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의 의미규정

  기존의 연구와 같이 국학의 정의를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양상과 이 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체의 사상체계, 또는 학문의 지역적 대상을 한국으로 하고 그 중에서도 한국의 인문 사회과학에 속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개념화시킨다면, 정체성과 차별성 그리고 연속성을 모두 충족시키기에는 막연한 감이 있고 주변문화의 아류 또는 패러디라는 멍에를 결코 벗을 수 없다고 본다.

  일찍이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한국문화를 중국문화의 변방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가령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8년에 발간된 그의 책에서, 한국의 문학이나 교육체계 조상숭배 등 문화적 사유 양식이 모두 중국적 성격으로, ‘중국문화의 패러디'라고 규정하고 있고,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뒤, 라이샤워와 페어뱅크가 공저한 책(1960년 발간)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문화를 중국문화의 종속으로 단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 문화의 정체성이 역사가 흐르면서 오히려 퇴색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로, 세계화 시대 속에서 우리 국학의 위상 정립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일깨워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학의 의미규정을 새롭게 정제시킴으로써 진정한 국학연구의 틀을 잡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순수국학 개념화에 대한 주장이 일본과 같이 폐쇄적 혹은 국수적인 국학정립을 외치려는 것이 아니다. 순수국학의 의미를 올바로 세움으로써, 포괄적 국학의 의미와 함께 향후 세계화를 위한 창조적 국학의 정립도 가능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찍이 백수 정열모도 국어 국사 연구를 중심으로 한 발전적 국학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개진한 바 있다.

  “國學이라 하면 얼른 國語 國史를 硏究하는 것으로 알지마는 실상은 國語 國史는 國學硏究의 基礎가 되고 入門이 되는 것이지 國語 國史가 國學의 全體는 아니다. 政治 文化 工藝 심지어 衣服 飮食까지 모두 民族思想의 發露이기 때문에 그 모두가 國學硏究의 對象이 되는 것이다.…(중략)…國學硏究하는 것은 다만 옛 것을 찾자는 것이 目的이 아니라 옛 것을 알아서 새 길을 찾고 아름다이 하려는 것이 目的인 것이다.”


  즉 국학이란 민족사상의 발로로써, 국어와 국사를 기초로 하여 민족문화 전반을 포괄하는 학문이라는 것과, 과거의 연구를 토대로 미래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온고지신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 나라를 알고 세계 각국의 민족을 이해하는 것도,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눈여겨 보아온 우리나라와, 같은 겨레로서 정서적 동질감을 느끼며 더불어 살아온 배달민족을 준거로 삼을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또한 세계의 중심에 우리나라를 두고 인류의 가운데에다 우리 민족을 설정했을 때,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인식 또는 인류 이해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국학의 시?공간적 범주의 제약은 정태적일 때 한계로 작용할 수 있지만, 이를 발전적으로 확대해 나갈 때는 오히려 생산적 의미로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에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순수국학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앞서, 먼저 ‘국학(國學)'이라는 단어에 나타나는 ‘국'의 의미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국학'이라는 말은 ‘국(國)'과 ‘학(學)'의 합성어로써, ‘국'이란 정체성을 내포한 국가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의 국가란, 조직체나 지역단체 혹은 통치권력단체나 최고단체로서의 의미보다는, 영구적 단체라는 성격과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영구적 단체로서의 국가란, 단순히 현재의 국민뿐만이 아니라 선조(先祖)의 생명을 받고 후대 자손에게 그 생명을 전할 국민 전체의 결합으로 구성되는 통일체이며, 그 구성분자인 각 개인의 생명과는 다른 영구적 생활체를 영위하면서 독자적 목적과 의사를 갖는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국학을 우리의 민족사를 관통?통섭하는 학문으로서의 고구려학?백제학?신라학?발해학 나아가서는 고려학?조선학을 시대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학문이 되는 동시에, 공시적으로는 체제분단적인 학문, 즉 남쪽의 한국학이나 북쪽의 조선학을 아우를 수 있는 통합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국학의 개념을 도출해 내는데 있어 국문학의 개념 설정을 원용해 보는 것도 방법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 국문학 의미 규정에 있어 순수국어와 한문의 혼재는, 순수국학과 광범한 국학의 의미 접경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문학의 개념 범주를 논함에 있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가 항상 문제가 되어 왔는데, 일찍이 가람 이병기가 우리 국문학의 개념을 정의할 때에도 순수한 조선문학과 광범한 조선문학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한 바 있다.


  “純粹한 朝鮮文學이란 朝鮮人이 朝鮮 말과 글로 쓴 純粹한 文學作品(詩歌?小說?戱曲 等)을, 廣範한 朝鮮文學이란 朝鮮人이 朝鮮 말로 쓴 廣範한 文學作品(日記?紀行?書簡?傳記?傳說?說話?雜錄 等) 또는 朝鮮人이 다른 나라말로 쓴 純粹한 文學作品과 廣範한 文學作品이다.”


   이러한 구분은 국학의 개념 정리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즉 뒤에서 언급할 사상적 공간적 시간적 요소들을 고루 갖춘 국학을 순수국학의 의미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광범한 의미에서의 국학은 외래적인 종교 사상 문화 풍습 언어 제도 등, 우리 순수국학의 줄기에 습합되어 자리잡은 모든 사상(事象)을 포함한 것으로 대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안재홍이 협의(狹義)의 조선학을 ‘조선에 고유한 것, 조선문화의 특색, 조선의 전통을 천명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개념화한 것도 이러한 순수국학과 흡사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소와 주변 정황을 통해 우리의 순수국학의 개념을 간추려 보면, 순수국학이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줄기로 하여 우리 민족사에 연면히 이어온 문(文)?사(史)?철(哲)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주변에서는 국학의 범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자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다양화?다지화(多枝化)된 지금의 학문구조 속에서 구태여 문 사 철을 고집한다는 자체가 국학의 자폐성을 높일 수 있다는 염려도 해 볼만 하다. 그러나 인문과학은 사고의 학문으로써 전환을 선도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중심에 문?사?철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