히 현상(정)을 중시한 사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분리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러한 성향의 연장선상에서 여타 사상을 이단시하였는데, 유학의 한 성향으로 ‘벽이단론闢異端論’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이에 따라 성리학을 제외한 여타의 사상이 이단으로 배척되면서 선도의 위상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우선 역사인식 면에서 조선왕실이 공식적으로 성리학적 역사인식을 표방하게 되면서 이와 대척적인 위치에 있던 선도적 역사인식은 저류화되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역사인식은 3계열, 곧 이념적 성리학자 계열·실용적 성리학자 계열·회통적 성리학자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념적 성리학자’ 계열은 성리학적 역사인식에 가장 철저한 계열로서, 한국사의 중심에 유교를 두고 한국 최초로 유교적 교화를 펼친 것으로 이해된 기자의 계승국가를 중심으로 한국사의 정통을 설정하였다. 곧 기자-마한馬韓-신라新羅 중심의 역사인식을 보였다. 이들은 선도나 선도적 역사인식에 극히 부정적이었다. 

‘실용적 성리학자’ 계열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의리론義理論에 얽매이지 않고 공리功利에도 많은 관심을 보인 실용적인 입장의 유학자군이었다. 한국 고대사를 선도라는 사상·문화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정치·경제의 관점으로 접근, 고조선·부여·고구려를 방대한 영토를 지닌 부국강병한 국가로 그려 내었다. ‘회통적 성리학자’ 계열은 성리학을 기본교양으로 하면서도 상대화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계열로서 성리학 이외의 다양한 사상들을 회통하려는 인식을 보였고, 따라서 선도나 선도적 역사인식도 상대적인 사상이나 역사인식으로 인정, 기록하는 태도를 보였다.

  

3. 선도사관과 유교사관의 상징: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위상 역전

조선시대 성리학적 역사인식이 보편화됨으로써 기자의 위상이 극히 높아지고 단군의 위상은 하락하였다. 선도적 역사인식에서 단군은 고조선의 시조이자 ‘선도성인(삼성, 三聖)’ 중의 일위一位로 인식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삼성에서 분리되어 향사되기 시작하였으며 ‘선도성인’에서 ‘민족시조’로 그 의미가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전글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정치이론과 단군민족주의
다음글 2025년 제4회 국학강좌(2025. 5. 30), <읍루-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