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관리자 email gukhak@gukhak.org
작 성 일 2006-10-02 오후 3:29:09 조 회 수 1543
제 목 삼법수행의 역사
내 용
삼법수행은 「삼일신고」‘진리훈’에 그 뿌리를 둔다. 따라서 삼법수행의 역사는 신교(神敎)의 고유경전인「삼일신고」의 출현과 출발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원동중의「삼성기전(下)」에 보면 환웅이 교화를 베풀고 천경(天經)과 신고(神誥)를 가르쳐 모든 무리들을 다스렸다 한다. 이것은 「삼일신고」가 본시 환웅 때에 나온 것이라는 말로, 삼법수행 또한 이 시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신교의 근대적 부활체인 대종교의 기록에도, 발해 문왕이 적었다는 「삼일신고 간직해 온 내력」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삼가 상고하건대, <고조선기(古朝鮮記)>에 이르기를,『삼백 예순 여섯 갑자에 한배검께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시고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공(雷公) 등 신장(神將)을 거느리시고, 한밝메(백두산) 박달나무 아래 내려 오시사, 산과 물을 개척하고, 사람과 만물을 낳아 기르시며, 두 돌 갑자 지낸 무진년 상달 초사흗날에 이르러, 신령한 대궐에 거동하사, 한얼님의 말씀(삼일신고)를 가르치시니, 때에 팽우는 삼천 집단[三千團部]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와서 머리 숙여 받들며, 고시(高矢)는 동해가에서 푸른 돌을 캐어 오고, 신지(神誌)는 돌에 이것을 그려 전했다』하였으며,
또 <후조선기(後朝鮮記)>에는『기자(箕子)가 일토산(一土山)사람 부여(扶餘)의 법학자 왕수긍[王受兢]을 맞아 박달나무를 다듬어 은(殷)나라 글로써 <삼일신고>를 써서 읽었다』고 했으니,
그러므로 <삼일신고>는 본디 돌과 나무의 두 책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돌로 된 책은 부여의 나라곳간[國庫]에 간직되었고, 나무로 된 책은 위씨조선(衛氏朝鮮)에 전하였다가, 둘 다 아울러 전란(戰亂)에 잃었다 하며, □□□□□□□□□□□□, 이 책은 바로 고구려에서 번역하여 전한 것이요, 우리 할아버지 고왕(高王)께서 읽으시고 예찬하신 것이니라.
소자(발해문왕-핀집자주)가 이 <삼일신고>를 받들어 온 뒤로, 항상 잘못될까 두려워하며, 또 옛날 돌과 나무에 적은 두 책이 세상 풍파에 없어진 것을 생각하여, 이에 영보각(靈寶閣)에 두었던 임금 지은 예찬을 붙인 진귀한 책을 받들어 한밝메 보본단(報本壇) 돌집 속에 옮겨 간직하노니, 이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대흥(大興) 3년 3월 15일에 간직하노라.”

즉 「삼일신고」를 단군한배검이 삼천단부에게 가르쳤다는 것이며, 이것을 신지(神誌)가 써 둔 고문(古文)과 왕수긍(王受兢)이 번역한 은문(殷文)은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고구려 때 번역하고, 발해 때 해석한 한문으로 된 것만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신시시대 환웅에 의해 가르쳐진 「삼일신고」를, 단군시대의 제1대 단군인 왕검이 계승하여 삼천단부(三千團部)에게 가르쳤다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삼법수행의 역사가 환웅시대에 출발하여 단군시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본기」에 을지문덕이나 을밀선인 등이 이러한 삼법에 대한 수행을 구체적으로 현시함을 본다면, 삼국시대에도 삼법수행의 전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법수행의 묘리를 설파한 고려말 이암의 「단군세기」를 보면

“성․명․정(三眞-편집자주)이 잘 어울려서 빈 틈이 없으면, 삼신일체의 하느님과 같아서 우주만물과도 잘 어울리고 심․기․신(三妄-편집자주)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취없이 오랫동안 존재하게 된다. 감(感)․식(息)․촉(觸)[三途-편집자주]이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다를 바 없으니, 온누리에 두루 그 덕을 베풀고 함께 즐기어, 천․지․인(三妙-편집자주)이 절로 조화를 이룬다.”

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고려시대에도 삼법수행의 전통이 연결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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