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관리자 email gukhak@gukhak.org
작 성 일 2007-08-09 오후 5:26:12 조 회 수 2250
제 목 종교적 수련법의 차이
내 용
無 無 子


요즘에는 수련이라는 말을 쓰지만 옛날에는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수도(修道)라는 말을 썼다. 수도란 도(道)를 닦는다(修)는 뜻이다. 도를 닦는 것에 앞서는 것은 구도(求道)이다. 구도란 도를 구한다는 뜻이다.
도를 구한다던가 도를 닦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일찍이 공자(孔子)는 “조문도 석사가야(朝聞道 夕死可也)”라고 했다. 풀이하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이야기이다. 도를 구하고 닦는 것이 그만치 어렵고 귀하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한데 요즘에는 도라는 말을 제쳐 놓고 수련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경향은 두 가지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세상이 점점 도(道)와 멀어지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들이 본질적인 도보다 방편적인 것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수련이란 이를테면 방편적인 것을 대표하는 낱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수련도 두 가지로 갈라진다. 수련을 나타내는 글자에서 ‘련’을 練으로 쓰느냐, 아니면 煉으로 쓰느냐에 따라 수련의 뜻과 내용이 달라진다.
練이라는 글자는 ‘익힌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반복하여 연습하고 몸에 익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이 글자를 사용한 수련(修練)이다. 이 때의 수련은 한마디로 몸수련 또는 몸공부라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煉이라는 글자는 불(火)로 쇠(金)를 ‘담금질한다’는 뜻을 지닌다. 煉이라는 글자는 鍊이라는 글자로 대치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이 때는 직접 쇠라는 실체(實體)를 드러내는 것이다. 쇠를 담금질하기 위해서는 불(火)이 있어야 하므로 煉이나 鍊은 같은 뜻으로 수용된다.
수련에서 煉이라는 글자가 쓰일 때는 단순한 몸수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때는 마음공부를 수반한 몸공부라는 뜻을 지니는 것이다. 오행(五行)으로 보면 마음(心)은 불(火)이므로 불로 담금질한다는 글자인 煉은 마음으로 담금질한다는 것을 뜻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수도하기 위해서는 마음공부를 겸함 수련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도를 닦기 위하나 수련의 방법은 크게 나누어 네 가지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가(儒家)의 방법, 불가(佛家)의 방법, 기독교적 방법 그리고 선가(仙家)의 방법이 그것이다.
유가의 방법으로는 보편적으로 독서(讀書)가 손꼽힌다. 독서라고 하면 글자 그대로 책(書)을 읽는다(讀)는 뜻이다. 그러나 유가에서 말하는 수련방법으로써의 독서는 단순한 책읽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모조리 읽었다고 해서 그것을 일컬어 수련 또는 수도라고 하지 않는다.
유가의 방법은 주역(周易)이나 중용(中庸)같은 경전 가운데서 자기 사상(思想)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택일(擇一)하여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읽는 것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주역 만독(萬讀)에 도를 통했다느니 중용을 평생 읽고 도통했다는 따위의 말은 이 방법의 유효성을 증거하는 셈이다. 이러한 경전읽기는 우선 경전의 뜻만 생각하고 모든 잡념을 제거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자기의 생각(思)과 말(言)과 행동(行)이 모두 경전화(經典化) 되고 잡념없는 청정(淸淨)한 정신상태를 경험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유가의 수련방법으로 이 밖에도 존심양성(存心養性) 의 공부가 손꼽힌다. 이 방법은 불가의 참선방법과 대동소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른 자세로 앉아 눈은 코끝을 보고 잡념을 제거하면서 정신 통일을 기하는 공부가 바로 이 방법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불가의 수련방법으로는 독경(讀經), 염불(念佛), 참선(參禪), 진언(眞言), 고행(苦行), 기도(祈禱) 등 여러 가지가 손꼽힌다. 독경하는 방법은 유가의 방식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염불하는 것은 부처님을 염(念)하는 것이므로 정신통일 방법으로 탁월한 효능을 지닌다. 참선은 여래선(如來禪)이니 달마선(達摩禪)이니 해서 구분 짓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은 정심(定心) 곧 마음자리는 찾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언이나 기도의 경우도 그 심리적 효과에서는 염불이나 참선과 다름이 없다. 또한 고행은 석가모니 부처의 6년 고행을 본받아 하는 수련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을 자비(慈悲), 인욕(忍辱), 일체법공화(一切法空化)해 버리기 위해서 모든 고통을 감낸하는 것이 바로 고행이다.
기독교적 수련방법은 한 마디로 ‘기도’에 집약된다. 예수가 40낮 40밤을 광야에서 금식(禁食)기도한 것이 기독교적 방법의 정형(定型)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그 이후에도 시나이산(山)에 올라 혼자 기도하곤 했다. 예수의 기도는 피땀을 흘리는 기도였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예수는 밤새워 기도했다.
기독교의 기도는 골방이나 산속 깊은 곳 조용한데서 천지(天地)를 주재하는 하나님과 대화(對話)하는 것이다. 모든 욕망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무엇을 달라고 애걸하거나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당신의 뜻대로 일하게 하여 주소서”하는 자세로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하나님의 묵시(黙示)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성심성의로 조용히 기도하는 동안에 “성신을 받는다” 또는 “성령을 받는다”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 성신 또는 성령은 비둘기같이 내린다고 하기도 하고 불길같이 내린다고 하기도 한다. 이것은 참된 기도를 한 사람만이 경험하는 것이다.
선가적 방법에 의한 수련의 원형은 우리나라의 단군설화에서 찾아진다. 그리고 그 발전적인 전개양식은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분명히 쓰여 있다.
단군설화에는 백일기도 또는 삼칠일(三七日)기도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기도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산천(山川)기도나 흔히 하는 백일기도는 그것을 말해준다. 기도에 들어가려면 ① 비린 것을 금(禁)하고 ② 남녀 동침(同寢)을 금하고 ③ 부정(不淨)한 빛을 보거나, 소리를 듣는 것을 금하고 ④ 조용하고 깨끗한 장소(닭, 개소리 때위가 들리지 않는 곳)를 택하고 ⑤ 자정(子正)을 택하여 정안수를 떠 놓고 천신(天神)또는 산신(山神)에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의 패턴이다.
이 때의 천신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단군이나 하느님을 일컫는 것이다. 그리고 산신은 지역이나 지방을 주재하는 신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조상은 단군과 산신에게 기도할 때 ①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② 이전에 입은 은덕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③ 소원하는 바를 아뢰었다.그리고 소원의 크기와 작기(大小)에 따라서 천일(千日)기도, 백일기도, 세이레(三七日), 한이레(七日)기도를 했다.
이같은 전통이 오늘날 민간의 기복(祈福)신앙 또는 기복기도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고선도(古仙道) 또는 고신도(古神道)로 표방되는 우리의 전통선도에서는 기도의 목적이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개인적으로는 기도할 때 올바로 살아갈 정도(正道)를 얻음으로써 홍익인간(弘益人間), 광제창생(廣濟蒼生)하도록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둘째, 집단적으로는 보국안민(輔國安民)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의 뜻이 펴지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삼일신고』에 보면 구체적인 기도의 방법과 아울러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으로 수련하는 것이 정통(正統)의 수련방법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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