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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09-01-24 12:25:41 조 회 수 1615
제 목 삼문일답
내 용
 

삼문일답(三問一答) 


김새갈․시인


() () () () () () ()   번사(繁事)로 찾아가니 그대 마음 안다 하네

() () () () () () ()   고요한 수도실엔 햇빛도 넘흘러라

() () () () () () ()   나는 본시 미혹함 없어 한 뜻을 품었다 하며

() () () () () () ()   자네 비로소 거리 허물고 세뜻을 정했다 짚으니

() () () () () () ()   철리(哲理)는 깨달음을 타고난 듯 밝은 사람

() () () () () () ()   명성도 헛됨 없이 소문과 하나 같다

() () () () () () ()   평생을 헷갈리며 반신반의했건만

() () () () () () ()   힘써 깨달으니 날은 이미 어스름


                         [백포 서일의《삼문일답(三問一答)에 나오는 수행시 중에서]



만난다는 것은 일을 낸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기도 하고 꽃다운 사랑을 속삭이기도 한다.

때로는 의기투합으로 열매 맺는가 하면 치열한 싸움으로 등을 지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 근대사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무엇일까.

일지당(一之堂) 나철과 삼혜당(三兮堂) 서일의 만남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 한 순간의 만남으로 철리(哲理)를 주고받는 역사를 만들었기 때문이요,

찰나의 인연으로 죽음을 같이 하는 사제(師弟)가 되었기 때문이다.

 

백포 서일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지도자다. 현대 학문과 역학에 통달한 문인이면서,

천문(天文)과 인시(人時)를 꿰뚫은 무인이었다. 특히 서일은 삼일(三一)의 원리야말로

백봉신사(白峯神師)께서 홍암신형(弘巖神兄-나철을 말함)에게 전하여 준 것임을 밝히면서,

“나처럼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다행스럽게도 홍암신형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음에 감격한다

고백도 한 인물이다.

칠언율시(七言律詩)로 된 위의 수행시는 글자 뜻대로 읽어보고 납득하기엔 너무 난해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배경을 이해한다면,‘아하, 그렇구나!하고 납득할 것이다.

 

1911년 7월 어느 날, 서일은 평소 소문으로만 듣던 한 인물을 찾아 나섰다.

만주 화룡현 청파호의 고경각(古經閣-대종교 교주의 집무처이자 수도실) 주인이던

나철을 찾아간 것이다. 때는 햇볕이 한창인 점심 나절,

나철은 서일을 보자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한눈에 직감했다.

그리고 나철은 말한다.

 

“나는 이미‘한 뜻을 품고(惟一意)’미혹함이 없는데,

그대 역시‘세 뜻을 정하고(莫三思)’이 곳에 왔구려.

 

순간 서일은 놀랬다. 나철의 통찰에 감복한 것이다.

서일은 생각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하늘이 낸 이론가요

세간의 명성과 추호의 간극이 없다는 것을.

 

서일은 또 생각했다.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와 번민으로

점철된 나날이 아니었던가. 무너진 조국을 재건하겠다는 일념만을 품고 세간의 번사로 고민하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나철과의 수많은 수작(酬酌)을 통하여 서일은 깨닫게 된다.

가달[妄]의 허울을 벗어버리는 이치가 바로 삼일철학(三一哲學)이라는 것을.

번사의 수렁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바로 삼일이치(三一理致)라는 것을.

그 희열에 잠기고 보니 이미 날은 저물어 갔다.

 

서일의《삼문일답은 바로 이 한시에 나오는 순간의 희열을 옮겨 놓은 것이다.

일의자(一意子)인 나철로부터 삼사생(三思生)인 서일이,

대화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어가는 글, 그것이 바로《삼문일답이다.

 

서일이 당호(堂號)를 지음에도, 스승 나철의 당호인 일지당(一之堂)을 이어

삼혜당(三兮堂)이라 명명함도 이러한 깨달음의 뜻이 있음이라.

 

한국 근대 철학의 자존심이라 할, 서일의《회삼경(會三經)

또한 이러한 희열의 결정체일 것이다. 서일의《구변도설》《진리도설》

《오대종지강연과 같은 연구물 역시, 같은 깨달음의 열매 아니고 무엇이랴.

 

어디 그 뿐인가. 스승의 뜻을 계승한 명칭인

중광단(重光團-대종교의‘중광에서 차용한 명칭)을 발전시켜

북로군정서를 일궈낸 것도 이 정신의 결실이었다.

당대 북로군정서에 속하는 맹장들-현천묵,김좌진,계화,정신,

박영희,나중소,윤정현,이범석 등-의 정신에도, 이러한 희열의 의기가 숨 쉬고 있었다.

 

그러므로 청산리 전쟁의 승리,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범석이 읊조린

 

“한배님 우리들은 이후에라도 / 천만대 후손들의 행복을 위해 /

이 한 몸 깨끗이 바치겠으니 / 성결한 전사를 하게 하소서라는 각오는,

서일의 희열, 바로 그것과 연결된다.


1921년 8월 27일, 서일은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한국철학사에 위대한 자취만을 남겨 둔 채,

한국독립운동사에 찬란한 업적들을 뒤로 한 채, 그의 스승 나철이 남긴

다음과 같은 유언을 다시금 유언으로 남기면서…….

 

 “굿것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니

하늘,땅의 정기 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가니 사람,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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