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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07-08-08 오후 4:32:14 조 회 수 2163
제 목 대동고대사론
내 용
백암 박은식 지음/단애 윤세복 교열

이동보 옮김(대종교인)

민족이 있은 다음에야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없으면 민족 또한 없다고 하니 어찌된 이유인가? 곧 역사란 것은 민족의 정신으로, 조국의 역사가 있게 된 다음이라야 애국하는 정신이 있게 되고 동족의 역사가 있게 된 다음이라야 애족하는 정신이 있게 되며 독립의 역사가 있게 된 다음이라야 독립하는 정신이 있게 되고 자존의 역사가 있게 된 다음이라야 자존하는 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민족은 반드시 신성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민족이 역사의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애국․애족하는 정신이 없어지게 되고, 독립․자존하려는 정신이 없어지면 각 민족이 경쟁하는 곳에서 자존마저 불가능해 진다. 요행히 존속을 얻었다 하더라도 노예의 천한 종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곧 타종족에게 동화되고 만다. 그러므로 역사가 없으면 민족도 없다고 하니 그 관계됨이 과연 이 같지 않을까?
옛사람들의 사상 정도는 가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까닭에 그 역사 정도는 제왕의 한 집안 가보에 그쳤을 뿐이요, 개인 그 평생의 행적을 기록함에 그쳤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다만 집안의 조상이 계심을 알 뿐이요 나라의 조상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고, 다만 가족이 있음을 알 뿐이요 민족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물며 고대에 국가 간의 경쟁에는 비록 형제 사이라도 친히 속해 있는 나라이면 다투는 원한은 적었다. 따라서 등져 버리거나 먼저 좋아하며, 서로 어그러져서 원수 같이도 보고, 서로 다른 나라를 병탄함에 개의치 않은 것이다. 이 같은 시기에 어찌 이른바 동족주의가 있었겠는가? 이는 세계 각국이 같은 수레바퀴를 따라감과 같은 것이다.
천지의 진화가 날로 새로워지니 인간 지혜의 진보도 날로 더하여져, 가족주의가 진보하여 민족주의가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민족경쟁의 시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미 남과의 맞경쟁이 있게 되니, 동족끼리 서로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고 동족끼리 도움을 구하려 하니 나의 태어나 본원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혈통의 관련을 밝혀서 그 친애(親愛)의 정서적 뿌리를 펴게 하였으니, 이는 지금의 각 민족들이 모두 발달하여 그 조상의 역사로 자강과 자주의 정신으로 삼고, 남과 대적하는 경쟁의 힘으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이제는 무릇 중국의 한족(漢族)도 일찍이 춘추시대에 있어서는 이른바 후속(後屬)이라 하여 성글고 멀게 되어 서로 공격하며 원수같이 하였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 목소리로 크게 외치면서 우리는 신성한 황제의 후손이요 모두 다 형제라고 말하고, 남에게 대적하려는 정신으로 나타나 이 같은 민족주의의 분명한 외침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함에도 오직 우리 대동민족만은 홀로 이와 같은 주의의 제창이 없으니, 이 어찌 옳다 하겠는가? 아! 우리 대동민족은 사천 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니, 사천 년 역사의 할아버지는 그 누구셨던가?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하늘에서 한얼사람이 내려 오셨으니 우리 시조님 아니었던가? 무릇 옛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으며, 만주와 우리 대한은 원래 한 나라요 그 백성은 본디 처음부터 같은 종족이며, 모두 다 단조의 신성한 후손이었다. 다만 갈라진 지가 이미 멀어져 나뉘어 떨어짐이 매우 오래 되었고, 압록강 일대는 마침내 연나라와 월나라 같이 멀게 느껴짐이 이미 천 여 년이 되었으나, 오늘날은 곧 민족주의 시대인 것이다. 우리들도 마땅히 그 동족의 족의(族誼)를 밝히어 발휘하고 그 신성한 역사를 찾아야만 천하에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정신교육의 근본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유래한 바에는 두 갈래의 설(說)이 있어 왔으니, 단조께서 백두산에 내리심으로부터 비롯하여 대동(大東)의 백성이 처음 생긴 것이라고도 하고 기자가 중국 땅으로부터 화인(華人)을 옮겨온 처음이 곧 우리 민족 전체의 뜻이라고도 하였으니, 첫 할아버지는 단조가 옳단 말인가? 기자가 옳단 말인가? 무릇 세계는 어디를 막론하고, 그 민족이 어떤 종족인가 하며 스스로 본토에서 발생한 이들이라고도 하며 다른 곳으로부터 옮겨와서 살게된 이들이라고도 하여 그 갈래 계통이 본디 한결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으뜸 주체족이 있으면, 객족은 곧 동화되는 것이 상례이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동족으로 인정되어 온 것이다. 단조와 기자의 후손으로서 말한다면 수 천 년간 이미 피가 섞이어 동화되었으나, 기자의 후손들이 존재하지도 아니할 때 이미 우리는 단조의 후손들이었다. 곧 단조가 먼저이시고 기자가 뒤였으니, 우리의 태어난 바 본원을 찾으면 단조가 시조됨이 타당하다 하겠다.
따라서 우리 대동민족사는 단조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해로써 기원을 삼음이 옳은 것이니, 여기서 우리의 신성한 역사를 찾아서 이를 발휘해야 할 까닭이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현 상황이 주권을 빼앗긴 상황에 있으므로, 당장 큰 소리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지마는, 무릇 민족끼리의 경쟁은 세력이 있어야만 승리를 얻을 수 있고 정신이 있어야 비로소 승리를 쟁취하게 되며, 나라의 부력과 병력이 강하여 대적됨이 없으면 그로써 다른 민족을 제압․복종케 했으나, 힘다툼의 승리를 가지려면 종교와 역사의 정신으로써 다른 민족을 교화․복종케 하여서 정신의 승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모용씨와 척발씨와 완안씨와 성길사한은 영웅적인 강용(强勇)한 무력으로써, 능히 다른 민족을 짓밟아 한 때는 대적이 없었으나, 그들은 종교가 없고 역사의 밑바탕 또한 사람의 마음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므로 그 세력이 무너지면서 그 백성들은 도리어 다른 민족에게 동화되었던 것이다.
중국 땅의 한족 사이에도 문약해진 까닭으로써, 혹은 다른 민족에게 굴종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은 종교와 역사의 정신이 튼튼하고 꺾어지지를 아니하였으므로 끝내 능히 떨치고 일어나서, 다른 민족을 제앖하여 복종케하였느니라.
유태민족은 조국을상실하고서 사방으로 흐르듯 헤어졌으나 다른 민족에게 동화되지 아니하고, 능히 유태 민족의 이름을 보전할 수 있었음은, 종교의 정신으로써 떨어져서 없어지지 아니한 까닭이다. 현재 우리 대종민족은 이미 그 세력으론 승리를 가졌음이 오래되었으나 또한 종교와 역사의 정신이 없어졌고, 근기됨은 사람마음이다라고만 하였으니 곧 말 달리듯 빨리 변화하는 날이 오래되면 반드시 다른 민족에게 동화되어 세계역사에 장차 우리 민족의 명칭이 없어질 것이니, 이 어찌 더더욱 십분 겁나고 두렵다 아니하리요. 이것이 나로 하여금 근본을 거슬러 찾아서 대동고대사를 지어 논하게 된 까닭이오니, 오직 우리 동족 형제님들이시여, 생각하시고 힘써주소서

배달임검 조선
「*주: 단군이란 일컬음은 옳지 못하기 때문에 단제로 바르게 고쳐서 공경히 기록함 -擎甌-」

한울이 동양을 열으시사, 대륙이 아득히 넓었었다. 산의 거대한 것으로, 동녘에는 한밝뫼(백두산)가 있고, 서녘에는 곤륜산이 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은 한밝뫼에서 발원하였고, 황하는 곤륜산에서 발원하였으니, 진실로 신성(神聖)께옵서 탄강(誕降)하신 곳이었다. 배달임검은 태백산 곧 한밝뫼에 내리시사 동방민족의 천조(天祖) 곧 한배가 되시었고, 황제(黃帝)는 곤륜산에 내리시사 중토(中土)의 할아버지가 되시었다. 단제는 압록강의 근원을 돌아보시고, 서북쪽으로 나아가시어, 나라를 평양에 세우시고. 황제는 황하의 근원을 돌아보시고, 동남으로 나아가시어, 나라를 중원에 세우셨다. 단제는 활과 화살을 만드시고, 성을 쌓으시어, 각족을 진정케 하시고. 황제는 활과 화살을 만드시고 방패와 창을 익히게 하시어, 제후를 복종케 하시었다. 그 세상을 거느리신 자취는 대략 서로 같으시고, 그 신선으로써 양생하신 도술은 만세의 선종(仙宗)이셨으니, 또한 서로 같으셨음이오. 한울의 신성(神聖)으로 내리시사, 써 인문(人文)을 열으시었으니, 단제께서 세상에 내리심은 4천 3백년전이시오, 황제께서 세상에 내리심은 4천 6백년전이시니, 이 두 지역의 개발이, 차이가 있었음은, 먼저와 뒤짐이 같지 않음이었다. 대개 한밝뫼를 동녘의 곤륜이라 하였고, 묘향산과 금강산으로 바람을 고요하게 하고, 봉래산과 흥개호로 별자리로 하고, 바다와, 지리산과 한라산으로 신선이 사는 방장(方丈)으로 하고, 영주(瀛州)는 이 세계의 신선의 굴집이오. 늘 희면서 높고 아득한 뫼와, 요동들판의 넓고도 넓음과 혼동강(混同江)․홀한하(忽汗河)등 여러 곳은, 다 동녘 거친곳의 명승이오, 인민이 늘어나고 많이 펴진 곳이었다. 단제께서 도읍을 곧 평양과 문화(文化)에다 설치하게 하시고, 성을 강화에 쌓게 하심은 무슨 때문일까? 거룩하신 신인으로 처음으로 나오시사, 비로소 인문 곧 인류문화를 여실려고 하실 때, 인문을 발달하게 하려면 기후가 따뜻하고, 강과 바다와의 교통이 적당한 곳이어야 하니, 이상 명산들의 여러 곳과, 대륙들은, 그 형태는 좋고 여유로우나, 기후가 너무 춥고, 바다 길까지 너무 멀어서, 평양과 문화현만 못하여, 강화가 적당하다 하시었으니, 그러면 곧 이때의 생각은, 바야흐로 이미 문명이 싹트게 되었더라. 대개 민족사에 의거하여 이를 논하면, 만주와 대한의 분리는 오래이나, 강이 막혀서 서로 바라보이지만, 흡사, 진나라와 월나라같이, 언어가 통하지 않고, 풍속도 같지 않으니, 어찌 그 동족이 된다고 하리오. 그러나 그 옛날 시대를 거슬러 보면, 확실하고 넉넉한 징조가 있으니, 동사(東史)에서 말하기를 부여의 선대는 단제로부터 나왔고, 또 말하기를, 예․맥의 먼저는 부여로부터 같이 나왔으며, 모두 단제씨의 자손이오, 또 말하기를 동옥저도, 또한 단제의 먼 후손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비류․숙신은 다 단제에서 나왔으며, 수산(修山) 이종휘(李鐘徽)씨는 말하기를, 고사(古史)에 일컬으되, 부여․예맥․비류․옥저는 모두 단제에서 나왔으며, 나라를 세워 세대가 전해짐이 혹은 수천년씩 끊어지지 않았다하니 이는 그 유래한 바가, 먼 옛적이오, 곧 단제의 큰 덕이 없으셨다면, 순(舜)․우(禹)․탕(湯)․무(武)의 임금들이 그와 같았으랴.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같이 오래리요. 살피건대 부여는 한서열전에서는 부여나라가 바로 이것이오, 그 땅은, 현토의 북쪽 천여리에 있었고, 그 나라 땅은 수천리였으니, 곧 북방의 큰 나라로서,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땅이오, 역사에서 일컬으되, 단제 자손이, 여기에 나라를 세워, 그 세대를 전함이 수천년이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그곳 부여로부터, 졸본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으니, 졸본은 발해에서 솔빈부(率賓府)를 설치한 곳이니, 지금의 흥경(興京) 남쪽이 경계이요, 예맥은 부여의 지명이며, 북부여 임금인 해부루는 동쪽으로 옮겨가, 가섭원(迦葉原)에 이르러서, 동부여라 하였고, 이어 또한 말하기를, 예와 맥은 지금의 조선 강릉 지방이요, 비류는 졸본부여 옆 가까운 작은 나라이니, 지금의 동가강(佟家江)과 가까운 땅이오, 숙신은 지금의 흑룡강 지방에 있었으니, 삼대 이전에는 이 숙신을 이름하기를, 식신(息愼)이라고 불렀으며, 그러므로 사기에서 말한 바, 순임금이, 북쪽 식신에서 출발했다, 하였고, 죽서에서는 말하였으되, 순임금 25년에 식신씨가 활과 화살을 바쳤다 하고, 노어(魯語)에서 말하기를, 무왕이 상(商)을 이긴 것은 숙신씨가 활과 화살을 바친 까닭이라 하며, 한나라․위나라 그 다음에서는 말하기를, 읍루를 물길이라 하고, 수나라 당나라 기록에서 말하기를 말갈은 고구려와 발해에 소속되었다 하였고, 완안씨가 일어나서 발해와 말갈의 양족이 합해져서 여진이 되었으니, 곧 금의 옛 나라이오, 완안의 먼저는 고려에서 나온 까닭에, 금나라 역사에서 일컬으되,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하였다. 동․북 옥저는 지금의 조선 함경남북도 지방이니, 이상의 여러 겨레는 아울러 일컬으되, 단제에서 나왔다 하니, 곧 만주와 대한의 두 민족은, 본디 갈래가 같은, 한 조상임이 어찌 명백하지 않으리오. 무릇 한울이 조화하셔 초매(草昧)할 적에, 맨 처음에 동방에 내리시사, 4천여년의 역사의 한배(天祖)되오심은, 오직 단제이시오, 우리 대동민족 조상이 단제가 아니시면, 뉘가 조상이신가? 단제께옵서는 한얼님으로써 거룩하게 화하시사, 처음으로 사람글을 여시고, 능히 천심(天心)을 누리시니, 까닭에, 창성한 대덕의 보응으로, 유구한 영장으로서 그 자손이 번창하고 영광스런 명예, 환히 빛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퉁구스 종족이, 울연(鬱然)하게, 세계에서 유명한 종족 이름이 됨이오. 진실로 신성(神聖)한 후손이 아니라면 어찌 이같음이 있으리오. 단제께옵서 일찍이 혈구해(穴口海:강화) 마니의 언덕 위에 성을 쌓아서 제단으로 하시었으니, 이는 한울 제례로 보본하는 예절을 내신 바이니라. 그러므로 부여, 예국, 고구려, 백제는 모두 다 상달(十月)에 제천하였고, 요나라와 금나라도, 또한 이를 지켜 행하였으니, 이것은 모두의 조상이신, 단제의 예절인 것이다. 단제의 세상은, 신도(神道)로써, 백성을 교화하신 까닭에, 그 종교는 신교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배천교(拜天敎)라 하였고, 대개 옛 시대 사람들의 생각은, 신권에 심복한 까닭에, 역(易)에 이르기를, 성인이 신도로써 가르침을 베푸사, 천하가 심복하였다 함은 이를 말함이오, 우리 동방 역대에, 고구려 시조는 선교로써 세상을 다스리셨고, 신라시조는 신덕으로써 나라를 세우셨다 하였으니, 모두 단제에서 원류함이오, 단제는 한얼사람으로서 세상에 내리시사, 동방을 교화하신 한배(天祖)이심으로, 이제 조선교계에 대종교가 있으니, 종은 한얼사람을 일컬음이니, 진실로 단제를 받드는 신교인 것이오, 그러므로 곧 역사적 종교인 것이다. 지금도 강화에 천단유지가 있으니, 위는 모나고 밑은 둥글며, 서양사람은 동방건축물의 가장 옛 물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배달나라 활과 숙신의 쇠뇌는 다 천하에서 저명하였으니, 이는 고대 무기의 발명으로 나타난 것이오, 역대로 동방의 사람은 활 잘 쏘는 것으로써 특별한 장기라 하였으며, 무를 숭상하는 풍속으로 된 기원도 또한 그 원류는 절로 이에 있던 바이오. 성곽은 무기의 거대한 것이오, 그 쌓아서 세워짐은 이미 단제의 세상에 나타났으며, 그러므로 기타 무기를 사용한 자취는,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으니, 혹은 말하기를, 단제의 세상에는 신도로써 백성을 교화하였고, 백성은 절로 귀화하였으니, 곧 신권시대이었다. 이때를 당하여서, 어찌 무기의 사용이 있었을 것이랴, 옛 시대 사람들의 생각은, 실로 문명을 배태하는 처음이었으며, 진실로 다 신권의 밑에 심복하였으나, 그러나, 꿈틀거리는 동물류들은 서로 다툼이 없음은 불가능했으니, 사람들과 짐승들의 경쟁이 있었으며, 성스러운 겨레와 야만족과의 경쟁도 있었으므로, 한울이 내리신 슬기로서 기물을 만들어 이용함이 있지 않았다면, 곧 인류는 짐승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였을 것이오, 성스러운 겨레가 야만족을 정복함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단제의 세상은 크게 거친 것이 처음 열리어져, 벌레와 짐승 악한 동물의 피해로, 우리 민생들이 들에서 당번으로 지켜도 사납게 침입하고, 우리 성스러운 겨레는 처음에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성인이 먼저 나오시어 우리 민생을 편안히 정해 주시고 우리 동족을 지키시려고 하실 때 무기의 이용이 있지 않았으면, 그 어찌 되었으리오. 이 때문에 단제의 세상에, 활과 화살과 성곽의 기물이 발현한 까닭이었나니라. 그러나 곧 우리 대동민족은 특별한 한울 혜택을 입은 까닭으로, 서로가 살리게 하면서 보전하였고, 서로가 기르게 하는 복이 무궁하였음은 무슨 때문이었을까? 이야말로 신조께옵서 나려주심이 아니시리오! 무릇 단제조선의 국경 지역같은 것은 또한 옳게 증거해야 함이 있으니, 미루어서도 인정해야 한다고, 성호 이익께서는 말하기를, 은나라 부열(傅說)이, 갈색옷 새끼띠로 비부지성(秕傅之城)을 쌓았다 하나, 비부가 어느곳에 있는지 알지 못하여 묵자란 책을 참고하니, 옛적에 부열이 북쪽 바닷가의 환토(圜土)의 위에 살았으며, 갈색옷에 새끼띠로, 품팔이로 부암지성(傅岩之城)을 쌓았다 하였으며, 두 설명이 서로 뜻이 가까운 것이니, 열(說)은 바로 요심(遼瀋)의 사람이라 하였고, 맹자에서는 말하기를 백이가 주를 피하야 북쪽 바닷가에 살았으며, 지금의 고죽 옛터가 요심에 있으며, 이어 말하기를 이는 북쪽 바닷가이오, 또한 순임금이 공공(共工)을 유주(幽州)로 도망치게 했다고 하니, 유주는 물가이오, 중국의 북쪽 바다의 물가이니, 이를 버린다면 그 곳이 없는 것이오, 단기(檀箕)의 세상에는 그 땅은 조선에서 통솔되었고, 또 순의 근본은 동이의 사람이며, 이어 맹자에서 이르기를 고수(瞽䏂)가 사람을 죽였으므로 순이 남몰래 업고, 바닷가를 따라서 도망한 것이 바로 그 곳으로의 도망이었다고 하며 유주는 반드시 중국밖에 있었다 하는 의문이 또한 이를 가리킨 것이다. 중국인은 살펴보고서, 유주의 땅은 북해의 물가이오, 그러므로써 그 땅은 바다의 물가이며 중국의 북쪽에 있다라고 한 까닭이오, 이씨는 말하기를 단기의 세상에는 그 땅은 조선에서 통솔하였으니 기자조선의 거점은, 유주에 있었다 함이, 가히 그 증거라 함이오. 단제조선의 국경지역은 또한 유주의 땅이었다라고 함은 어찌된 것인가? 역사에서는 기자는 동쪽인 조선으로 나와서, 조선이라 이름하였고, 단제께서 일어나심은, 기자조선이 아닐 때부터 비롯이 있었고 영평부(永平府) 지경 안에 조선성이 있으니, 곧 기자께서 살던 바 땅이오. 기자보다 이전에는, 단씨의 소유이었음은 명백한 것이오, 또 역사에서 말하기를, 선비산의 동쪽에 있었다 하였으므로, 조선은 곧 단제 조선을 말함이오. 북쪽 경계가 선비이며, 단제께서는 백두산에 나리셨으니, 백두산은 동해의 물가이오, 도읍을 황해의 물가에 설치하셨고, 또 제천은 혈구(강화)의 바닷가에서 하셨으니, 혈구는 서쪽 남쪽의 바다와 통하였으며, 그러므로 동서남해안은 죄다 그 강역에 들었으니 이로써 징거하면, 단제조선은 북쪽은 요심을 거점으로 하고, 대륙의 동서남은 벽해에 닿았었고, 황해와 현해의 해변은, 곧 옛 시대에는 전부가 조선이었던 것이다.

기자조선

기자조선의 그 처음은, 영평부 지경안의 조선성이 이것이었다 하니, 무엇으로써 증명하리오. 위서에서 말하기를 북평군 영현에 조선현이 있었다 하였고, 당서에서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기자나라이라 하고, 요사에서 말하기를 요는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니, 그러므로 기자의 끼친 풍속이 있다라 하고, 명일통지에서 말하기를 조선성은, 영평부 경계안에 있으니, 서로 원하기를 기자의 봉함을 받던 땅으로, 뒤에 위나라에서 북평군에 속한 현으로 두었다가, 북제나라의 성으로 들어가서는, 신창현이라고 하였다. 주에서 말하기를, 지금 요동에서 서쪽 그 천리를, 정득 영평부의 지경이라고 하니, 곧 옛날의 북평군이었다. 성경지에서 말하기를 요서의 광녕현에 본디 조선경계가 됨이 있다 하니, 요동의 해성현․개평현과 금주는 모두 기자조선 땅이라 하고, 주에 말하였으되, 광녕현은 의무려의 밑에 있다고 하였는데, 의무려는 유주의 진산이라고 하니, 이 여러 가지 설명에 의거하여 가히 증명할 수 있으니, 기자조선은 유주에 있으며, 또 사기 소진전에 말하였으되, 연나라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으니, 먼저는 조선이었고 뒤에는 요동이었으니, 이는 조선과의 가까운 곳이라고 하였고, 화식전에서 말하였으되, 연나라는 북쪽은 오환부여와 이웃하고, 동쪽은 예맥조선에 얽히었고, 진번과의 편리로, 이들은 모두 연나라와 땅이 맞닿아서, 물화교통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곧 우리나라 유래를 낙랑의 평양으로써 기자가 도읍한 바 되었다라 하여, 드디어 천고에 둘이 아닌 듯 공인이 되었음은 어찌됨인가? 이는 우리나라 사람이, 오래토록 반절 조선의 안에 있어 사가의 눈빛이 고대의 전체 조선을 아직도 맛보아 듣지 못한 까닭이라. 대개 기자는 은나라가 주나라의 혁명을 당함에 즈음하여, 다만 주나라 판도의 밖으로 피신할 수 있으면 족하였다. 그가 동쪽으로 나올 때, 주나라의 판도를 넘어, 편안히 봉함을 얻었으니, 이른 바 조선현이었으며, 곧 단씨 조선의 한 구석진 땅이었다. 드디어 이에 정거하여, 은나라 유민과 더불어 한 부락을 이루었으며, 이때에 단씨조선에로 들려져 오기를 기자는 성인의 덕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써 그들을 조선현에 소속한 구석에 있게 한 것이니, 기자는 주로 정치와 교육을 행함에 예의를 일으켜서 다스리게 되었으니, 이렇게 되어 동방에 성인이 있는 나라이라 하고, 조선인민들이 굳이 많이 유주 가까운 지방으로 향해 돌아갔고, 또한 듣고서 바람처럼 불어서 왔다. 주나라의 무왕이 이러한 원인으로 벼슬을 맡기고져 하였으나, 기어히 그의 신하가 안되려고, 기자는 굳이 종신토록 스스로 생각하고 그 자손들에 이르기까지도 주나라의 벼슬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조선후라 일컬었고, 주 말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임검이 되어, 또 독립국이라고 일컬었으니. 사가는 글로 써서 말하기를, 기자가 주나라에서 봉해졌다 하나, 그 사실은 기자는 그 종이 됨을 뜻하지도 않았으니, 어찌 주나라의 봉함을 받음이 있으며 그 신하되는 의리를 하였으리오. 무왕도 또한 어찌 사람과 그 나라를 빼앗기고 있는 그에게, 벼슬을 봉할 이치가 있으리오. 그러므로 기자는 그 처음에 영평부 경내의 조선성에서 살고 있다가, 그 자손 시대에 이르러서, 점차로 국경을 개척하여, 남쪽으로 평양까지 와서 도읍을 설치하고 또 남으로 열수까지 개척하여, 죄다 기씨의 소유로 되었으며, 그때에 단씨는 미약하여져서 바뀌어졌다.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와서, 바로 평양을 도읍으로 점거했다는 것은 곧 이것은 세력상 이치로서 찾아보아도, 그 모두가 합당하지 않으며, 기자는 피신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생각하는 도리로 하였으니, 어찌 그가 사람과 나라 도읍 빼앗아서 살았을 것이리오. 오직 정의롭지 않으면, 힘이 합쳐지지 않아서 불가능하니, 말을 지어내어, 주나라 무왕이 그를 봉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조선이라 했다고 하나, 다섯 곳 항복을 받고 있던 그 이외에도 어찌 무왕이 단씨의 나라를 취해 얻었으리오. 기자로써 봉했다면, 기자도 또한 어찌 편한 것만 좋다고 이에 즐겨 살았으리오. 말을 지어내어 단씨가 물려준 관계로, 이것이 그 한모퉁이 가장자리 땅이라면 곧 옳지만, 어찌 그 나라 도읍까지 다 받쳐서 물려 줄 수 있으리오. 그러하므로 기자의 처음 거처는 영평부 경내의 조선성에 있었으며, 그 후대에 이르러 나라 형편이 점점 개척되어 평양에 도읍을 설치했음이 이세(理勢)에 합함이오, 하물며 역사에 실려서 전해짐이 역력한 증험인데, 다만 추측하는 생각으로 그 아닌 것을 이어서 말하리오. 혹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평양에 도읍을 설치한 것은 기자가 있지 않던 입국초임이 분명하며, 이제까지도 기자능은 평양성 북쪽의 토산위에 있고, 기자정은 평양외성에 있고, 기타의 기자 궁궐과 기자성에 속하는 모두가 유적으로 서로 전하여 와 있으니 어찌됨인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유래는 이와같이 서로 전해짐이 많았었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은 나라를 졸본부여에서 세웠으니 곧 지금의 흥경 남쪽 경계인 비류수이다. 흘승골성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그 아들 유리왕에 이르러 국내성에 도읍을 옮겼고, 십대손인 산상왕에 이르러 환도성에 도읍을 옮겼다. 국내는 지금의 초산 북쪽 강 건너편의 땅이오, 환도는 강계 북쪽 압록강 물 건너편 땅이다. 십일대손인 동천왕에 이르러 처음으로 평양성을 쌓고, 그 제사 사당을 옮겼다. 또 옮긴 거처를 찾아보니, 십대손인 고국원왕에 이르러서는, 다시 환도성으로 옮겼고, 두 해 뒤에 또 평양의 동쪽 황성으로 돌아왔고, 십구대의 광개토왕에 이르러서는, 또 환도로 옮겼다. 그러므로 지금 그 땅에는 능침의 유지와 비문이 있으며, 이십대손 장수왕이 또한 평양으로 옮겼으니, 그러므로 곧 동명성왕은 평양에는 이르지도 않았는데, 이제에는 그 능침이 중화군의 용산에 있고, 또 평양에는 기린굴과 조천석이 있는 바 모두를 동명 고적이라 하며, 심지어는 정인지의 역사에는, 이제와서의 평안남도 성천군을 이를 일러서 졸본이라 하고, 이어 비류수를 흘골성이라 하고, 송양을 나라의 이름이라 하며, 여지승람에도 또 이같이 적혀져 있으니, 또 그 거칠고 그릇되고 상고없음이 이같이 심하였다. 무릇 동명능침이 용산에 있는 것은, 그 후손이 도읍을 옮겨, 그 선대능을 이어 옮겨 받들었음이오. 기린굴과 조천석도, 또 그 후손이, 선족을 추모하여, 상상하는 이름으로 기념으로 서 있게 한 것이오. 흘러 전해옴이 오래되어, 나라의 순수성을 이루려는 원인으로 드디어 뒷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동명고적이라고 한 것이며, 기자능이 토산에 있는 것도, 또한 그 후손이 여기에 옮겨 받든 것이다. 정전이 외성에 있는 것은, 평양지에 의거하면 지금으로부터 사백년전의 감사 이정제씨는, 정전유제를 형상하고 그 논두렁과 밭골 이랑을 그려서 이름하여 가로되, 정전지구(井田之區)라 했음은, 밭은 정자로 구획한 것이니, 선왕의 제도이었다. 천하의 옛 선비들 기록에는 이를 사랑하며 사모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중국 행인이 평양에 오게 되면 반드시 여기의 정전에 찾아와서, 글로써 기록하고 시로써 노래하여, 이로써 자랑하며, 천하에서 탐할 바라 하니, 이리하여 평양의 정전이 드디어 이룩되고, 기자의 계획이라 했지만, 그러나 그 사실을 연구할 것 같으면, 요순 때 세 임검의 정전이, 주나라 말에 폐지됨이 오래이었고, 그러하니 기자의 정전이 어찌 홀로 삼천년 뒤에 있었다고 하리오. 또한 기자가 나라를 다스림에 우물 정 자로 그 밭을 구획하야 즉의하게 두루 실시했으니, 어찌 외성의 한구역만 했으리오. 기타 여러 사적도 또한 모두 기린굴과 조천석과 비슷한 것이다. 강릉의 예와 춘천의 맥과 같이 이와 비슷한 것도 또 이 같은 것이며, 북부여왕 해부루는 예맥의 땅에서, 동쪽 강릉으로 옮겨서 살 때, 그들 옛 이름을 인습함이라. 그러므로 북명사람이 옛날의 동장(銅章)을 얻었는데, 그 글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북쪽의 예맥이, 동쪽의 예맥으로 됨을 말함이오. 대개 우리나라는 옛부터 흘러 전해오는, 나라 이름과 지방이름과 산 이름과, 물의 이름은, 그 이름은 같지만, 그 사실은 다른 것이 매우 많으니, 조선은 곧 요동의 조선과 낙랑의 조선이 있고, 평양은 곧 요서의 평양과 낙랑의 평양이 있으며, 현토는 곧 동서의 현토가 있고, 옥저는 곧 남북의 옥저가 있고, 개마는 곧 동개마와 서개마가 있으며 마한은 곧 남마한과 서마한이 있고, 졸본은 두 졸본이 있고, 부여는 네 곳의 부여가 있고, 패수는 세 곳의 패수가 있고, 태백은 네 곳의 태백이 있으니, 이와 같은 이름은 가지가지로 다 이와 같았다. 기자의 조선성은 영평부 경내에 있었고, 요동에서의 거리가 이천리인데, 후세사람이 다만 낙랑의 조선이라 함이 옳다 할 것인가? 이제는 바로 그 전부를 찾아봐야 할 조선이니, 곧 기자가 처음에 거주한 곳은 영평의 조선성이었음이 단연코 가히 의문이 없으니, 우리 대동여사에서 천고로부터 밝히지 않던 안건이 이제서야 겨우 결정되었다. 대개 단씨 조선의 개척은 백두산에서 일어나서,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유주의 경계에 도달하였음이오. 기씨 조선의 개척은 그 일어남이 유주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하므로써 열수의 물가에 도달함이라. 이는 인간문화의 발달이 천지의 기운과 더불어, 갊아들어서 돌아감인 것이다. 우나라 순임검은 동녘 사람으로서, 중국에 나아가서 천하를 다스렸으니, 그 때는 곧 단제의 세상이니, 곧 천지의 기운이 동에서 서로 가는 시대이오. 주나라 무임검은 서쪽 사람으로서, 중국에 나아가서 사방을 복종하게 했으니, 그 때는 곧 기자의 세상이었으니, 천지의 기운이 서에서 동쪽으로 가는 때이며, 인간문화의 발달은 본디 이와같은 관계에 있었다. 저 단제조선과 기자조선의 역사로써 이를 증명함이니, 곧 만주와 대한은 원래 이는 같은 나라이요, 그 백성은 원래 같은 겨레임은 이미 확실한 증명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대동민족은 신성하신 한얼님 한배께서 계시었고, 신성한 문화가 있었으며, 이 원인으로 신성한 무풍이 있었으니, 홀로 신성한 정신이 어찌 없었으리오. 신성한 정신이여, 오! 있었던 것이다. 하였으니, 역사가 이를 말함이라. 역사가 없으면 바로 야만족이라 이르고, 노예의 백성이라 이르나니. 우리 신성한 겨레로서, 역사의 정신이 없었다고 함이 옳다고 하랴. 진실로 우리 역사의 정신을 발휘하고자 하려면 곧 우리는 같은 겨레인 형제로서 이끌어서 우리가 태어나게 된 바 시조님께로 돌아가야 할 따름이다. 단애(윤세복 선생)는 말하였다. 탁월하게 다른 견해이오, 바르고 확실한 논리로다. 실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문자가 있어서 산을 개척하는 큰 도끼같았고 단번에 쪼개낸 용문의 고대문화로 황하유역도 처음으로 다시됨이 그 까닭이다. 가장 큰 그 마루뜻은 끝없는 정성으로 절절히 힘써야만, 우리 대동민족은 본래 보유하고 있던 우리의 신성한 종교로서, 우리의 신성한 역사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오, 정신을 보존할려면, 만고에 오직 으뜸으로 할 것이 이것이니, 곧 한울계시가 선생께 없었다면, 어찌 우리 민족의 행운이 있다 하리오. 단암(이용태 선생)은 말하였다. 천고에 있지 않던 논리가 세워졌고, 천고에 결론내지 않던 역사의 안건을 고루어 끝냈으니, 그 훌륭함이여! 하물며 종교와 역사는 우리 겨례의 정신이니, 어리석은 이라도 이를 읽으면 안석을 치면서 크게 외치리라. 「우리 단조의 신성한 후손, 삼천만 형제시여!」라고 말할 것이로다.

[註]: 기자조선의 태조 문성왕은 본래 지나 은나라의 왕, 주의 숙부이었느니, 성은 자이고 명은 서여이매, 작은 자에 열하였고 기는 봉한 방이므로, 기자라고 하였다. 은나라 왕실이 주나라 후인 희발(무왕)에게 패망하였으매, 그 신복이 됨을 수분하여, 개천 1336년에 부하들인 시서․예악․의약․복서 등의 백공기예인중 오천인을 인솔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여왔음으로, 단조에서는 그들을 긍칙히 여기어, 평양 근방을 할여하였음으로, 기자 일행이 이에 교거하게 되었다. 때마침 단조의 정령이 부진하야, 천하가 혼란하므로, 이에 기씨의 세력이 점점 강성하여져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국호를 기자조선이라고 잉칭하고, 국도를 임검성으로 정하고, 태조 문성왕은 재위 사십년간에 팔정을 편시하여 문화가 대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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