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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07-08-08 오후 3:41:20 조 회 수 1468
제 목 이동녕(李東寧)
내 용

독립운동가․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대통령대리․주석․국무위원장․국무위원․대종교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봉소(鳳所),호는 석오(石吾)․암산(巖山). 충남 천원출신.

1885년 일가가 상경,서울 종로 봉익동에 정착,1888년 평양으로 가서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고 다음해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에 조력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다음해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열렸을 때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하며 국민운동 일선에 나서 이준(李儁)․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1898년 출옥하여 이종일(李鍾一)이 창간한 《제국신문帝國新聞》에서 집필하며 이종일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민족의식과 사상정립을 위하여 수련하였으며,1903년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등과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고,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체결되자 전덕기․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김구(金九)․이회영(李會榮) 등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하고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다가 일본헌병에 잡혀 2개월간 갖은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같이 서전의숙을 설립,한국동포와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1907년 이준․이상설․이위종(李瑋鍾)이 헤이그특사로 가자,귀국하여 안창호․전덕기․양기탁․이동휘․이갑․유동열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도 조력하였으며,상동학교(尙洞學校)를 설립하였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뒤 만주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망명하여 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이회영․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 등과 함께 경학사를 설치하여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그뒤 1919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장 개편되어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이 된 신흥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으며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2년 뒤 한국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3개월간 투옥되었다.

1915년 이상설․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정부를 수립하였으며,독립운동가의 사업조직으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대동신문大東新聞》과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보급하였다.

1918년 길림성에서 대종교 2대교주인 김교헌(金敎獻) 외에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김좌진․여준 등 민족대표 39명이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할 때 대종교 서도본사 포교책으로 활약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일어나자 4월 13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주선하였다. 4월 13일 임시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국무총리에 취임하였고,그해 9월 국내․노령․중국 3갈래의 임시정부가 통합되고,헌법이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어 내무총장이 되었다.

1921년 이승만의 국무총리 지명을 사양하고,이동휘 일파의 임시정부 사퇴 뒤 국무총리대리를 맡아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 뒤 안창호․여운형․조소앙․이시영․차이석(車利石)․홍진(洪震)․노백린(盧伯麟)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24년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였고,군무총장(軍務總長)도 겸임하며 이승만의 장기궐석으로 직무수행이 어렵게 되자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1925년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이 되었고,1926년 임시정부 헌법이 국무령제도로 개정되자 잠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며,법무총장도 겸임하였다.

1927년 임시정부의 주석(主席)이 되어 약화된 임시정부의 기반을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29년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이사장에 추대되었고,기관지《한보韓報》․《한성韓聲》을 발행하였다.

1932년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의거를 김구․이유필(李裕弼) 등과 지도,쾌거를 이룩하였다. 1935년 세 번째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이때 양우조(楊宇朝)․엄항섭(嚴恒燮)․이시영․조성환․차이석․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하여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7년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결속하고 그 진로를 모색하며,1939년 임시정부 네 번째 주석이 되어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내각을 구성,서안(西安)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 뒤 급성폐렴으로 사천성(四川省)치장(綦江)에서 죽었다.

광복 후 1948년 사회장으로 봉안식을 거행하였고,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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