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국학개념

  일반적으로 국학이란 우리나라와 관련된 총체적 학문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역사 현상 속에 녹아 내려온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예술?민속 등, 우리 민족의 모든 사상(事象)이 배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국학은 다른 나라의 학문과 구별되는 특성으로, 정체성과 독창성을 존립 기반으로 한다. 국학이라는 명칭 속에는 이미 상대적 가치 규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의 국학을 한국학과 같은 개념으로 부르게 되면서 양학(洋學) 또는 외국학과 구별하기 어려워, 양자의 경계를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는 주장과 함께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국학의 정립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학이라는 의미 규정을 올바로 정립하지도 않은 현 시점에서는 쉽게 공감만 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것은 학자에 따라 국학과 한국학을 구별하면서, 국학이 문(文)?사(史)?철(哲)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전근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면, 한국학은 해방 후 사회과학을 중심으로 우리의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간주하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학과 한국학을 같은 의미로 혼용하는 경우라도, 국학에 비하여 한국학이라는 명칭이 체제 분단적인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국학은 시간적으로 현재와 미래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가치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속성과, 공간적으로도 국학의 분류 근거가 존재론적이 아니라 지역적 분류에 근거한 차별성을 우선하는 학문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더욱이 동시대의 사회 현실을 직접 다룬다고 하여 역사와 전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인류의 보편적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주목한다 해서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제쳐놓을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국학에 대한 편견도 기우일 수 있다. 오히려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알아야 동시대의 현실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출발해야 세계와 인류의 문제를 포착할 수 있다는 의견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기존의 연구 속에서 나타나는 국학의 상한(上限)은 삼국시대를 넘지 못한 상태다. 이만열은 국학의 흐름을 태동기와 성립기 그리고 발전기로 삼분하고 있다. 먼저 그는 삼국시대 자기의 역사를 남기려는 작업에서 국학적인 의식의 태동기를 찾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나타나는 역사기록의 의식과 신라 김대문의 저술 속에 농축된 자국문화의식, 그리고 최치원의 국학적 삶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원효와 고려의 지눌 사상에서도 우리 식의 깨달음과 사유가 숨어 있고 도선의 도참설이나 김위제의 신지비사 인용, 유교세력에 반기를 들고 정금론(征金論)과 서경천도를 주장했던 묘청, 대장경조판과 7대 실록의 완성, 특히 몽고 침략의 위기 속에 나타난 일연의『삼국유사 』 와 이승휴의『제왕운기 』 , 그리고 이규보의『동명왕편』등에 나타나는 자주의식은 조선 초기 국학을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다음으로 그는 국학의 성립기를 조선 초기의 새로운 문화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조선 초 민족문화가 흥왕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몽고침략으로 성숙된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문화의식, 고려후기에 성장한 민중세력의 관심, 원(元)나라를 통해 수용한 세계문화의 자극이라고 말한다. 또한 국학 성립기의 중심에 역시 세종의 한글창제를 놓고 있다. 이것은 황원구가 훈민정음창제를 국학의 태동기로 간주한 것과는 차이가 있지마는, 훈민정음에 나타나는 민족국가의식?애민의식?문화주의적 동기가 국학의 성립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주적이고 국학적인 분위기는 조선 전기 문화계 전반을 풍미하는데, 인문학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문학, 인문지리를 정리하는데서 두드러지고 사서의 편찬과 각종 문화유산의 보존 그리고 과학기기 등의 발명 등에 찾을 수 있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시대를 그는 국학의 발전기로 지칭하면서, 임란(壬亂)?호란(胡亂) 이후의 새로운 의식의 대두와 주자학에 대한 반성, 고증학과 서학(西學)의 수용을 그 주요 배경으로 꼽았다. 특히 사상적으로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으로 인한 화이관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와 원심적인 자기인식에 경도된 주자학이 퇴조하고 구심적인 자아의 발견을 강조하는 양명학이 대두됨으로써, 국학의 자아인식이 한층 더 고조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흔히 국학을 논하는 학자들이 실학시대를 주목하는 것도 이러한 판단과 연결된다. 이 시기에는 자아의식의 성장을 토대로 역사학을 비롯하여 고전정리?어문학?철학?지리학?의학?농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학문적이 업적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실학시대를 우리의 학문사 내지는 문화사에서 일종의 문예부흥기와도 같은 시기로도 보고, 우리의 정신사적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최후를 장식하는 변혁기라고도 평가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역사학 분야에서는 강목체의 서술로 정통론(正統論)에 입각하여 씌어진 안정복의『동사강목 』 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변화된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 정통론을 극복하는 사서로 이긍익의『연려실기술 』 , 그리고 한치윤의『해동역사 』 를 꼽힌다. 특히 소론계의 이종휘는 단군의 계보가 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는 ‘부여-고구려 정통론'을 내세움으로 처음으로 대륙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더욱이 유득공의『발해고 』 를 효시로 나타난 발해에 대한 관심은, 여러 역사지리서의 등장과 함께 대륙사관적 역사인식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실학의 위와 같은 역사서술이 유교사학의 상고사 인식체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사학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동이문화를 유교 중심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동이문화를 신교(神敎) 중심의 문화로 파악하려는 도가사학(道家史學) 또는 신교사관(神敎史觀)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또한 이 시기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관심도 자아의식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석정의『경세훈민정음도설 』 과 신경준의『훈민정음운해 』 , 그리고 유희의『언문지』등이 그것인데, 후일 최초의 국문(國文)이라는 명칭과 함께 순 한글표기와 띄어쓰기 시행, 병서 등을 주장하면서 만들어진 이봉운의『국문정리 』 로 연결되는 것이다.

  조동일은 19세기 초, 임성주와 홍대용의 학문을 계승한 최한기의 학풍을 높이 평가했다. 최한기의『기측체의(氣測體義) 』 에 나타나는 ‘신기통(神氣通)'과 ‘추측록(推測錄)'의 주체적 논리에 주목한 것이다. 특히「학지소구부동(學之所求不同) 」 과「제학지폐(諸學之幣)」그리고「고금학문변천(古今學問變遷)」등에서 언급한 운화학(運化學 혹은 氣學)이라는 독특한 논리로, 기존의 허무학(虛無學)이나 성실학(成實學)을 극복하려던 의지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한 것이다.

  아무튼 실학의 연구방향은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당면한 문제들과 현실개혁을 위한 사회경제적 문제, 나아가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의 연구와 함께 새로운 철학에 대해서도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실학이 국학이라는 명칭에 부합될 수 있었던 근거는, 한계성이나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것과 함께 근대지향적 성격과 민중사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요 이론이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더욱이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실학에 있어서 실제성의 판단은 모름지기 이 민족과 국가를 어떻게 위하는가의 여부로부터 내려진다는 지적과 함께, 실학이 지향하였던 ‘실제성의 기준'이 어디까지나 ‘나'를 감싸고 있는 ‘이 민족'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한편 기존의 연구는 국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그 개념이 정립된 시기를 1930년대로 잡고 있다. 물론 이것은 신라 신문왕 때와 고려 성종 당시 설치된 ‘교육기관으로서의 국학'과는 무관한 것으로, 일제의 침략과 통치기를 지나면서 한국적인 것이 말살되어 갈 위기에 처하자, 일부학자들이 한국적인 것을 되찾아 이를 살려 나가고자 하는 학문적 분위기에서 나타났다. 그 당시는 국권을 상실한 때였으므로, 그러한 분위기의 학문을 한국의 칭호인 조선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조선학' 혹은 ‘국학'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풍은 한말부터 광복 무렵까지 애국적 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현실 비판에서 민족사의 바른 이해를 도모했고, 민족의 역사 속에서 한국의 빛을 재발견코자 노력하였는가 하면, 말과 글을 선양?발전시켜 민족혼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시대의 고전을 해설하면서 정인보가 처음으로 국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황원구는 정인보 등이 조선 후기 실학파의 학문과 사상 속에서 의도적으로 개척된 탈중국적인 사상의 흐름을 국학의 계보로 파악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정인보가 실학시대의 고전을 해설하면서 사용한 이러한 국학 개념을 그대로 차용해서 의미 규정을 한 것이다. 이것은 실학이라는 용어가 조선 후기 당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이 명명해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학이라는 용어도 조선 후기 당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현금에는 국학이라는 개념 용어로써 의미를 넓혀 온 것과 같은 논리다. 더욱이 해방 후 정인보가, 대종교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새로운 체제의 대학을 서대문 밖에 설립할 당시, 국학대학(國學大學)이라는 교명(校名)을 지었다는 기록도 정인보와 국학의 관계를 한층 깊게 해 주었다.

  그러나 정인보는 1930년대를 풍미하던 조선학을 진정한 국학으로 보지 않았다. 조선 유학의 고질인 사대주의와 개화기 이후 서학을 수용함에 있어 나타나는 몰 민족적 자세를 비판했던 것이다. 특히 실증사학의 표방으로 1934년에 발족된 진단학회의 학풍을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도피적 사학으로 간주했다. 즉 우리들의 마음, 실심에 기초한 학문이 없고 남의 마음, 허심(虛心)에 근거한 국학을 비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