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관리자 email gukhak@gukhak.org
작 성 일 2007-08-08 오후 2:44:45 조 회 수 2481
제 목 한국혼
내 용
예관 신규식

백산(白山, 白頭山)에서 부는 바람은 천지(天地)도 시름을 짓고, 푸른 파도 구비치는 곳에 거북과 용이 일어나서 춤을 춘다. 기나긴 어두운 밤을 샐 줄을 모르고 모진 비바람은 어두컴컴만 하구나. 5천년 역사에 빛나는 이 나라는 오랑캐(일본)의 군현(郡縣)이 되고, 3천만의 백성은 떨어져 노예가 되었으니, 아아! 슬프기 그지없다. 우리 나라는 망하였다. 우리들은 길이길이 망국(亡國)의 백성이 되고 말 것인가?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는 것이나, 우리 나라가 망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죽음으로써이다. 지금 기왕에 망국의 백성이 되어 참혹한 학대를 받고 있는 터이나, .아직 흐리멍덩하여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 위에 또다시 죽음을 더하는 것이다. 아아 ! 우리 나라는 끝내 망하고 말았구나.
가령 우리들의 마음이 아직 죽어버리지 않았다면, 비록 지도(地圖)가 그 색깔을 달리하고 역사가 그 칭호를 바꾸어 우리 대한(大韓)이 망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하나의 대한이 있는 것이니, 우리들의 마음은 곧, 대한의 혼(魂)인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죽지 않았다면, 혼은 아직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힘쓸지어라, 우리 동포들이여! 다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먼저 각기 가지고 있는 마음을 구해내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오오! 우리 동포들이여! 지금 여기에 이미 망국의 백성이 되어 다 같이 노비(奴婢)와 말과 소와 같은 욕을 받으며, 형세는 밖으로 긴박하고 기한(饑寒)은 몸에 절박한데도, 아직 나라가 망하기 이전만을 회상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없다는 말인가?
러시아는 폴란드의 귀족과 평민의 어린이들을 잡아 시베리아에 귀양보내어, 어름과 눈 속에 뒹굴어 얼고 굶주려 죽게 하였다. 그 때 그들을 태운 열차가 떠나려 할 때, 여러 어린이들의 부모들은 자기들도 함께 가기를 원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으므로 수레바퀴에 매어 달리고 철로 위에 드러누워 열차가 떠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 어린이들을 감시 호송하던 코사크 병사들은 채찍으로 때리고 발길로 차서 모두 철로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마침내 열차가 떠나려고 움직이자 한꺼번에 아들을 부르고 딸을 찾는 통곡소리는 피눈물이 얽히었다. 시베리아로 가는 도중에 어린이들에게 주는 음식은 겨우 거칠고 검은 빵 조각뿐이었다. 그리고 병든 어린이를 번번이 황야(荒野)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는데, 철로 연변에 던져져 죽은 어린이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어, 어떤 어린이는 빵 조각을 손에 쥐고 먹으려고 하다가 목숨이 끊기어 눈을 감지 못한 채 있었다. 이것은 폴란드의 나라가 망한 후의 뼈아픈 이야기인 것이다.
망국(亡國) 유민(遺民)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데. 우리도 결국에는 폴란드의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우리들은 지난날에 폴란드 사람들을 위하여 애처러워 하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우리 스스로 슬퍼하기에도 겨를이 없게 되었다. 슬프고 슬프도다! 아아, 동포들이여! 우리들은 폴란드 사람과 마찬가지가 되어 끝내 떨치어 일어나지 못할 것인가? 우리들은 저 놈들의 해독을 받으면서도 다시는 우리 스스로를 구하지 못할 것인가? 우리 신명(神明)의 자손들은 앉아서 그 전멸하는 것을 바라다만 보고, 자연의 도태(淘汰)에 돌아가는 것에 맡길 것인가? 아아, 우리 동포들이여! 잠시 시간을 내어 나의 눈물나고 도리(道理)에 맞는 쓰라린 이야기를 들어달라.
눈물은 다함이 있어도 말은 끝이 없고, 말은 다함이 있어도 마음은 죽지 않는 것이다. 옛날 오(吳)나라의 왕 부차(夫差)는 그의 아버지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원통히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뜰에 서 있도록 하고, 늘 자기가 출입할 때에 번번이 소리쳐 말하기를 “부차야! 너는 월(越)나라의 왕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하게 하고, 곧 이에 대답하여 “네, 감히 잊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진실로 천고(千古)의 비통한 이야기이며, 그 영혼을 경계하여 각성케 하기 위한 까닭이었다. 또 초(楚)나라 사람들의 말에 “초 나라는 비록 삼호(三戶)라 하더라도 진(秦)나라를 멸망시킬 자는 반드시 초나라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천고의 비통한 이야기로써 그 종지(宗旨)를 굳게 정하려는 까닭인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죽지 않고, 비통한 이야기를 들음을 경종(警鐘)을 듣는 것과 같이 함은, 이것이 곧 오나라가 월나라를 보복한 까닭이 되고, 초나라가 진나라를 전복시킨 까닭이 되지 않겠는가? 아아! 한(韓)나라는 망하였어도, 아직 장자방(張子房)의 철추(鐵錘)는 남아 있고, 진(秦)나라는 깨어졌어도 아직 포서(包胥)의 눈물은 남아 있다. 이제 비통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러한 물건과 이러한 뜻에서이다.
이제 내가 통언(痛言)을 쓰려고 하나, 나의 마음속에는 한없는 고통이 간직되어 있어,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하여야 될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다만 나의 느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이를 쓰려고 하나, 또한 그것이 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로 이 글을 읽는 자는 사람마다, 느끼고 받는 바의 고통을 영원히 여러 사람 마음속에 간직하여 망국(亡國)의 치욕을 벗어난 다음에 잊어버리도록 하여라.
아아! 우리 나라가 망하게 된 쌓이고 쌓인 원인은 법치(法治)가 문란하고, 기력이 쇠약하고, 지식이 깨우쳐지지 못하고, 남에게 아첨하며 게으르고, 자존심(自尊心)과 자비심(自卑心) 그리고 당파(黨派)를 맺고 사욕(私慾)을 채우는 것 등을 들 수가 있으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기를 이러한 여러 가지의 원인을 가져오게 한 것은 모두 양심(良心)을 잃어버린 까닭이라 하겠다. 이렇게 양심을 잃게 됨으로써, 일종의 흐리멍텅한 건망증(健忘症)을 낳게 하였으니, 잊어버리기를 잘하여, 첫째, 선조의 교화와 그 종법(宗法)을 잊어버렸고, 둘째 선민(先民)의 공렬(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버렸으며, 셋째 국사(國史)를 잊었고, 넷째 국치(國恥)를 잊었으니, 이렇게 사람들은 잊어버리기를 잘하고 보면 나라는 망하게 마련인 것이다.
무엇이라고 말하랴? 나라의 백성들이 선조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버렸으니 말이다. 하늘을 본받아 도(道)를 닦고 나라를 세우며, 홍몽(鴻濛)을 개벽하여 자손들에게 전한 것은 5천년 전 동방(東方) 태백산에 신(神)으로 강림(降臨)한 우리의 신조 단군(檀君)이 아니겠는가? 인간을 교화하여 신도(神道)의 교(敎)를 베풀고 하늘에 제사지내 보본(報本)의 예(禮)를 세웠으며, 벌레와 짐승을 몰아내고, 산천(山川)을 평정하며, 구족(九族)을 열복(悅服)시키고 만방(萬方)을 화목케 하며, 의식(衣食)과 정교(政敎)를 고루게 한 것은 모두 우리 선조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성철(聖哲)은 대를 이어 일어나고, 토지는 날로 개척되며, 문화는 융창하고 무치(武治)는 강성하였다.
옛날에 우리 나라를 신인국(神人國)이니, 군자국(君子國)이니, 부여대국(夫餘大國)이니, 예의동방(禮儀東邦), 해동승국(海東勝國)이니, 부모국(父母國)이니, 상국(上國)이니, 신성족(神聖族)이니, 상무족(尙武族)이니 하여 여러 가지로 칭하게 되었던 것은 모두 우리 선조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나라에는 충성하고 집에는 효도하며 벗에게는 신의를 지키고 싸움터에 나가 물러남이 없으며 살생을 하되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5조목(條目)의 가르침은 우리가 대대로 지켜야 할 종법(宗法)인 것이다. 덕(德)을 갚으려면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며, 자손 만대에 영원히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분란이 일어나 나라에 요사(妖邪)가 생기고 실없이 자기 스스로를 천하게 생각하여 모든 종법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는 버릇이 몇 백년 간 길러져, 마침내 만악(萬惡)의 결과를 맺게 하여 종묘와 사직은 없어지고 신령에게 제사지내지 않아 그 옛날 백성들이 우러러 빛나던 삼신사(三神祠) 숭령전(崇靈殿)은 모두 황폐하여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옛글에 말하기를 「나라는 천지에 반드시 더불어서야 할 것이니, 이것은 예의인 것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근본이 먼저 뒤틀리면, 지엽(枝葉)도 그에 따르는 것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머리를 돌이켜 아사달(阿斯達)의 산마루와 왕검성의 옛터를 바라볼 때 나는 눈물과 콧물이 비 퍼붓듯이 뿌려짐을 금할 길이 없다.
무슨 말로써 선민(先民)들의 공렬(功烈)과 이기(利器)를 잊어버렸다고 할 것인가? 영웅이며 절세의 위인으로 만난(萬難)에 당하여 중흥(中興)의 업(業)을 이룬 것은 우리 3 백년 전 벽파정(碧波亭)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을 무찌르고 국난(國難)에 순국(殉國)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아니겠는가? 한 몸을 희생하여 만백성을 소생케 하였으며, 사나운 오랑캐를 섬멸시켜 이웃 나라까지 편안케 하였으니, 그 드높은 공렬은 천세(千世)에 빛나는 것이다. 옛날 명나라의 제독(提督) 진린(陳璘)은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야(李爺, 李舜臣)는 하늘이 내린 장군이다.”라고 하였으며, 그가 나라에 내는 보고에는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이 있다.”라는 말들이 있는 것이다.
또 적으로 이순신을 본 자는 번번히 천신(天神)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므로 일본해군찬기(日本海軍撰記)에는 「이순신은 고금의 해전(海戰)에서 제일의 위인으로, 영국의 넬슨보다도 훨씬 뛰어난다,」라고 하였으며, 또 근래 일본인 해군 대좌(大佐)인 나베다(邊田)가 쓴 전기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지력과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용력(勇力)으로 조선을 위협하고 명나라를 공격하는 석권(席捲)의 세(勢)는 갑자기 한 사람의 위인을 만나 좌절되고 말았으니, 그는 누구인가?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영국의 넬슨과 일본의 토오고오 헤이하치로오(東鄕平八郞)와 더불어 세계의 삼걸(三傑)이 되는 것이나, 그 성격과 신지(神智)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를 헤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국 해군기(海軍記)에는 「조선의 전선(戰船)은 철판으로 싼 것이 귀갑(龜甲)과 같은 데, 그것을 사용하여 일본의 목조선을 대파하였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철갑선(鐵甲船)이 되는 것이며, 조선인이 창조한 바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아! 멀리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가 이 인물 이순신과 이 무기 거북선이 없었으면, 한국은 벌써 빈 터가 되고 말았을 것이며 중국 또한 벼개를 편안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명나라의 장수 가운데 충무공의 공렬(功烈)을 시기하여 일마다 견재하던 자인 진린과 같은 자도 그처럼 진심으로 열복(悅服)하였으며, 일본의 10만 수군이 하루아침에 섬멸되어 원한이 뼈에 사무칠 것이어늘, 오히려 그처럼 그를 숭배하였고, 영국은 세계 해군의 우이(牛耳)를 잡고 있음에도 오히려 그처럼 그를 찬미하였던 것이다.
결국 중국이 이순신을 잊지 않았고, 일본이 이순신을 잊지 않았으며, 세계가 이순신을 잊지 않았고, 아래로 어룡(魚龍)과 초목(草木)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 정성과 충의에 감동하였거늘(충무공의 시에 「國有蒼荒勢 人無任轉危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라고 한 것이 있다) 홀로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잊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홀로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를 박해하였으니, 사람이 망하면 나라는 없어지게 마련이다.
아아, 슬프도다! 그 당시 삼도(三都)가 함락되고 선조(宣祖)가 수레를 타고 피난을 하였으며, 여러 주군(州郡)은 깨어지고 여러 장수들이 패배하여 흩어져 달아날 때 충무공은 한 몸으로써 우뚝히 버티어 연전 연승을 거두었다. (역사에 말하기를 「왜구가 전단(戰端)을 벌리자 조야(朝野)는 모두 안연(晏然)하여 반성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홀로 이순신만이 이를 깊이 염려하여 날로 방비에 힘쓰고, 철련(鐵鏈)을 구어 이를 해항(海港)에서 마르재어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이는 철판을 둘러싸서 거북의 등과 같이 하였고, 용두(龍頭)와 귀미(龜尾)를 만들어 그 앞뒤에는 모두 포(砲)로 장치하였고, 또 그 좌우에는 고르게 포혈(砲穴)을 만들었으며, 병사들은 선창(船艙)속에 숨게 하여 선체(船體)를 운행하면서 포를 쏘게 하였고, 팔면(八面)에는 모두 창을 꼽았으며, 진퇴(進退)가 자유로와 빠르기가 나는 새와 같아서 적선(敵船)을 불살아 버림으로써 제승(制勝)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간사한 사람들이 이를 질투하여 병권(兵權)을 뺏아 옥에 가두게 하였으며, 적을 무찔러 원수를 갚은 것이 도리어 중죄(重罪)가 되었던 것이다. 때마침 적의 세력이 다시 떨치어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충무공을 옥중에서 불러내어 나아가 적을 맞도록 하였다. 그 때 충무공은 때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길을 떠나면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 마음의 충효가 이에 이르러 모두 헛되게 되었구나”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맹세코 원수의 적을 무찌르면 죽어도 또한 원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거듭 싸우면서 한산도에 이르러 드디어 큰 승리를 거두고 적은 거의 모두가 섬멸되었으나, 충무공은 마침내 거북선을 버리고 몸으로써 순국하였다. 이는 천고(千古)에 가장 원통한 일이다.
아아! 충무공이 한 몸으로써 한국의 안위(安危)에 얽매임이 이와 같건만, 이를 모함하려는 자는 진실로 그 어떠한 마음에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함에도 오히려 말하기를 어깨를 겨누어 임금을 섬기는 데에 공업이 홀로만 높아져 도리어 시기를 가져오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공(公)이 손수 만든 귀룡(龜龍)의 거북선은 또한 이상한 물건이라하여 썩어버리게 하였다. 국방의 이기(利器)란 응당 어떤 보귀(寶貴)와 같을 것인데, 이처럼 헌 신 짝과 같이 보는 것은 경중을 가리지 못하는 탓이다. 이에 드디어 영국인이 해상의 패권을 잡게 되었고, 왜인들이 그 찌꺼기를 훔쳐다가 도리어 우리를 업신여기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우리들의 조국은 예로부터 끊임없이 융성하여 왔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이르러서는 무격을 숭상하여 강토가 날로 개척되었으며 위(衛, 衛滿)․유(劉, 漢)․양(楊, 隋)․이(李, 唐의) 침입과 거란, 몽고의 침요(侵擾) 그리고 홍두구(紅頭簆), 흑치적(黑齒賊)의 외환을 겪었으나, 한때 신무영걸(神武英傑)이 주로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과 광개토왕(廣開土王), 백제(百濟)의 위덕왕(威德王)과 동성왕(東城王), 신라(新羅)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 발해(渤海)의 대씨(大氏)와 고려(高麗)의 왕(王氏)가 대를 이어 굴기하여 위엄을 국외에 떨쳤던 것이다. 충용(忠勇)과 지모(智謀)의 장군으로 신라의 김유신과 장보고, 고구려의 을지 문덕과 양 만춘, 고려의 강 감찬과 김 방경과 같은 인재가 배출하여 나라의 간성(干城)이 되었으며, 천하가 두려워하여 강국(强國)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고려가 쇠하고 이씨 조선이 흥하자 태조가 나라를 평정한 이래로 웅재(雄才) 대략(大略)의 태종과 세조 같은 이가 있고, 또 장상(將相)의 보필을 얻어 안으로 다스리고 밖으로 방어하여 한 때 국운이 크게 융성하였으나, 그 후 태평이 오래 계속되어 문무의 벼슬아치들이 주색에 빠지고 붕당을 지어 권력다툼을 하며 국방을 돌보지 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진년에 일본이 침입하자 온 나라가 창황하여 조신들은 서로 바라보고 안색만 변하였을 뿐 꼼작하지를 못하였는데, 다행히 이 순신과 권 률, 곽 재우, 조 헌, 김 천일 등 제공(諸公)들이 몸을 바치어 나라를 구함으로써 위태로움을 돌리어 평안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일이 끝나게 되자 또다시 펼치지 못하게 되어 문귀에 구애되고 어의에 끌리는 한 푼 어치의 가치도 없는 상담이 마침내 병자호란을 가져오게 하였다.
아래로 내려와서 말엽에 이르러서는 자주 강화의 굴육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태연하여 수치로 여기지 않고, 되는대로 나날을 보내게 되어 나라를 근심하는 자는 태평하고 무기력한 정부에 대하여 벌써 그 마음을 알게 되었다. 대개 입국(入國)의 정신을 잃게 되면 곧 나라는 망하는 것이니, 어찌 경술년을 기다려 비로소 망했겠는가? 다만 주인이 떨어져 노예가 되고, 제자가 스승에게 칼을 겨누게 된 것만이, 즉 신라 첨해왕(沾解王) 7년에 신라의 신하 석우로(昔于老)는 왜의 사신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조만간 너희 왕을 염노(鹽奴)로 삼고, 왕비를 식모로 삼겠다” 라고 하였고, 또 벌휴왕(伐休王) 10년에는 일본에 큰 기근이 들어 신라에 식량을 구하려 왔다. 그리고 고려 문종 때는 일본의 살마주(薩摩主)와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와서 번번히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백제 고이왕(古爾王) 50년에는 왕자 아 직기(阿直岐)와 박사 왕인(王仁) 이 처음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경전과 논어, 천자문을 가르치고 또 각종 공업을 전하였다.
또 백제 무령왕(武寧王) 11년에는 박사 단양이(段楊爾)로 하여금 일본에 오경(五經)을 전하게 하고, 위덕왕(威德王) 23년에는 불경과 더불어 승니(僧尼), 불공(佛工), 사리(舍利)와 승사(僧師), 토목공(土木工), 와공(瓦工), 화공(畵工)을 보내어 이를 교수하였으며, 무왕(武王) 2년에는 역서(曆書), 천문학(天文學)등을 전하여 이를 가르쳤던 것이다. 수치는 수치이고 아프고도 또 아픈 일인 것이다.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가볍게 여기는 버릇은 족히 국가의 위태로움과 허약함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니, 그 유폐(流弊)가 극단에 이르러서는 무풍(武風)이 적을 길러줌으로써 자중(自重)을 삼게 되어 명나라가 망한 까닭과 같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나는 새가 없어지자 좋은 활은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자 사냥개는 삶아 먹게 되는 것과 같은 데서야 그 사기(士氣)를 꺾어줌이 또 이에서 더 심한 것이 있겠는가?
김경손(金慶孫), 한희유(韓希愈), 김덕배(金德培), 이방실(李芳實), 정세운(鄭世雲), 안우경(安遇慶) 등 제공들은 모두 우리 한국의 명장들인데, 몽고의 난이 끝나고 왜구가 격파되고, 홍두적에 승리하고, 내란이 평정되자 논공행륙(論功行戮)에 있어서 혹은 귀양보내고, 혹은 노예로 삼고, 혹은 죽이기도 하였다. 또 군사를 청하여 동정(東征)해서 도추(島酋)를 크게 무찌른 정지 원수(鄭地 元帥)는 옥에 내려졌고, 명나라를 막아내고 왜구를 쳐부셔 공이 한 나라를 덮을만한 최영 도통(崔瑩都統)은 목을 베어 버렸다. 송악산이 괴로워서 슬퍼하고 박연 폭포도 울부짖는다. 아아! 한양의 일이야 차마 말인들 할 수 있겠는가? 익호 장군(翼虎將軍) 김덕령(金德齡)은 마침내 쇠뭉치와 칼날 밑에서 죽었고, 바다에서 첩보(捷報)를 올린 정문부(鄭文孚)는 문자옥(文字獄)으로 목을 매게 되었으며, 장군이 된지 10년이 되어 도망병 하나를 목벤 것으로 해관(解官) 된 권언신(權彦愼)의 불평의 소리는 천년 뒤에도 오히려 탄식의 소리로 들려올 것이다.
곽망우(郭忘憂, 再祐)가 의병을 일으킬 때 말하기를 “위에 있는 자들이 국가의 존망을 생각하지 않으니, 초야에 있는 자는 죽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그가 벼슬을 그만둘 때 말하기를 “군신상하(君臣上下)가 마땅히 회오(悔悟)하고 분발하여 동심육력(同心戮力)해서 국력의 회복을 도모할 것으로 만약 이대로 현신(賢臣)을 멀리하고 간신(奸臣)을 가까이 하며, 당파를 만들어 사리(私利)를 누리는 데만 힘쓴다면, 반드시 국가로 하여금 위망(危亡)에 빠지게 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宋)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진회(秦檜)의 죄가 위로 하늘에 사무친 것이니, 아마 종택(宗澤)과 악비(岳飛)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그 심력(心力)을 펴게 하였더라면, 또한 어찌 조그만 조정(朝廷)을 한 귀퉁이에 몰아 넣게 하여 끝내 떨치지 못하게 하였겠는가? 행주에서 대첩(大捷)을 거둔 도원수(都元帥, 權慄)는 진중(陣中)에서 파직되었고, 하늘에 내린 홍의 장군(紅衣將軍, 郭再祐)은 마침내 귀양살이로 끝내 늙게 하였으며, 나라의 위기를 건지고 명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여 천하를 평정할 큰 뜻을 품은 임경업(林慶業)도 또한 간신 김자점(金自點)의 손에 죽게 되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어지고, 두만강의 흐름이 말이 마셔 없어져도, 남아 스물에 아직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였으니, 후세에 어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라고 읊은 남이 장군(南怡將軍)은 한 수의 시로써 살신(殺身)의 화(禍)를 사게 되었다. 간신들이 활개를 치고 열사(烈士)들이 명분(名分)에 죽어버려 원기가 꺾이게 되는 것은 그 내력이 있는 것이다. “현신(賢臣)을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한 것은 전한(前漢)이 흥륭하게 된 까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신을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 한 것은, 후한(後漢)이 기울어져간 까닭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 중국의 제갈 무후(諸葛武候)의 말을 외어보며 눈물이 빗발치듯 함을 금할 수가 없다.
위에서 말한 바는 마치 시랑(豺狼)이 앞을 막는 것은 임금이 밝지 못한 탓이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나의 친구인 육군 참령(參領) 이조현(李祖鉉)은 장문(將門)의 아들로서 용맹이 뛰어나 나이가 아직 스물도 안 되어 능히 맨 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을 수가 있었다. 이에 친척들이 놀래어 이상히 여기고 힘센 송아지가 수레를 끄는 격으로 장차 가문에 화가 될까 두려워하여 몰래 그를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울면서 그를 구하자, 이에 조현(李祖鉉)을 얽어매어서 쇠젓가락에 약을 발라 불에 달구어 온몸을 지짐으로써 근육이 줄어들어 힘을 크게 못쓰게 하였다. 어느 날 옷을 벗고 나에게 보이는데, 화젓가락으로 지진 자국이 겹쳐 있어 몸에 온전한 피부가 없었다. 그는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마다 매우 흥분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후일 개혁에 뜻을 두었다가 죄를 얻어 귀양살이로 떠돌다가 역경 속에서 죽었으니,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슴을 어루만질 때 오히려 통한(痛恨)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아! 인재를 꺾어버림은 조야(朝野)가 서로 같은 것이니, 망하지 않으려고 하여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인재가 이미 모두 꺾어 버림을 당하였는데, 이기(利器) 또한 온전한 보존을 바랄 수 있겠는가? 내가 여기까지 써 내려옴에 마음이 아파 미칠 것만 같다.
대개 박랑사중(博浪沙中)에서 진시황(秦始皇)을 쳐부스던 철추(鐵錘), 무등산의 희고 푸른 기운이 서리는 왜구를 목베던 칼, 박 서(朴犀)가 몽고를 격파하던 포차(砲車)와 철액(鐵液), 조언(趙彦)의 서경(西京,平壤)을 평정하던 포기(砲機)와 화구(火球), 박절도사(朴 節度使, 朴毅長)의 진천뢰(震天雷, 김시민의 현자총(玄字銃)등은 연대가 멀어 아득한 채 남김이 없고, 백년 전 우리 나라에서 파천황(破天荒)으로 창조한 철갑선(鐵甲船)과 비행차(飛行車, 비행차의 역사는 신경준의 비거설(飛車說)에 자세히 보인다)도 또한 다 함께 흙을 버리듯 버리고 말았으니, 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심리(心理)가 무슨 일에만 쏠렸는지 알 수 가 없다. 권세 때문인가? 망국(亡國)의 벼슬이 무슨 영광이 될 수 있는가? 금전 때문인가?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깨어졌는데, 한갖 적에게 양식을 보태어 줄 뿐인 것이니, 사욕이 총명을 가리움이 이에 이르렀단 말인가?
아아! 장성(長城)이 스스로 무너지자 오랑캐의 형세는 이에 떨치어, 드디어 죄가 없는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칼 도마 위에서 목숨을 애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독사 밑에서 죽음을 찾게 하였다. 서리를 밟으면 어름살이 잡히듯이 그러한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며, 쇠란(衰亂)과 모욕(侮辱)된 멸망은 우리가 스스로 가져오게 한 것이다. 총이며 칼을 모조리 뺏기고 난 뒤에 오랑캐들의 난폭함이 심함을 통한(痛恨)한들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백성들의 기운이 여러 차례 좌절을 당하여 온 나머지임에도, 오히려 볼만한 것과 두려워할 만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한성(漢城)의 곤봉전(棍棒戰)과 평양의 석괴전(石塊戰)과 호중(湖中)의 수박전(手搏戰)이며, 그 밖에 씨름, 뛰어넘기, 줄다리기 등은 원래 민간의 유희이지만, 오히려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깃들어 있음이 엿보여 아직 쇠약해 빠져 망하여 버리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꺼려하는 자의 금지하는 바가 되었으니, ‘자유(自由)’라는 두 글자는 한국의 자전(字典) 속에는 있어야 될 것이 못되는 것 같다.
아아! 나라의 역사를 잊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나라의 문헌은 곧 나라의 정신인 것이다. 문헌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것은 여러 국사(國史)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슬프다! 우리 한국은 지금부터 다시는 역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지금까지는 비록 있다고는 하더라도 없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 5천년 이래의 경적(經籍)과 문자(文字)의 화는 처음에 당(唐)나라 총관(總管) 이세적(李世勣)이 사고(史庫)를 불태워 버렸고 두 번째는 원(元)나라 세조 홀필렬(忽必烈)이 고려사(高麗史)를 깍아버린 데에 있었고, 세 번째는 견훤(甄萱)의 군대에 의하여 신라의 경적(經籍)이, 모두 불 속에 들어갔으며, 네 번째는 연(燕)나라의 난리를 만나 기자(箕子)의 역사가 또한 흔적도 없이 그 존재가 없어지고 말았다.
아아 슬프다. 단군사(檀君史), 단조사(檀朝史), 신지서운관비기(神誌書雲觀秘記),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표훈천사(表勳天詞), 지공기(志公記), 도증기(道證記), 동천록(動天錄), 통천록(通天錄), 지화록(地華錄), 고흥(高興)의 백제사(百濟史), 이문진(李文眞)의 고구려사(高句麗史), 거칠부(居柒夫)의 신라사(新羅史), 발해사(渤海史) 등은 다만 그 이름이 남아 있을 뿐, 그 책은 얻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조국이 이미 쇠미(衰微)하여지고 국학(國學)이 날로 허물어지자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나라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조종(祖宗)을 멸시하며 외국에 아첨하였다. 이리하여 정치에 관계된 문자 그리고 전장(典章)과 법도(法度)에 대한 변천과 손익(損益)을 비고(備考)로 거울삼아 볼만한 것은 없애버린 것이 많고, 그 중에 심한 것은 고래의 사책(史冊) 가운데 언어 문자로 외국을 지척(指斥)한 것만 있어도 또한 이를 고치거나 삭제해버렸다. 또 옛날 도의(道義)를 교화시키던 경적문자(經籍文字)로 국수(國粹)가 남아 있는 것은 또한 이단(異端)이라 하여 빼어 버리고 싶지 않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적을 토벌하고 땅을 넓히는 것을 패도(悖道)라 일컬었고, 이웃 나라를 사귀는데 낮추고 겸손하는 것을 본분이라 일컬었다. 많은 책이 전하여 오는 것은 특히 한 성(姓)의 가승(家乘)이며, 대대로 내려오는 노비의 문서일 따름이다.
개인의 저술로 우연히 그 참된 것을 보존하면 이를 억눌러 유전(流轉)치 못하게 하였다. 병사류(兵事類)로 병학통(炳學通), 무예보(武藝譜), 연기신편(演機新編), 위장필람(爲將必覽) 등과 전기류(傳記類)로서 삼년 이십사걸(三年 二十四傑), 신라 수이전(殊異傳), 각간 선생 실기(角干 先生 實記), 이 충무공 전집(李忠武公 全集),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등과 지리지도류(地理地圖類)로서 여지승람(輿地勝覽), 택리지(擇里志), 산수경(山水經), 도리표(道里標),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동열읍지도(大東列邑地圖), 청구도(靑邱圖), 근역도일람(槿域圖一覽) 등과 국어문류(國語文類)로서 훈민정음(訓民正音) 동언해(東言解), 동언고(東言考), 훈민정음도해(訓民正音圖解) 등과 만기요람(萬機要覽), 성기운화(星機運化), 인정(人政), 천학고(天學考), 외국풍토지(外國風土誌),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등의 서적은 태반이나 없어지고 말았다. 또 근세의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 유형원(柳馨遠)들이 찬술(撰述)한 역시․지리․정치․학술 등에 관한 여러 위대한 논술(論述)과 걸작(傑作)들도 모두 세상에 펴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한 대연(韓大淵, 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신경준(申景濬)의 비거책대(飛車策對), 이경규(李景奎)의 오주연문(五洲衍文), 윤 종의의 벽위신편(闢衛新編) 등은 늦게서야 지금에 이르러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이 세기(世紀)의 조류(潮流)에 태어나 외래의 심한 자극을 받아 옛날의 문헌을 끌어내어 조종(祖宗)을 추념(追念)하고 선열(先烈)들을 빛내고 후인(後人)들을 격려하려고 하여도, 잔편 단간(殘編 短簡)으로 그 완전한 것이 못된다. 이리하여 혹은 외국의 기록을 빌어 우리 옛날의 묵은 자취를 엿보자니, 또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도 흩어진 것을 모으고 없어진 것을 살펴, 뜻을 찾는 데에 둔 자는 드물기가 새벽 하늘의 별과 같다. 그리고 근년 몇몇 사람들의 역술(譯述)은 좋은 것이 있기는 하나, 다만 사설(史說)을 찾아 인용함에 그 당시의 망필(妄筆)을 그대로 도습함으로써 빠진 것과 잘못된 것이 있음을 또한 면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러한 것은 대개 문헌을 찾을 수가 없어 우리 나라에는 이미 오랫동안 믿을만한 역사가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외로운 몸으로 중국에 떠돌면서 그 가운데서도 지금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라고 일컫는 장 병린(章炳麟)과 같은 학자를 만나 보았는데, 그는 한(漢)나라 때 현도(玄菟), 낙랑(樂浪), 임둔(臨屯), 진번(眞番)의 4군을 설치한 것이 다만 위만이 할거하고 있던 한 모퉁이의 땅인 줄을 모르고 있었다. 대개 그 당시 열수 이남에는 여러 나라가 독립하고 있어 옛날과 같았던 것이다. 자칭 다문(多聞)과 박식(博識)하다는 양계초(梁啓超)와 같은 사람도 우리 나라에 대하여 도시 고증도 없이 논평한 것이 타당성을 잃어 ‘국문이 없는 나라’니, ‘망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단정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슬픈 일이다. 우리가 모욕함이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감히 장(章)과 양(梁)의 두 사람을 미워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라 나라의 사적은 없어져 그들이 살필 수가 없고, 오직 한서 가운데 나타나는 짤막한 역사와 몇 마디의 말, 그리고 일본인들이 써 놓은 미친 소리와 허튼 수작을 그대로 옮겼을 따름인 것이다. 우리에게 국사(國史)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변명할 것이며, 또 이미 우리나라가 망하였으니 무엇으로써 말할 것인가?
슬프고 슬픈 일이다. 우리들이 모욕을 받는 것은 우리들이 스스로 받도록 마련한 것이다. 장(章), 양(梁) 두사람은 중국인이니 그들이 우리 나라의 역사를 모르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구학선생(舊學先生)들로써 도읍의 건설을 말하게 되면, 능히 제요도당(帝堯陶唐, 堯帝)의 산동(山東) 평양(平壤)을 말할 수 있어도, 신조(神祖) 단군(檀君)의 평양(平壤)을 모르고 있으며, 또 복국(復國)을 요동(遼東)을 말하게 되면, 능히 명 태조(明太祖) 주 원장(朱元璋)을 말할 수 있어도, 동명성제(東明聖帝) 고 주몽(高朱蒙)을 알지를 못한다. 그리고 초동목수(樵童牧竪)들까지도 능히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姜太公)은 노래 부르지만, 노사숙유(老師宿儒)들도 적을 무찌른 강태사(姜太師)를 아는 사람이 적다.
한편 신지식(新知識)의 학자를 칭하는 사람들은 고적(古蹟)을 말하되, 마니산(摩尼山)의 제천단(祭天壇)을 몰라도 애급(埃及)의 금자탑(金子塔)을 자랑삼아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기구(器具)를 말하되, 정평구(鄭平九)가 창조한 비행기는 몰라도 멍 불이 발명한 기구(氣球)는 과장(誇張)하여 말하고, 인쇄활자(印刷活字)는 반드시 독일과 화란만을 말하지, 그보다 수백 년이나 앞서서 창조한 신라나 고려는 아는 사람이 적다. 또 문장을 더듬고 어귀(語句)를 따는 데에 있어서 번번히 이청련(李靑蓮, 太白)과 두공부(杜工部, 子美)만을 숭상하였지, 우리 나라 고유의 학설과 문자는 배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며, 위인(偉人)의 언행(言行)을 말하게 되면, 반드시 와싱턴이나 넬슨만을 들었지 우리 나라 기왕의 철인 걸사(哲人傑士)는 족히 말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이(李), 두(杜)의 문장을 아끼지 않는 바 아니고, 와싱턴과 넬슨의 훈업(勳業)을 숭배하지 않는 바 아니지만, 다만 우리 동포들이 자기의 것은 버리고 남의 것만을 쫓는 것을 원하지 않을 따름인 것이다. 어찌하여 우리 나라의 사람들은 망녕되게 자기 스스로를 얕잡아 보는 근성과, 책을 들추면서도 조상을 잊어버리는 기풍이 아직까지 변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슬프기 짝이 없는 것이다.
아아! 나는 지금 우리 나라의 일을 말하려는 데에 있어서 남의 서적을 빌리고, 남의 말을 중하게 여기는 것을 슬프고 더욱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예컨대 내가 우리 나라의 교화의 원류(原流)를 말하려는 데에 있어서 부득이 명사(明史)와 한서(漢書)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명사의 왕합주(王弇州) 속완위여편(續宛委餘編)에 말하기를 [동방(東方)에 단군(檀君)이 처음 나와서 신성(神聖)의 교(敎)로써 백성을 근후(謹厚)히 가르쳐 대대로 강족(强族)이 되었는데, 그 교명(敎名)으로는 부여에서 대천교(代天敎)라 하고 신라에서는 숭천교(崇天敎), 고려에서는 왕검교(王儉敎)라 하여 매년 10월에 제사를 지냈다.] 라고 하였고, 한서(漢書)에 말하기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무제(漢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겸양(謙讓)하시고 나타나지 마시어 삼신(三神)의 즐거워 함을 받으소서”]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삼신은 상제(上帝)라고 하였다.
그리고 요사(遼史), 금사(金史), 만주지(滿洲誌)를 살펴보면, 요사에 말하기를 [신책(神冊) 원년에 영주(永州), 목엽산(木葉山)에 종묘(宗廟)를 세우고 동쪽으로 천신(天神)의 위(位)를 마련하여 묘정(廟庭)에 단수(檀樹)를 심어 군주(君主)의 수목(樹木)이라 하였고, 황제가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출사(出師)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종묘에 고하였으며, 이에 삼신을 세워 이를 주로 제사 지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금사(金史)에 말하기를 [대정(大定) 20년 12월에 예(禮)로 흥국왕(興國靈應王)이라 높이고, 명창(明昌)4년 10월에 다시 책봉하여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라 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만주지(滿洲誌)에 말하기를 「부여족은 종교로 하늘을 숭배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짤막하지만 구슬과 같이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꺼려대기를 “타인들에게도 또한 이런 말이 있고, 어느 역사에도 또한 이런 일이 실려 있다.”라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아! 우리 나라의 사람들이 만약 신인(神人)이 태백산 단목하(檀木下)에 강림(降臨)하였다는 한 줄의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갈천씨(葛天氏)의 백성이 되거나 무회씨(無懷氏)의 백성이 되었을지 나 자신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만약에 환인상제(桓因上帝)의 말이 전함이 없고, 마니산(摩尼山)의 제천행사(祭天行事)가 없었더라면, 우리들도 또한 시(詩), 서전(書傳)과 신․구약(新․舊約)에서 말하는 것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이성호(李星湖, 瀷), 정다산(丁茶山, 若鏞) 두 선생의 종교론(宗敎論)과 삼신설(三神說)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또한 통털어 선교(仙敎)라고만 칭하고 영원히 무당들의 손에서 더럽혀졌을 것이다.
고구려광개토왕(廣開土王)의 쇄보(쇄寶)가 처음 안휘(安徽)의 정 씨(程氏) 집에 소장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신해년(1911) 나는 정가(程家) 성군(檉君)을 북경(北京)에서 알게 되었다. 이 때 군이 말하기를 “광개옥쇄(廣開玉璽)는 동삼성(東三省)의 어떤 시골 노인으로부터 얻었는데, 이를 대단한 보배로 여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꺼내어 나에게 보이려 하였으나, 마침 손님들이 밀려들어 군은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계속하여 말하기를 “오 록정 장군(吳祿貞將軍)이 동성(東省)에 있을 때 귀국의 고대 인장(印章)과 기물 몇 가지를 얻어 보관하는데, 모두 진품(珍品)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나는 일 때문에 남쪽으로 떠나게 되고 다시 뒷날에 만나기로 하였다. 아아! 지금은 양군(兩君)이 모두 죽어버렸으니, 어디서 다시 그 인물과 그 물건을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인가?
만주 입공(滿洲入貢)의 표문(表文)은 비로소 호남(湖南) 송씨유록(宋氏喩錄)에 보이는데, 송 교인(宋敎仁)의 필기(筆記)에서 말하기를 「동삼성(東三省) 및 각처에 있을 때 만청(滿淸, 淸國)이 아직 입궐하기 이전의 비사(秘史)를 많이 얻었는데, 지금은 모두 동경(東京)에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만주가 고려에 바친 표문이 있어 거기에는 자칭 후금국노재(後金國奴才)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노재(奴才)라는 두 글자의 내력은 참으로 만주가 상국에 대하여 통용하는 말이 되어, 그 까닭에 후세에까지 그대로 내려와 습관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한(恨)되는 것은 송군에게 한번 그 자초지종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봉천성(奉天省)에 있는 기공비(記功碑)는 청인들이 발견한 것으로 나는 처음 들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북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수천리의 땅을 넓히고, 남으로 왜구를 정벌하여 신라를 구하였다고 쓰여 있는 이 비석은 지금 봉천성 집안현(輯安顯)에 소재하나, 거기에는 「은택(恩澤)이 황천(皇天)에 미치고 위무(威武)가 사해(四海)에 입혔다.」라고 한 글귀가 있으며, 자획이 힘차서 중국의 금석가들이 한(漢), 위(魏)나라 사이를 출입하는 것이라 하여 그것을 탁본(拓本)하는 자가 대단히 많다.
명석포(明石浦)의 백마총(白馬塚)은 왜인들이 지칭하여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김 세렴(金世濂)의 해차록(海차錄)에 말하기를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에 「오오진천황(應神天皇) 22년에 신라가 명석포를 정벌하여 왔는데, 오오사카(大阪)에서 겨우 백리의 거리이다.」라고 실려 있다고 하였으며, 또 「아카세끼(赤關) 동쪽에 한 언덕이 있는데, 왜인들이 이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것은 백마분(白馬憤)인데, 신라병이 일본에 깊숙이 침입하여 일본이 화해를 청하자,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그 피로써 맹서를 하고 그 말의 머리를 이곳에 묻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 희현(申希賢, 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말하기를 「신라 진평왕 4년 일본 비다츠천황(敏達天皇) 20년에 신라가 왜군을 서쪽 변방에서 정벌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안 순암(安順菴, 鼎福) 기(記)에 말하기를 「지금 동래 앞바다 절영도(絶影島)에는 고루(古壘)가 있는데, 일본에서는 신라 태종이 왜를 정벌할 때에 쌓은 것이라 하여, 그 까닭에 태종단(太宗檀)이라고 칭한다.」라고 하였다.
우리 해군의 위인을 말하려면 일본사를 인용하여야 한고, 우리 철함(鐵艦)을 말하려면 영국인의 기록을 보아야 하며, 심지어 우리 나라 국문의 간편함을 말하려 해도 미국 선교사들의 말을 빌어야 하게 되었으니, 슬프고도 또 슬픈 일이다. 이렇게 문헌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누구의 죄인가?
나는 지금 큰 소리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위하여 말하노니, 중국사, 요․금사(療․金史), 만주사, 일본사, 영국사 등은 원컨대 이를 갖추도록 하였다. 만약 그 당시에 그들이 대신하여 기록함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다시는 우리들 조종(祖宗)의 교화와 종법(宗法)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고, 또 우리들은 우리 선민들의 풍공위열(豐功偉烈)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 우리들은 우리 나라가 마땅히 우리 나라의 역사와 어문(語文)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들의 어리석고 깨우치지 못함이 어찌하여 이렇게도 심한 것일까? 대개 우리들은 5천년의 역사 속에서 성장하였고, 이에서 입고 먹고 버젓이 나라를 세워 다른 나라와 더불어 자웅을 다투어 왔다. 어찌 예의도 없고 교육도 없고 또 덕망 있는 인물이 없었다면, 연면히 나라를 빛내서 그토록 내려올 수가 있겠는가? 홀로 어쩌자고 다른 나라가 대신 기록해 준 것이 없더라면 우리들은 우리의 일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것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잊어버리는 것도 정도가 지나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도 또한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이대로 오랫동안 흐리멍덩하게 지나게 되면,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얼마 안되는 기록과 타국인들이 기록한 얼마 안되는 말들로 지금에는 보배롭게 여겨지지만, 앞으로 얼마 안가서 남김없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단군(檀君)의 자손이니, 부여민족(扶餘民族)이니 하는 것은 겨우 망한 나라의 명사로 타국의 역사에 남을 것이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는 영원히 ‘대한(大韓)’이라는 두 글자의 자취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슬프고 아프다. 아정(雅亭) 이 덕무(李德懋)는 말하기를 “발해사(渤海史)의 편찬이 없음을 보면, 고려가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고, 또 중국의 공 인화(龔仁和)가 말하기를 “남의 나라를 멸하고, 남의 터전을 흔들어 남의 인재를 끊기도록 하고 남의 교화를 없애버리며, 남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남의 조종(祖宗)을 헐어버리면 먼저 그 역사를 없애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아! 우리 동포들도 오늘에 이르러서야 또한 이 말이 통절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우리들은 신명(神明)의 자손으로 다함께 생(生)을 타고 낳고, 기(氣)를 품고 있으면서 이토록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렸으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이미 늦은 것이다. 그렇다고 어찌 다 멸망하여 없어지는 것을 감수할 것인가? 금협산인(錦頰山人)은 하동(河東)의 썩은 뼈를 꾸짖으면서 대동사(大東史)를 썼고 곡교소년(曲橋少年)은 서산의 기우는 해를 탄식하면서 광문회(光文會)를 만들었으며, 홍암나자(弘巖羅子)는 대종교리(大倧敎理)를 밝히고 주 시경(周時經)씨는 조국의 문어(文語)를 연찬(硏鑽)하였다.
우리들의 도(道)는 외롭지 않아 그처럼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것이니, 바라는 바는 그것을 이어 받을 사람들이 일어나서 서로 찾고 호흥하여 준다면, 이것으로 망한 것을 후회하는 한 줄기의 상징이 되어 족히 장차 죽어가려는 인심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며, 나라의 얼을 얽어매어 흩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아아! 동포들이여 오늘이 어떤 때인가? 노예 밑에 노예가 되고 옥(獄) 가운데 옥에 빠져 있다. 아마 그대로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흐리멍텅하고 태만하고 거칠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면, 장차 나라가 망하는 것만이 그 죄를 덮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멸종의 화를 입게 될 것이다.
나 자신 이학(理學)은 마땅히 숭배하여야 될 것을 알고, 또 철학도 마땅히 연구하여야 될 것을 알고 있지만, 다만 오늘과 같은 세대에 태어나서 수치를 씻고 죽음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언제 인성(人性)과 천명(天命)을 떠들고 사물(事物)을 해부 분석할 여지가 있겠는가?
내가 가장 경애하는 노학자들과 선진학도들이여! 자양(紫陽, 朱子)에게 두 무릎을 꿇고 감히 스스로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하는 것은 겨우 남이 배앝은 찌꺼기의 침을 핥는 것뿐인 것이며, 온몸을 백조(白潮, 新文學의 流派)에 적시는 것은 그 껍데기를 입어 보기도 전에 먼저 나의 정신을 장사 지내는 것이 된다. 원수가 멸망되지 않는다면 백록(白鹿, 朱子)의 죄인이 될까 두려우며, 문명을 몽상만 한다면 끝내 벽안(碧眼, 西洋人)의 좋은 벗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아! 제군들이여! 한 번 생각하여 볼 일이다.
아아! 아아! 단군(檀君)의 문명은 이미 노장(老壯)들의 머리 속에는 관념조차 남아 있지 않고, 일본의 진무 천황(神武天皇)과 메이지 천황(明治天皇)만이 우리 어린 자제들의 머리 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의 조상, 우리의 역사, 우리의 글, 우리의 말인 것이며, 분명히 우리들의 머리 속에 박혀 있고, 분명히 우리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지만, 감히 국조니, 국사니, 국문이니, 국어니 하지를 못하고, 겨우 선사(鮮史)니, 선문(鮮文)이니, 선언(鮮語)니 밖에는 부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하다가는 앞으로 선인(鮮人)의 명사도 또한 절멸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나라가 망한 뒤의 나라의 얼은 도대체 어디에 맡길 것이며, 떠돌다가 그 어디에 머물 것인가? 아아! 동포들이여! 모름지기 마음을 넓히어 잠시나마 그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는 나라의 얼을 용납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감히 도(道)를 갖춘 여러 군자들을 지적하여 하는 말이 아니며, 또 우리들의 단점을 끄집어내기 좋아서 하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일부러 말을 꾸미어 우리 나라의 사람들을 속이려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긴박한 정세에 무엇을 꾸며대고 무엇을 돌아볼 때가 못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원통하고 분하고 가슴이 막히어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어, 오직 슬픔만을 알릴 뿐 말을 가리어 할 수도 없다.
국치(國)恥)를 잊었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들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는 저 만악(萬惡)의 일본이 아닌가? 위로 올라가 삼국 시대에도 우리에게 도둑질하고, 우리를 침범한 일이 여러 번 있었으며, 임진년(1592)에 이르러서는 강권만을 믿고 우리를 유린하였고, 을미년(1895)에는 우리의 명성황후(明成皇後)를 시해하였으며, 갑진년(1904)과 을사년(1905)에는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버렸고, 병오년(1906)과 정미년(1907)에는 우리의 군주를 협박하여 양위케 하였고, 우리의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또 우리의 의병을 학살하고 우리의 생령을 어육(魚肉)으로 만들었으며, 경술년(1910)에는 우리 나라를 멸망시키고 우리 동포들을 소나 말처럼 만들었다.
우리들은 생각만 하여도 그들의 전후에 저지른 죄악은 목멱(木覓, 南山)의 대나무와 한강의 물을 다하여서도 그 만분의 일도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아아! 우리 나라 사람들의 건망증이여! 우리가 몸소 그 해독을 받고도 일이 지나가고 환경이 바꿔지면 막연히 대처할 것이다. 우리 나라 치욕사의 기록을 읽어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크게 슬퍼하고 한탄할 것이나, 지나쳐 버리면 막연히 대처할 것이니, 그 건망증이 심하다고 하겠다.
한심한 것은 화친 사절(和親使節)을 보면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증물(贈物)을 보면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백주에 칼을 어루만지면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밤중에 돈을 주면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오오사카(大阪)의 포공창(砲工廠)을 한 번 보면 잊어버릴 것이고, 요주만(膠州灣)의 선전문을 한 번 보면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고간 대작에 후한 녹을 주면 기쁘게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관광을 시켜 영화를 누리게 하면 놓칠까 근심하여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심지어 우리들을 채찍으로 갈겨도 또한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우리들을 어육으로 만들어도 그를 잊어버리고 말 것이니, 잊어버리는 것이 이렇게 많고서야 국치는 끝내 씻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계림(鷄林, 新羅)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자(臣子)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에서 채찍과 망치로 맞을망정 왜국의 작록(爵祿)은 원치 않는다.” 라고 한 것은 신라 박 제상(朴堤上)이 왜왕을 꾸짖은 통쾌한 말인 것이다. 그리고 “빨리 나를 베어라. 우리 백만의 의병이 나의 머리 속에 있다.”라고 한 것은 이 남규(李南珪)가 일본 관리를 꾸짖은 통쾌한 말인 것이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그의 기절(氣節)을 굽혔더러면 생명을 보전할 수 있고 관작과 녹도 또한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런 짓을 하지 않아 수치를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불침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난도질을 당하면서도 뉘우치지 않아 그 늠늠한 기질은 지금에도 오히려 생기가 뻗쳐 있다.
대개 한 사람의 충성과 의분의 기개로도 족히 사나운 오랑캐를 삼킬 수 있거늘, 하물며 애국의 마음으로 치욕을 잊어버리지 않은 자에 있어서랴. 아아! 동포들이여! 몸이 아직 썩지 않고, 마음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임진년 4월에 우리가 적을 격파하던 기념일을 잊었단 말인가? 국민들이 치욕을 앎으로써 싸움에 이기어 그러한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을미년 8월 20일을 잊었단 말인가? 그리고 갑진년 3월 20일을 잊었단 말인가? 그리고 병오년 7월 19일, 24일, 31일을 잊었단 말인가? 또 정미년 8월 10일을 잊었단 말인가? (8월 10일은 나 개인이 당한 바를 말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 해에 노략질을 당한 참화(慘禍)는 이루 말할 수 없어, 피가 뿌려지고 혼이 날라가고 온 들판이 낭자하였으니, 어찌 우리 신씨 문중의 일 뿐이겠는가? ) 그리고 경술년 8월 29일을 잊었단 말인가? 이는 모두 우리 한국 3천만 동포가 일본인에게 학대를 받은 기념일인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치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가 없다.
치욕을 알면 피로써 주검을 할 수 있고, 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할 것이며, 치욕을 잊은 자는 다만 피가 식었을 뿐만 아니라 피가 없는 것이다. 치욕을 아는 자의 피를 알지 못하니, 어찌 치욕을 씻어 버릴 피가 있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아! 동포들이여! 피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을미년 이 충헌(李忠憲)과 홍 충의(洪忠毅)의 피는 우리들이 혹 잊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을사년 이후 순국한 여러 선열들의 피도 우리들은 장차 모두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슬프다! 민 충정(閔忠正, 泳煥)의 피여! 5조목의 통감 협약(統監協約)이 강제로 협박되어 끝내 이루어지자 서울로 달려 올라와서 궁문을 두들겨 힘껏 간하였으나, 군신 상하의 심리가 일치되지 않고, 사회의 결합이 견고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하는 수 없이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목에서 가슴까지 이르니, 피육(皮肉)이 헝크러지고 피가 만지(滿地)를 적시면서 죽어갔다.
슬프다! 박 참령(朴參領, 勝煥)의 피여! 장군의 심사를 아는 사람도 적을 것이다. 그는 을미년 이후로 원수를 무찌르고 울분을 풀고자 하는 뜻을 품어 오다가 마침내 광무(光武, 高宗)가 양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때를 기다렸다. 그 며칠 전 그는 대궐 안으로 뛰어들어가 몸을 바치어 추악한 무리들을 없애버리려고 하였으나, 매양 지척에서 화가 임금에게 미칠가 염려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울분을 품은 채 영내(營內)로 돌아갔다.
그 때 각 부대의 탄환은 모조리 거둬들여 없었는데, 갑자기 한국 군부대신과 일본군 사령관이 황제의 칙서를 전하며 각 장령(將領)들을 대관정(大觀亭)에 소집하였다. 이 때 박 승환(朴勝煥)만이 가지 않았는데, 일본 교관들이 독촉을 하고 일본병들이 그를 둘러싸는 것을 보면 놈들의 심사를 누구나 알 수가 있었다. 단번에 적을 무찌르려 하여도 고군무원(孤軍無援)으로 어찌할 수 없고, 차마 눈으로 한성(漢城)의 참혈을 볼 수가 없어, 쾅하는 소리로 스스로 그 배에 총을 쏘아 피를 솟구치며 즉사하니, 우리의 사졸(士卒)들이 의분에 떨어 일어나 수많은 적을 죽여버렸다. 이리하여 그는 살아서는 광무조(光武朝, 高宗朝)의 제 1급 대대장이었고, 죽어서는 한반도 천백세의 영웅스러운 귀신이 되었다.
슬프다! 안 중근 의사의 피여! 그는 마음속으로 조국을 뼈아프게 여겨 다년간 동지를 호소(號召)하며 다니다가 결사 동지 몇 사람을 얻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병든 국민들과는 큰 거사를 할 수 없음을 알고, 하르빈까지 추적하여 힘차게 팔을 들어 쏜 것이 여섯 개의 탄환이 명중하였으니, 참으로 통쾌하고 위대한 일이었다. 그는 먼저 원수의 피를 마시고 다음에 죽을 길을 찾았던 것이다.
슬프도다! 홍 범식 군수(洪範植 郡守)의 피여! 나라의 주권이 빼앗겨지고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자, 거짓 꾸며진 유조(諭詔)를 땅에 내던지고 크게 「君辱國破 不死何爲(임금이 욕을 보고 나라가 깨졌는데,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여덟 글자를 벽 위에 커다랗게 써 놓고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다.
아아! 그 때 360주(州)의 군수들이 저마다 모두 금산(錦山) 군수와 같았던들 우리들은 어찌 그토록 쉽게 망하였겠는가? 이 밖에도 대마도(對馬島)에서의 최면암(崔勉庵, 益鉉)의 피와 원주대(原州隊)의 민 긍호(閔肯鎬)의 피, 헤이그(海牙) 평화 회의의 이 밀사(李密使, 儁)의 피, 종현(鍾峴) 이 재명(李在明)의 피, 창의 장군(倡義將軍), 이 강년(李康年)과 허 위(許蔿)의 피, 그리고 번 학영(潘學榮)과 같은 80객(客) 노인으로 할복하였고, 김 천술(金天述)은 20세의 청년으로 우물에 몸을 던졌으니, 이렇게 충성되고 정의로운 기(氣)는 천지에 가득찼던 것이다.
아아! 우리 동포들이여! 치욕을 알만한 피는 여러 선열들이 이미 이를 뿌리로 떠났다. 이제는 치욕을 씻기 위하여 피를 흘릴 것은 뒤에 죽는 자들의 책임인 것이다. 동포들이여! 국가는 아직 회복되지 않고 국치는 더할 바 없지 않은가? 제군들은 모든 것을 잊었다는 말인가, 또는 잊지 않았다는 말인가?
우리들은 우리 나라 30년 전 개혁당의 영수였던 고균(古筠, 金玉均) 그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가? 아아! 피가 춘포(春浦)에 뿌려지고, 살덩어리가 양화(楊花)를 날아도 처음 뜻한 바로 펴지 못하였으니, 그 심적(心跡)을 밝힐 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 그 곳을 지나갈 때 천고(千古)의 기나긴 한숨을 금할 수가 없다. 김 옥균이 먼저 정치의 개혁을 주창하여 드디어 난당(亂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으니, 전제 시대에는 면하기 어려운 것이며, 이미 역적이 되었다면 죽는 것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한 번 생각하여 볼 일이다. 당일 그를 칼로 찌른 자와 이에 부화한 자들은 과연 나라를 위한 충성에서 나온 것일까? 친한 친구 한 사람을 죽이므로써 개인의 영화와 이익을 바라는 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 일이 있은 후 나라가 망하기까지 어느 누가 그 푸른 피를 생각하여 본 일이 있는가? 다만 일본인들만이 영웅으로 숭배하여 위대하다고 찬양하였으나, 이것은 도리어 김 옥균의 죄를 더하게 하는 누(累)가 되었다. 혹은 그로 하여금 독립의 허영을 꿈꾸는 자라 하여 꾸짖을 것인가? 혹은 그로 하여금 부귀를 도모한 자라고 할 것인가? 그 김 옥균과 홍 영식(洪英植)등은 명문 귀족의 자손으로 명예가 떨치어 능히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자인데, 어찌 모함을 하고 악명를 뒤집어 쓰면서 그런 일을 하였을까? 아아! 혁명 선구자의 피를 국민들은 욕할대로 다 하였으니, 여기에 다시 냉혹한 거짓말까지를 하면서 영원히 잊어버려야 할 것인가?
정 재홍(鄭在洪)이 자살하였을 때 사람들은 헛된 죽음이라고 하였고, 심지어 그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아아! 나는 그의 유고(遺稿)인 「사상칠변가(思想七變歌)」와 그의 아들에게 주는 글을 읽어보았는데, 거기에서 그가 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勿怕死(죽음을 두려워 말라)’라는 세 글자로써 국민들을 깨우쳐 주었으니, 국민들이여! 정(鄭)씨의 피도 또한 자유를 물주어 북돋우는 데에 비료가 되었던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피를 흘리는 것이 나라가 망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옳기는 하다. 그러나 치욕을 알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조국 광복에 해가 되는 것이니, 따지고 보면 우리들이 치욕을 알아야 된다는 것은 요컨대 반드시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혹자의 말대로 피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옳다고 한다면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 어리석고 둔해져 부끄럼을 모르는 데까지 이르고야 말 것이다. 국민들이 그렇게 어리석고 둔하고 부끄럼을 모르게 된다면, 그 원수를 쳐 없애고 나라를 중흥(中興)시킬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선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급격히 유혈의 행위를 하게 된 것은 모두 국민들이 부끄럼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아아! 주(周)나라 장 홍(萇弘)의 벽혈(碧血)이 나라에 도움이 없다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선열들의 순국의 피를 우리 한인(韓人)들이 보고 느끼는 데에 있어서, 나는 감히 우리들이 잠시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으나, 중국인들이 보고 느끼는 데에 있어서, 그 생명은 희생을 하면서 그 국민들에게 각성을 촉구한 것은 나는 오직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번 열사(潘烈士) 종례(宗禮)인 것이다.
즉 을사년 겨울에 번 군은 인천에 왔던 길에 일인들이 우리를 협박하여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민충정공(閔忠正公, 泳煥)의 유서를 읽고 나서 비분을 참을 수가 없어, 중국도 장차 한국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을 깊이 염려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유서 14조를 중국 정부에 전달하였는데, 그 실행의 여부는 나로서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본의 야심으로써 장차 이런 따위의 협박의 조약이 반드시 중국에 제출될 날이 있을 것으로 안다. 입술이 떨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것은 번 군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컨대 우리 동포들은 국치를 잊지 말 것이며, 또 중국인들은 국치가 앞으로 오게 될 것을 미리 막아 일찍 경성(警醒)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아! 산천이 옛모습 그대로요, 인물도 아직 남아있다. 삼각산 밑 건천동(乾川洞)과 대동강 위 석다산(石多山)에는 다시금 신령이 뛰쳐나와 고고(呱呱)의 소리를 지를 것인가? 상당산성(上黨山城) 국토봉(國土峯)에는 다시금 조 문렬(趙文烈)을 이어 일어날 자가 없는가? 영양강(榮陽江)의 정 충신(鄭忠信)과 추풍역(秋風驛)의 정 기룡(鄭起龍)은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창해역사(滄海力士)는 그 누구이며, 함흥삼걸(咸興三傑)은 그 누구인가? 안 중근(安重根)은 다시금 황해(黃海) 사이에 부활할 것인가? 소나용사(素那勇士)의 가림열부(加林烈婦)와 황진 장군(黃進將軍)의 촉석의기(矗石義妓, 論介)는 천고(千古)에 홀로만 있을 것인가? 태백산 밑 우리의 가려(佳麗)한 산수와 우리의 위수(偉秀)한 남녀들은 그 가운데는 반드시 인물이 있어서 부르면 뛰어나올 것만 같다. 이 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정암(靜庵, 趙光祖)과 율곡(栗谷, 李珥)은 우리 나라의 공자(孔子)이다. 정암은 항상 말하기를 “나라를 근심하는 것을 자기 집을 근심하듯 하여라”라고 하였으며, 또 율곡은 양병 십만론(養兵十萬論)을 주창하여 국민들이 퇴축(退縮)하고 피비(疲憊)한 성품을 구해내고 더 나가서 국방을 공고히 할 것을 미리 헤아려 생각하였고, 서산(西山, 休政)과 사명(四溟, 惟政)은 우리 나라의 석가(釋迦)인데, 서산은 위병을 거느리고 산에서 내려와 한 번 싸워 삼경(三京)을 회복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산이 싸워 승리를 거두자, 명나라 장수 이 여송(李如松)은 글을 보내어 그를 칭송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적을 토벌함에 충의가 해를 뚫으니 흠앙(欽仰)하여 마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또 시를 지어 보내기를 「공리(公利)에는 뜻이 없고 전심으로 참선(參禪)만 하였는데, 지금 왕사(王事)가 급함을 듣고 무리를 거느려 산마루를 내려서다(無意圖功利 專心只學禪 今聞王事急 總攝下山巓)」이라 하였다.
사명은 칼을 짚고 바다를 건너가 한 마디의 말로 왜국을 항복시켰다.(사명이 일본 강호(江戶)에 사신으로 갔는데, 이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위병들을 많이 세워 영접하였다. 그러나 사명은 눈을 흘기며 태연 자약하였다. 이를 본 히데요시는 조용히 묻기를 “귀국에는 진귀한 물건이 많다는데, 가장 보배로운 것은 어떠한 물건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사명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왜인들의 머리를 최고의 보배로 여긴다.”라고 하여 히데요시를 송연(悚然)케 하였다.)
이렇게 유림(儒林)과 사문(沙門)에서 대대로 인물이 나왔는데, 금일에도 또한 이를 이을 자가 있을 것인가? 우리 나라의 종교는 지금에 와서 보잘 것 없지만, 옛적에는 스스로 세워 교에 통달하는 자도 있었다. 누가 우리 나라에는 십자가(十字架)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세월은 화살과 같아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목을 당기어 동쪽 하늘을 보라, 아무 소리도 아무 냄새도 없으니 어찌 하늘이 우리 한국을 버렸단 말인가?
아아! 나는 크롬웰과 단테를 한반도에서 불러일으키고 싶다. 관서(關西)의 홍 경래(洪景來)와 호중(湖中)의 신 천영(申天英)과 같은 그러한 사람이 혹 소리치며 나오지나 않을까? 나는 황화강 72귀웅(黃花岡七十二鬼雄)을 청구(靑邱, 韓國)에 맞아 들이고 싶다. 금산(錦山) 7백 의사(義士)와 같은 그러한 사람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나지나 않을까?
예로부터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또한 죽지 않는 사람이 없다. 망하고 또 죽고 하는 것도 또한 도(道)가 있는 것이니, 우리는 안일하게 적을 맞아 화해를 빌며 경보(警報)를 듣고 도망만 할 것인가? 오늘날의 일은 전쟁이 아니면 즉 화해인 것인데, 한결같이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매국이라고 한 것은 대원군의 침통한 말인 것이다. 그리하여 의연히 결단을 내리어 우리 나라의 위세를 떨치게 하였던 것이나, 후진의 소부(小夫)들이 도무지 알지도 못하면서 혹은 그를 배외(拜外)라 하여 비방도 하고 혹은 그를 완고하다고 하여 조소하기도 하였다.
그러한데도 당일 적의 경보가 바야흐로 전하자 당국의 대관들은 천가(遷駕)하고 화해할 것을 부르짖었으며, 또 그 당시의 인사들로 움츠려 엎드리고 쥐구멍을 찾아 숨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소위 개명하고 시무(時務)를 안다는 것이 참으로 이러한 것들뿐인 것인가? 그 때 대원군이 내정을 개혁하고 국방을 공고히 하여 프랑스 군대와 미국 군함을 물리치지 않았더라면, 우리 한국의 기울어져 가는 역사에 어찌 한 줄기의 빛인들 남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아아! 대원군은 참으로 쇄국시대의 영웅이었다. 만약- 20년을 더 있었더라면, 혹 망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르며, 비록 망하더라도 또한 큰소리치고 빛을 내면서 망하였을 것이다.
나는 오늘날 우리 나라의 고상(高尙)하고 명철(明哲)한 선비들과 허심 탄회하게 의논을 하고 싶다. 나는 원컨대 우리 동포들이 다시는 큰소리로 떠들지만 말기를 바란다. 소위 극단의 이상주의이니, 또는 극단의 사회주의이니 하는 것은 잠시 덮어두기로 하자. 요컨대 오늘의 세기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서로 경쟁하는 철혈세계(鐵血世界)인 것을 알 것이다. 멀리 서구 세계를 바라보건대 전화(戰禍)가 바야흐로 급박하여 살덩어리가 날으고 피가 물결치며 거포(巨砲) 한 발에 지축도 흔들릴 것 같다.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세루비아, 게르만과 스라브 등이 같은 한 주(洲)에 살면서 서로 경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리하여 시세의 급박에서, 세력의 상충(相衝)에서, 권력의 저촉에서, 고래 미증유의 대전국(大戰局)을 빚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비록 나라는 망한 나머지라 하더라도 세계조류의 변동을 겪고 나서 진실로 자포자기를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요는 반드시 현실주의자로서 우리들의 머리를 채워야 할 것이다. 아아! 고상(高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냉관(冷觀)일 따름이다. 안락(安樂)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구차스러운 삶 뿐인 것이다. 나도 또한 일찌기 허구(虛構)의 환경을 만들어 스스로 기다려 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갑자기 보살도 되고 천당도 되고, 신선도 되고, 산림처사(山林處士)도 되고, 바다를 떠돌아 보기도 하고, 세상을 도피하여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도 모두 하지를 못하였고 또한 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나라가 이미 망하고 민족이 장차 없어지려는 데에 망국의 죄를 걸머지고 어찌 편안히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며, 또 망국의 노예로서 어찌 사회와 더불어 평등할 수가 있겠는가?
머리를 동해(東海)로 돌려보니, 한 조각의 깨끗한 땅도 우리들의 몸을 용납하여 줄 곳은 없다. 평민이건 귀족이건 우․마(牛․馬)의 고통과 어육(魚肉)의 비참이 나날이 심해가고 있다. 시베리아 벌판을 울리는 기적 소리는 순식간에 바뀌어 장차는 서울의 남대문 밖에서 울릴 것이다. 가죽이 남지 않았는데, 털인들 편안히 붙어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아아! 우리 망국의 백성들이여! 그 어찌 견디어 날 것인가? 아아! 우리 동포들이여! 아직 그대로 건망증에 걸려 있다는 말인가?
슬프다! 우리 한국은 끝내 영원토록 광복되지 못한 것인가? 우리들의 신성한 역사는 영원토록 남아 있을 것이다. 널리 세계 각국의 역사를 보건대 흥망의 사실이 또한 덧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국민들에게 애국심이 남아 있어 일치단결하여 백번 죽어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버티어 나간다면, 즉 사람의 마음은 죽지 않는 것이니, 비록 나라는 망하였다고 하더라도 아직 망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국혼(國魂)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내가 위로 아래로 그리고 사방으로 이를 불러 보련다. 우리들의 신성한 역사는 또 다시 빛을 발휘할 날이 있을 것인가? 아아! 동포들이여! 궐기하여라.
아아! 망국의 원인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이 망국의 원인을 알았다면, 장차 어떻게 망국을 구하여 낼 계책을 꾸밀 것인가? 나는 감히 우리 동포들에게 고하여 말하노니, 아직 죽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수습하고, 지금까지의 건망을 회오(悔悟)하여 지금으로부터는 영원토록 잊어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은 조그마한 한쪽 귀퉁이에서 뜻을 가다듬고 예기(銳氣)를 길러 여러 나라를 통일하여 동방의 대고구려를 건설하였으며, 또 온조(溫祚)는 10인 또는 100인의 단결로써 능히 십제국(十濟國) 다시 백제국(百濟國)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하(夏) 나라 소강(小康)은 1성(城) 1족(族)으로써 중흥하였고, 제(齊) 나라 전단(田單)은 거(莒)와 즉묵(卽墨) 2성(城)으로써 부국(復國)하였으며, 페르샤는 견인과 침용(沈勇)으로써 프랑스 사람들의 자취를 옮기도록 하였고, 미국은 강의(强毅)와 불굴로써 영국인의 군대를 막아냈다.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고생을 참고 견디면서 노력하면서 원수를 뼈에 새기고 만인이 한 마음이 되어 죽음을 맹서하고 나라를 구한다면, 우리 대한의 전도는 참으로 큰 희망이 있는 것이다.
혹자는 비난하여 말하기를 “우리 조종(祖宗)들의 신화공덕(神化功德)은 누가 감히 모르겠는가?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물고 뜯고 하여 경각(頃刻)에도 만변(萬變)하는 날에 옛날의 묵은 자취를 밝혀낸다는 것은 완고하고 우매한 짓이 아니겠는가? 이 충무공도 오랜 옛날 사람이며, 철갑 귀선(鐵甲龜船)도 이미 썩어 없어졌는데, 아직도 그것을 자랑삼아 말하는 것은 꿈 속의 잠꼬대와 같지 않는가? 백성들의 마음은 심한 위협 밑에 위축되고, 백성들의 기운은 가난에 쪼들린 나머지 끊겨졌으며, 남은 목숨이란 실날과 같아 죽음을 구하려도 밑천이 없는데, 사상이란 다 무엇인가? 우리 백성들의 수이(秀異)하여 두각을 나타내는 자들은 일본이 모조리 제거하였고, 그 밖에 전도에 희망이 있을만한 자들은 모두 제멋대로여서 통솔할 사람이 없으므로 준비하여야 될 실력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나라는 작고 백성들은 적으며, 이른바 경각(警覺)이니, 결심이니, 결합이니, 실행이니, 전도희망이니 하는 따위는 어찌 어리석은 사람,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겠는가?” 라고 할 것이다.
아아, 슬프다! 우리 망국의 백성들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못할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말도 마음대로 못하는구나. 나는 여기에서 눈물이 어디에서 솟구쳐 흐르는지 알 수가 없다. 슬프다! 우리 동포들이여! 요컨대 나의 완고와 우매, 나의 잠꼬대를 알지만 나로서는 능히 나의 마음을 억눌러 죽게 하지 않게 함에서이다. 대개 완고와 우매와 잠꼬대와 어리석은 생각들은 나에게는 참으로 잠시나마 떠나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종법(宗法)도 우리들의 종법이며, 선철(先哲)도 우리들의 선철이며, 희망은 더욱 우리들의 희망인 것이다. 이것은 물의 근원과 나무의 근본과 같은 것으로 물이 흐르고자 하는 데 근원을 막아버리고, 싹이 피어나려 하는 데 근본은 뽑아버린다면, 어찌 그것을 옳다고 하겠는가? 오늘날 우리 국민들의 지기(志氣)가 쇠미하여져 피핍(疲乏)으로 떨치어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희망을 걸고 스스로 책려(策勵)한다면 마침내는 반드시 피안(彼岸)에 도달하는 날이 있고야 말 것이다. 하물며 우리 민족의 밑바탕이 아직 마르지 않고 있음에야……
을사년에 일인들이 강제로 조약을 맺을 때 그들은 거함(巨艦)으로 인천 항구를 막아 놓고 대포를 한성을 향하여 장치하였으나, 우리 나라의 군대는 만 명도 되지 못하고, 외교로서는 드디어 알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원로 군인과 경향(京鄕)의 지사(志士)들이 서로 호응하여 몸을 던졌으며, 을사, 병오, 정미, 무신의 4년간에 의병이 봉기하여 앞에서 넘어지면 뒤에서 이어,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극단의 압력 밑에서도 민심이 조금도 굴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날 국채(國債)를 보상하자는 소리가 전국에 퍼지자 아동, 부녀, 상인, 주졸(走卒)까지도 눈물을 흘리며 주머니 끈을 풀어 졸지에 큰 돈을 마련하였으니, 이러한 것은 극단으로 궁핍할 때에도 국민들의 사기가 아직 근절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또한 나의 부르짖음이 반드시 능히 수많은 귀머거리들을 떨쳐 일으키지 못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끝내는 듣도록 우리 동포의 귀머거리를 한 번도 떨쳐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는 달갑게 망국의 백성으로서 일생을 마치는 것이니, 우리들은 장차 무엇으로써 사람 노릇을 할 것인가?
아아! 우리 선민(先民)들의 영혼(英魂)과 장백(壯魄)은 하나로 뭉쳐서 천지에 뻗쳐 있어 만겁(萬劫)이 지나도록 길이 살아 있을 것이다. 또 선민들의 새로운 기물(機物)과 묘물(妙物)들은 세계에 차고 넘치어 사방에 다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제2의 위걸(偉傑)이 나오지 않는다고 할 것이며, 또 다시금 구국(救國)의 이기(利器)를 밝혀내지 못한다고 할 것인가? 나는 아직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 후인들이 노력하여 나가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대내, 대외로 이룬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역사를 여기에 그 대략을 들어, 우리 동포들을 발분시켜 보려 한다. 바야흐로 우리 나라의 문명이 강성하던 때는 안으로 흑수(黑水)와 한남(漢南)의 여러 종족을 합치어 나라를 세우고, 밖으로는 고신(高辛, 帝嚳), 당우(唐虞, 帝堯와 帝舜)의 임금과 때를 같이 하니, 이 때 여러 종족들이 귀화하여 북해에까지 인풍(仁風)이 미쳤다. 뒤이어 기자(箕子)가 와서 귀화하고, 공성(孔聖 ,孔子)이 살고 싶어하였으며, 불가(佛家)에서 환인 제석(桓因帝釋)의 위(位)를 받들게 되고, 중국의 유생들도 단군신성(檀君神聖)의 교화를 칭송하였다.
그리고 요(遼)와 금(金)에서는 섬기기를 부모와 같이 하였고, 만주에서는 상국(上國)이라 칭하여 표(表)를 바쳤다.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강성으로도 일국의 병력을 동원하여 패서(浿西)에서 복멸을 당하였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영웅으로도 십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요좌(遼左)에서 패배하고 돌아갔다. 일본의 살마(薩摩)에서 공물을 바쳐왔고, 대마도에서 내조(來朝)하였다. 원(元)나라는 우리를 10년간이나 침략하였지만, 우리는 수응(酬應)함에 지치지 않았고, 왜인들은 8년간이나 우리를 어지럽혔으나 마침내는 이들을 꺾어 섬멸시켰다. 삼천의 부하를 거느리고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기를 원한 것은 사야가(沙也可, 金忠善)의 귀화하는 항서(降書)였고, 십만의 대병이 의지에서 썩은 뼈가 된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을 때의 슬픈 비명이었다.
오늘날에는 토지도 그대로이고 인민도 또한 그대로인데, 적약(積弱)의 나머지 한 번 차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어찌 우리들이 조종(祖宗)들의 무덕(武德)을 이어 받지 못한 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나라를 세우는 것은 정신에 있는 것이지 넓고 크고 많은 것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백조(二億)의 인도인은 영국에 병합을 당하였고, 7억 평방리의 중국은 일본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그런가 하면 구주(歐洲)의 몬테카로는 나라의 면적이 겨우 6백 평방리이고 인구가 약 25만인데도 워낙 분용(奮勇)과 선전(善戰)으로 굴하지 않는 것으로 이름이 났고, 마레스나토와 같은 나라는 7천 마일의 면적과 3천의 인민으로 능히 자립하여 남의 제재를 받지 않으며, 또 이탈리아령의 어떤 해안에는 1평방리에 4, 5백의 주민이 있는 독립된 공화국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스트리아에 항거한 세르비아와 독일에 항거한 페르샤와 독일이 혼자서 열강을 대적하고 있는 것 등은 최근의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아아! 우리 21만 평방리와 3천만의 인민들도 또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가령 우리들에게는 전도에 희망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편안히 앉아서 스스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냐? 늙은 어버이가 병에 걸려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 돈을 아끼어 집안에 있는 인삼과 녹용을 쓰려고 하지 않고, 이웃에 훌륭한 의사가 있어도 부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 하겠는가?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 장사지내고 추도하고 제사지내는 것은 그 영혼을 위안시키려는 것이다. 만약 유명(幽明)을 달리하였다고 하여 시체를 시궁창이나 골짜기에 내버려 들짐승들의 밥이 되게 한다면, 어찌 마음이 편안할 것인가? 대개 자식된 도리로서 어버이에 대하여 비록 그 병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마땅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구해 보아야 할 것이며, 불행히 죽게 되면 또한 반드시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것이 떳떳한 정인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인민이 국가에 대하여서도 무엇이 다르겠는가? “큰 집이 장차 넘어가려고 하는데, 한 나무만으로도 이를 족히 버틸 수가 있고, 창해(滄海)의 넘쳐 흐르는 물결도 조각배로 가히 이를 건널 수가 있으니, 이것은 사람이 하기에 달려 있다.” 라고 한 것은 우리 선민들의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은 어찌 이 말을 세 번 다시 외어보지 않는가? 슬프다! 우리들이 제각기 마음대로 일을 꾸미어 한 가지도 성취된 바 없는 것은 우리 민족의 여화(餘禍)가 아직 다하지 않아서 그러한가? 그렇지 않으면 위로 하늘이 우리 한국을 도웁지 않아서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렇게 흩어지고 위미(萎靡)해졌는가? 진실로 희망이 없고 가히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달았다고 하여 늘 소극(消極)을 주장하는 자들은 말끝마다 불가능하다고만 하며, 또 실제로 그렇게들 행하고 있으니, 그와 더불어 항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는다. 참으로 무슨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감히 대담하게 결렬 운운하는 것도 또한 걱정할 바가 못된다. 우리들이 스스로 말하여 앞으로의 일을 꾸민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 그것은 어찌 국가와 민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이것으로서 전체와 근본은 삼는다면, 그 진행하는 주장은 비록 각기 다름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길을 다르게 한 것이 같은 곳으로 들어갈 것이니,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겠다.
대개 국가 민족주의가 단일의 집합점인 것이다. 이것을 비유한다면, 어떠한 곳을 향하여 가는데 혹자는 육로를 주장하고 혹자는 수로를 주장하지만, 결국 목적지에 닿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우리 나라 속담에 「모로 가나 기어가나 서울에만 가면 그만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갑(甲)이 을(乙)을 강제로 배를 함께 타자고 못할 것이고, 을이 갑을 강제로 차를 함께 타자고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의 불평등한 지위에서 벗어나 우리의 장래가 오늘날에 비하여 나을 것을 바라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계급이 같지 않고, 희망이 다르고, 뜻을 세움에 있어서 고상(高尙)하고 비열(卑劣)의 구분이 있고 보면, 일을 진행하는 데에도 경중과 완급의 차가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속담에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는 데에 청탁을 가리랴.」라고 하고, 또 「말을 타면 경마잡히고 싶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또 루이의 「연방국가」 루소의 「만권 자유」, 허 유(許由)는 필부(匹夫)로서 천하를 사양하였고, 한(漢) 나라의 무제(武帝)는 만승 천자(萬乘天子)로서 신선(神仙)을 찾았고, 석가모니(釋迦牟尼)는 말하기를 “중생이 곧 나요, 내가 곧 중생이다.”라고 하였고, 마호메트는 “칼날이 번쩍이는 가운데도 천국은 있다.” 라고 한 것 등 사상이 만 가지로 다른데, 사람마다 강제로 똑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다만 바라는 것은 대다수의 국리(國利)와 민복(民福)에 준하여 그것을 전제와 근본으로 삼아 능히 그 정신을 떨쳐 일으켜 집합점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장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또한 큰 걱정은 없는 것이다.
옛날 우리 나라에는 노소(老少)와 남북(南北)의 당쟁은 정권과 권세를 잡기 위한 것이고, 병호(屛湖)와 호락(湖洛)의 당쟁은 위차(位差)와 이론으로써 서로 갈려진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다같은 망국의 백성이 되어 하나도 자랑할만한 한 일이 없는 것이니, 어찌 서로 다투고 서로 깔보는 싸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국가의 흥망은 필부(匹夫)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니, 원컨대 각기 그 직책을 다하여 사견으로써 공익을 어지럽히며 빼앗지를 말 것이다.
프랑스에 자유의 종이 울리자 전국이 두 차례의 유혈을 사양치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 독립의 깃발이 날리자 각 주에서는 다투어 8년 전쟁에 나아가면서도 이의(異議)가 그 사이에 끼어 전쟁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일본인들은 이를 탐내고 보는 눈이 적어 그들의 유신사(維新史)에 실린 것을 보면, 제1기로 유신당(維新黨)이 결성되었는데, 이 때 번 막(藩幕)이 이를 원수와 같이 여겼으며, 정검회(靜檢會)니, 중립사(中立社)니 하는 것이 서로가 모함하고, 소리치고 들이받고, 무너뜨리고 하여 편안할 날이 없었으나, 일단 국회가 성립하자 거연(居然)히 일치의 진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 중국의 혁명사에 있어서도 정부에서 제거를 하고 종사당(宗社黨)이 성토를 하고 보황당(保皇黨)이 반박을 하며, 기타 형형색색이 뭉치고 흩어져 어지럽기 짝이 없었으나, 대세의 흐름에 따라 마침내 공리(公理)에 굴하는 바가 되었다.
대개 우리들의 구국의 종지(宗旨)는 비록 같다고 하더라도, 그 주장이 끝내 사견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일치함을 얻지 못한다면, 쓸데없는 말썽이 생기어 일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방해가 될 것이며, 또한 지체가 될 것이다. 활짝 피어진 숯불도 흩어져 성점(星點)이 되면,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능히 발로 차서 꺼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외줄기의 실이 어찌 능히 동아줄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렇게 위축하고 미약한 것으로, 다만 사치스러운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너무나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속담에 「감나무 밑에 누워서 저절로 감이 떨어져 입에 들어오기를 바란다.」라고 하였고, 또 「도야지 발족 하나와 한잔의 술로써 수레에 가득 실리기를 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으며, 또한 이것은 순우(淳于)씨가 비웃는 바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있어서 사견을 희생하여 근본은 주장하고 인심을 단결하는 것으로써 전제를 삼아야 한다. 요는 통솔 문제가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들을 하나, 나의 좁은 느낌으로서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대개 오늘날의 경우, 시세, 자격으로서 진실로 하나의 통솔자를 얻어 이를 추대하지 못한다면, 다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한 마음을 결속시킬 자를 구하여 그에게 복종하고 뜻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리의 개국 시조 단군은 곧 우리들의 주재(主宰)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국원훈(救國元勳)인 이순신은 곧 우리들의 통제(統制)인 것이다. 우리들은 진실로 민족주의(民族主義)를 품고 조국 광복에 뜻을 두어 실력을 배양하고 간험(艱險)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관적(貫籍)이나 교파(敎派)나, 노소나 남녀나, 원근(遠近)이나 친소(親疎)나를 묻지 않고, 또 유명(有名)이건 무명(無名)이건, 단체이건 단독이건, 온건이건 급진이건, 비밀이건 공포(公布)이건, 공(工)이건 상(商)이건, 농(農)이건 사(士)이건 관계할 것 없이 모두 우리들의 동지인 것이다. 우리들의 동지 가운데서 그 공복(公僕)이 될만한 자를 호선(互選)하여 그에게 일을 맡기고 시키며, 감독하고, 애호하고, 찬조하고, 신종(信從)할 것이며, 그 부당한 것이 있으면 배척할 것이되, 다만 의기(疑忌)하고, 시기하고, 알력을 일삼아서는 안될 것이며, 사람마다 법칙 밑에서 다스림을 받게 되면, 당사자들도 또한 어느 범위 내에서 함부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될 것이다. ‘실력 준비’ 운운하는 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국민들의 상실(喪失), 표탕(飄蕩)한 정신을 회복시킨 다음, 다시 올바르고 굳은 의지를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십년간 끌어모으고 십년간 교훈하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인 것이다.
아아! 오늘이 어떤 날인가? 우리들이 지난 날을 후회하고 장래를 채찍질할 기념일일 것이다. 오직 우리 민족은 우리들의 조종(祖宗)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시조가 신으로 강림하여 개국하던 달에 우리 이 충무공이 나라를 구하다가 난에 순사하였고, 또 우리 시조가 어천(御天)하던 달에 이 충무공이 탄강(誕降)하였다. 우리들은 그 시월 삼일로서 민족의 대기념절을 삼아야 할 것이다.
기념이라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상징의 표현인 것으로, 우리들의 정신이 얽히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조종들은 신성하고 영걸한 분이 대를 잇고 이었지만, 특히 우리의 단군을 받드는 것은 생민교화(生民敎化)의 시조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 조상의 자손들로 어질고 명철한 분이 대대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충무공을 드는 것은 충효(忠孝)와 문무(文武)로 국궁진췌(鞠躬盡瘁)한 것은 4 천년 사이에 오직 공 한 사람 뿐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여기에 귀착하고, 여기에 의거하고, 여기에 모범하고 여기에 이름을 걸고, 여기에 결합하고, 여기에 정성을 바치고, 여기에 맹서하고, 여기에 작업하고, 여기에 복을 구한다면, 황천후토(皇天後土)도 참으로 그 뜻을 좇아 순순히 명하여 말하기를 “가서 치면 내가 반드시 너로 하여금 크게 이기게 하여 줄 것이다.” 라고 할 것이다. 묵자(墨子)가 말하기를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를 치려고 할 때 꿈에 삼신(三神)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은나라 주왕(紂王)을 주덕(酒德)에 빠지게 하였으니, 네가 가서 그를 치면 내가 반드시 너로 하여금 크게 이기게 하여 줄 것이다.”라고 하므로, 무왕이 이에 상(商,殷)을 쳐서 이겼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자손들이 장차 옛 도읍을 다시 세우게 될 것이다. 동사(東史)에 말하기를 「부여의 상신(相臣) 아란불(阿蘭弗)이 꿈에 천제(天帝)를 보았는데, 천제가 말하기를 “나의 자손이 장차 옛 도읍을 세우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 해모수(解慕潄)가 나라 동쪽에서 유화 부인(柳花夫人)을 맞나 주몽(朱蒙)을 낳는데, 이가 고구려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신명(神明)의 자손들이여! 힘을 쓰지 않겠는가?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갑인년 단군 개천 건국 기원절 후 16일(서기 1914년 11월 18일), 이 충무공 한산도 순국일에 단군 후예의 한 사람은 애오산로(愛吾汕盧)에서 찬(撰)한다.


 

      up : 夢拜金太祖(몽배금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