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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10-06-30 15:20:29 조 회 수 1302
제 목 목단강의 뱃노래
내 용

목단강의 뱃노래

 

 

목단강,

그 곳에 가는 물에는

예순 여섯 황혼녘에 뒈진

박달몽(朴達夢)의 노래가 있다.

 

어-으 어으히 내 님이여

어-아 어으히 꿈에 보세.

 

어-으 어으히 내 자식아

어-아 어으히 꿈에 보세.

 

노비의 자식으로

도망치듯 건너와

군정서의 졸병으로 허벌나게 고생한

근본 없는 불령선인의 노래라 한다.

 

장백현 우거진 숲으로

군막을 옮길 때

좁쌀죽 한 종지에 뱃가죽 늘려 놓고

들고 이고 지고 끌며

행군한 노래라 한다.

 

북간도의 9월

별 보이는 차운 밤에

우둥불 둘러 앉아

조국 찾자 울부짖고

구운 감자 곱씹으며

고향 찾자 맹세한 노래라 한다.

 

일본군 동지대(東支隊)의

지랄같은 추격 속에

청산리 협곡에서

싸우다 죽자하던 죽음의 노래라 한다.

 

군화 벗겨져 맨발로 뛰며

네가 내냐 내가 네냐

 

초연 덮힌 암흑을 뚫고

해 뜨자 살아남은 낙오병의 노래라 한다.

 

미친 하이에나

나카노[中野淸助]와 장강호(長江好)가

찍고 찢고 패고 태워 죽인

경신년 그 학살을 피해

목단강에 은거한 도망의 노래라 한다.

 

됫박술 몇 사발에

한 삭히며 만난 여인

가진 것 없네

해줄 것 없어

그냥 그렇게 장가 들어

애새끼 낳고 살던

더럽게 애끓는 노래라 한다.

 

건너온 강은 두만강 상류

마누라는 목단강 주막거리의 작부란 얘기

실없이 낳고 또 낳은 세 아들

의용군에 자원해 간 뒤

소식 두절 흘러간 세월 만 삼년

마누라는 미쳐 나가

북망에 머문다는 패가의 노래라 한다.

 

목단강,

그 곳에 가는 물에는

응얼로 죽을 수 없어 뒈진

황천에 돌아갈 수 없어 뒈져간

예순 여섯 박달몽의 노래가 흐른다.

 

어-으 어으히 내 님이여

어-아 어으히 꿈에 보세.

 

어-으 어으히 내 자식아

어-아 어으히 꿈에 보세.

 

 

누군들 행복을 꿈꾸지 않으리오. 누군들 불행을 좋아할까. 허나, 행복이 꿈 꾼다고 올 건가. 불행이 싫다 해서 떠나리오. 그저 행복했으면 하고 비는 마음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불행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 중, 일제의 질곡기를 소용돌이친 인간들 만큼 불행했던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시대를 행복했던 시기로 여기며 살던 주구(走狗-독립군들은 일제의 앞잡이들을 이렇게 불렀다)들도 있었겠지만, 뒤집힌 세상에서 거꾸로 서지 않고서야 납득할 수 없는 행복 아닌가.

 

일제가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불렀던 우리 독립군. 그 중에서도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의 행로야말로, 죽어서도 잊혀져 버린 애끓는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시의 주인공 박달몽(朴達夢)은, 대한제국 박달도 박달군 박달면 박달동 출신의 아무개다. 천출로 태어나 기구하게 살다가, 개처럼 널부러져 뒈진 무명독립투사의 대유물이다. 잘난 사람들에게 서훈(敍勳)되는 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대통령표창 등등의 공치사 하나 없이, 그저 만주벌 어느 곳에 수목의 거름으로 썩어 버렸을 하얀 백골에게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박달몽이 찾은 곳은 북로군정서다. 백포 서일 총재의 훈령도 듣고 백야 김좌진 사령관의 격려도 받았을 테지. 그리고 똥줄 타게 굴렀을 게다. 새벽에 일어나 밤늦도록 공부하고 훈련하며 부역도 행했으리.

1920년 8월, 일제의 강요에 의한 중국관헌의 개입으로 북로군정서의 주력군은 백두산 기슭 깊은 곳으로 부대 이동을 떠났다. 그 해 9월, 뒤쫓아 오던 일본군 아즈마지대(東支隊)와 충돌하여 죽자 살자 벌인 싸움이 바로 청산리독립전쟁이다.

 

청산리 백운평에서 처음 싸움이 나던 날 새벽, 교성대장 이범석은 북로군정서의 학생대를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

 

“청산리 산맥은 백두산의 주맥(主脈)이요, 우리 조상의 발상지이다. 지금 이 순간 수천 수만의 눈동자가 우리를 주시할 것이요, 무수한 자손의 눈동자도 또한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들의 혈관 속에 아직도 단군의 피가 말라붙지 않았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한 몸 희생의 제단에 올려놓고 삼천만 동포의 원한을 풀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용감히 싸울 때 하늘에 계신 천백 세 조상의 영은 반드시 우리를 보우할 것이다.”(철기 이범석의 자서전 <<우둥불>>에서)

 

박달몽도 들었으리라. 그리고 싸웠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 점심나절까지 이어졌고, 점심부터 저녁까지는 자기들끼리(일본군이 서로 적인 줄 알고 싸움) 총질을 하고 난리가 났다. 포화 속에 널부러졌던 박달몽이 깨어났다. 뒈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박달몽의 부대(북로군정서)는 이미 갑산촌으로 떠났으니….

 

3천여 명의 사상자라는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장교 나카노와 마적 장강호를 더욱 부추켜 살인기계로 내몰았다. 노인들도 죽이고 아낙들도 죽이고 아이들까지…. 잘나 죽이고 찍어 죽이고 쏘아 죽이고 패 죽이고 묻어 죽이고 독가스로 죽이고…. 청산리전투의 치욕을 분풀이라도 하듯 미치고 환장했다.

 

낙오병 박달몽이 도망가듯 흘러들어 간 곳은 목당강가다. 여기서 만난 여인 배달춘(倍達春)이란 여인과 살림도 차렸다. 배달춘 역시 대한제국 배달도 배달군 배달면 배달동에서 가족들과 넘어 왔으나, 마적들에게 끌려가 술집 작부로 넘겨진 여자라 했다.

 

연년생으로 낳은 큰 아들 인(因)이와 둘째 아들 웅(雄)이, 그리고 셋째 아들 검(儉)이을 두고 한 때는 달란했다. 독립을 위하여 의용대에 자원한 자식들 소식 끊기고, 미쳐 나간 마누라는 죽었다는 얘기 들리니….

 

박달몽은 절규했다. 그리고 좌절했다. 그리고 넋 나간 사람으로 목단강가를 배회하며 노래 부르니, “어-으 어으히 내 님이여 / 어-아 어으히 꿈에 보세 / 어-으 어으히 내 자식아 / 어-아 어으히 꿈에 보세”

 

그리고 박달몽은 뒈졌다. 해방 한 해 전, 경박호[鏡泊湖]에서 뒈졌다. 돌아갈 수 없을 만큼 한이 많아서, 죽을 수 없을 만큼 짐이 많아서…. 그래 뒈지기라도 해야지, 무엇이 되든 간에 뒈져야 고향갈 거다.

 

박달몽의 꿈은 지금도 꺼지지 않았으리. 그러나 그에게 조국사랑은 너무나 벅찬 짐이 아니었을까. 그에게 광복이란 게 어떤 의미로 맴돌았을까. 자식 하나 거두지 못한 못난 아비로서의 꿈, 마누라 하나 지키지 못한 나약한 남편으로서의 꿈….

 

그 꿈을 실현시킬 꿈을 자식들이 또 품고 간 것은 아닐는지

 

 

   파일:푸른 언덕_1.jpg(27.85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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