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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07-08-24 오후 1:11:54 조 회 수 3149
제 목 [종사상] 삼신(三神)의 나라, 고구려
내 용
김동환․(사)국학연구소 연구원

Ⅰ. 서 론
Ⅱ. 연구를 위한 전제
Ⅲ. 고구려의 삼신신앙에 대한 연구
1. 三의 종교사상적 의미
2. 고구려의 삼신신앙
Ⅳ. 결 론

Ⅰ. 서 론

역사적으로 볼 때 국력과 그 국가의 사상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강력한 국가라는 하드웨어를 위해서는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프트웨어의 중추가 사상임은 모두가 이해하는 바다. 가령 신라의 번성이 화랑도라는 정신적 가치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며, 고려 번영의 한 부분을 논함에 있어 불교를 외면할 수 없고, 조선조 한 때의 융성 또한 유교 사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같은 논리로 고조선의 번영이나, 부여․고구려의 영화의 뒤에도 반드시 틀 잡힌 사상이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상식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설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도 일찍이 공자(孔子) 이전의 중국 사서(《詩經》《禮記》《易經》《春秋》《史記》등)들을 많이 읽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진작부터 유교적 학문이 들어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불교 역시 소수림왕 2년(372년)에 진(秦)나라로부터 순도(順道)에 의해 전해졌다는 것이 나타난다. 또한 영류왕 7년(621년)에 연개소문의 건의에 의해 당나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종교사상과 관련된 연구업적 또한 이러한 유교․불교․도교와 관련된 내용만이 주종을 이룬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천신신앙이나, 고분벽화에서 발견되는 삼족오신앙, 그리고 고구려 건국정신이라 할 수 있는 ''다물(多勿)''의 종교사상적 배경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전무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상들은 고구려를 세우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으며, 고구려를 고구려답게 영위토록 만든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럼에도 체계적인 연구 정리가 실현되지 못한 것은, 관련사서(史書)의 유실로 인한 사료 선택의 제약이 따른다는 점과, 서지학적 문제로 인한 유관 자료들의 의도적인 외면이 또다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에 불교가 정식으로 전래되기 이전의 시대, 즉 제1대 동명왕(B.C.37-B.C.19)으로부터 제16대 고국원왕(331-371)까지의 4백여 년의 시기를, 단순히 광명신앙(光明信仰) 천신신앙(天神信仰) 무축신앙(巫祝信仰) 혹은 수신신앙(水神信仰) 따위로 호도하는 것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으로는 당시 대륙에서 발흥하여 융성함을 이루었던 고구려의 사상소(思想素)를 설명하기엔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여운이 앞선다는 점과, 연구되지 않은 고구려의 사상적 본질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의구심이 겹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한계와 의구심을 전제로, 고구려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즉 고구려 건국신화에 드러나는 하느님신앙(三神信仰)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발견되는 태양삼족오의 삼신신앙(三神信仰)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또한 논구(論究)의 방법으로는 객관화된 기존 자료 외에 신교사서(神敎史書)에 나타나는 자료를 적극 활용하고자 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신교사서가 사료수난의 대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어 대부분 유실 혹은 은닉되었다는 점이 첫째 이유이고, 설혹 그 남아 있는 자료들도 서지학적 명분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으나 나타난 시기만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충분한 사상적 의미를 부여할 가치가 있다는 또 하나의 이유에 근거하는 것이다.


Ⅱ. 연구를 위한 전제

고구려 건국 인물과 연관된 최초의 논문은 일본인 나카(那珂通世)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고구려 주몽전설에 관한 논문을 이마니시(今西龍)가 발표하면서, 시라토리(白鳥庫吉), 이케우치(池內宏) 등이 일제 강점기에 이미 접근한 바 있다.
아마도 한국 학자 중, 종교적 관점에서 고구려의 신화를 처음으로 분석한 사람은 이옥(李玉)이 아닌가 한다. 그는 후일 그의 저술을 통해,"고구려의 신화와 신앙"을 논함에 있어 고구려의 다양한 신앙 양태(태양 활 북 새와 기둥 영웅 말 돼지 무당 등)를 열거 형식으로 접근하는가 하면, 중국의 영향에 의한 유교 불교 도교에 대해서 언급했다. 특히 그는 해모수를 양성구유(兩性具有)의 신으로 추정하였는가 하면, 위의 신앙 양태로 나타나는 제요소들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의 역할로서 이해한 인물이다. 임동권 역시 고구려의 신앙을 제신신앙(諸神信仰)의 형태로 파악하고 이러한 전통을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제신적 요소에서 찾았다. 그는 중국사서에 나타나는 자료(《三國志》〈魏志〉東夷傳. 高句麗條 /《後漢書》〈禮儀志〉/《禮記》〈祭儀篇〉)를 토대로 고구려의 천신 수신(隧神) 귀신 영성(靈星) 토지신 곡신 등에 대해 제사(祭祀)하는 민속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한편 정재서는 중국 도교적 시각에서,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신앙에 대해 접근하였으나, 중국 도교가 아닌 한국 고유의 도교(神敎 仙敎 道家)적인 성격을 도외시 한 듯한 아쉬움이 있다. 김일권도 도교신앙 관점에서 고구려의 별자리신앙에 대해 접근했고, 고구려계의 신화를 도교와 연관시켜 논구한 글도 있지마는, 모두 중국 도교적인 입장에서 접근 해석한 것들이다.
또한 강경구는 기존에 알려진 사서와 중국과 일본의 연구물을 토대로 고구려의 종교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백신(河白神) 수신(隧神) 등고신(登高神)을 묘(廟)와 연관시켜 살폈으며, 특히 주목되는 것은 등고신을 승천신(昇天神)이자 욱일신(旭日神)인 태양신으로 보았고 동명왕을 천신(天神)으로 주몽을 일신(日神)으로 추정했다는 점이다. 조법종은 소도문화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고구려 사회의 단군인식과 종교문화적 특징을 설명하고 있는데, 천제지손(天帝之孫)으로서의 주몽과 선인지후(仙人之後)로서의 송양(松讓)을 두 계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이렇듯 고구려의 고유종교사상과 관련된 기존의 연구가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의해 다양하다. 또한 기존에 인용되고 있는 중국과 한국의 고구려 관련 자료들이 서로 중복 혹은 상통, 그리고 몇 가지의 사상소로 한정된다. 더욱이 고구려 정신의 중요한 흔적이 될 수 있는 서책들의 부전(不傳)과 일찍이 김교헌이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경사(經史)의 시련 문제 등이 외면되고 있다는 점도 안타까울 뿐이다.
"단군(檀君)의 고사(古事)와 경전(經典)이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에 전해져서 번역․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하고 그 서고(書庫)를 불태우고 민간(民間)에 흩어져 있던 것까지도 모두 가져다 태워버렸다.
이 때 부여에 간직되어 있던 것이 발해(渤海)에 전해졌으나, 금(金)나라가 신라와 당나라가 한 짓을 되풀이하여 다 태워 없앴다. 혹 남모르게 은밀히 감추어 둔 것이 있어 불에 타지 않고 전해진 것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朝鮮)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 팔도(八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명(命)하여 거두어 올렸다가 병화(兵火)로 인해 타 없어졌다."

김교헌이《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성종실록(成宗實錄)》을 토대로 언급하고 있는 수서 목록을 보면,《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지공기(誌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비기(三聖秘記)》《삼성기(三聖記-安含老 元董仲)》《도증기(道證記)》《동천록(動天錄)》《지화록(地華錄)》등이다. 이 서책들의 제목만 보더라도 그 내용들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즉 유교나 불교와는 무관한 우리 고유의 사상(神敎思想)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역사 사상은, 우리 민족의 중추신경을 제거하고 나타난 무신경한 고깃덩이에 불과한 것으로, 신채호가 "전래되는 조선사를 조선사라 하기 어렵다"고 지적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까닭에 고구려를 포함한 우리 상고사상사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보다 다양한 방법과 개방된 연구안(硏究眼)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즉 중국의 한나라 정착 이전, 동북아문화의 주도세력으로 나타났던 우리 선인들에 대한 적극적이고 수용적인 연구 접근 자세의 필요성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사서의 기록뿐만이 아니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륀훠이상(林惠祥)이나 수이량지(徐亮之), 그리고 푸쓰녠(傅斯年) 등과 같은 중국학자들에 의해서도 밝혀진 내용들이다.
특히 상고 동이족 혹은 고구려의 하느님신앙과 삼족오신앙 속에 나타나는 삼신신앙(三神信仰)에 대한 의미는, 향후 우리 민족사상사의 정리에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더한다. 즉 우리 민족의 생활과 사유 속에 무의식으로 녹아 흘러온 삼수원리(三數原理)는 우리 민족사상의 선험적 에너지인 동시에 미래 한민족 진보의 구구단(九九段)과도 같은 문화공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문화적 자긍심이 앞선 나머지 견강부회식의 논리를 강론(强論)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용기 없는 궁구가 가치 없는 문서장으로 치부될 수 있듯이 의욕만이 앞선 논구는 자칫 로망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Ⅲ. 고구려의 삼신신앙에 대한 연구

1. 三의 종교사상적 의미

우리 민족의 삶은 삼(三)으로 시작하여 삼으로 일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돌아감의 섭리까지 삼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삼신(三神)의 점지로 삼가르고 태어나, 삼신줄(검줄 금줄)의 보호로 삼칠일을 넘기고 삼(삶)을 삼(살)다가 삼신께 돌아가는(뒈지는, 죽는) 것이 그것이다.《삼일신고》''진리훈''의 가르침에 나오는,''하느님(三神)→삼진(三眞:性命精)→[삼진↔삼망(三妄:心氣身)]→삼법(三法:止感調息禁觸)→하느님(三神)''의 이치와도 부합하는 것이다.
삼은 한민족 고유한 종교적 심성의 틀로서,''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執一含三 會三歸一)는 것과,''셋에서 하나로 돌아감을 체로 삼고 하나에서 셋으로 나뉘어 짐을 용으로 삼는다''(三一其體 一三其用)는 삼일사상의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종교문화코드는 한 마디로 삼수분화의 원리를 횡으로 하고 삼진법의 공리(公理)를 종으로 하는 ''현묘지도의 섭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일찍이 단군사화 혹은 그 이전부터 나타나는 삼신신앙의 사상관에 기초한 것으로, 인간의 삶을 가장 완전하게 영유케 하는 원리인 동시에 인간사회의 질서를 가장 옹글게 협화하는 가치가 되는 것이다. 까닭에 인간사를 아름답게 운용한다는 것은 그러한 수리(數理)를 얼마만큼 잘 활용하느냐와 일맥하는 말도 된다. 독일의 대수학자인 레오포드 크로네커가 "신은 자연수를 창조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인간의 작업이다"라고 말한 것도, 수의 질서가 곧 삶의 섭리임을 암시해주는 것이다.〈神誌秘史〉에 "서로가 균형을 이루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을 유지할 수 있다(首尾均平位興邦保太平)"라고 한 구절도 삼신신앙의 삼수원리를 치도(治道)의 섭리로써 형상화한 가치라 할 수 있다.《태백일사》에 나오는 다음 기록이 이것을 말해 준다.

"삼한(三韓)의 지세로써 여러 가지의 저울돌에 비유해 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추와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저울 그릇과 같아,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빼면 저울은 물건을 달 수 없고 나라는 백성을 보전치 못하리니, 옛날 삼신(三神)께 제를 올려 서원(誓願)한 것은 삼한의 관경에 있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 데 뜻이 있는 것으로, 〈신지비사〉의 전하는 바도 역시 이에 벗어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래 경전인《천부경》과《삼일신고》, 그리고《참전계경》에서도 삼일의 원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 경전들이 조화 교화 치화의 삼대경전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또한《천부경》이 81자로 이루어진 것이나,《삼일신고》가 360여 글자로 엮어졌고,《참전계경》역시 360 여사의 훈적(訓蹟)으로 짜여졌다는 것은, 삼의 운용과 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경전 모두 일삼삼일( 一 → 三 → 三 → 一 )의 원리를 충실히 보여줌으로써,''하나를 나눠 셋으로 퍼지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一而分三 會三歸一)는 삼일철학의 가치에 충실히 부합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민족의 삶의 원리인 삼의 가치는 하늘과 땅과 인간이 어울려 조화 섭리 통일 완성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화랑의 접화군생으로도 통하는 홍익인간의 의미가 그것이요 고구려 호태왕비문에 나타나는 이도여치(以道與治) 역시 이화세계와 다를 바 아니다. 즉 ''삼일철학으로 완성되는 삶의 질서(神 物 人이 어울려 사는 삶)''라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천부경》의 수리철학인 ''대(大)→합(合)→생(生)→운(運)→성(成)→환(環)→묘연(妙衍)→만왕래(萬往來)''의 묘리가 그것을 보여 준다.
또한 삼의 논리로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세계 대부분의 종교가 갖는 공통적 현상이지만, 우리 민족만큼 삼의 의미를 종교적으로 잘 드러낸 집단도 없을 것이다. 홍암 나철의 다음과 같은 정문일침(頂門一鍼)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하늘의 三神(因 雄 儉-필자주)과 인간의 三宗(父 師 君-필자주)은 한 뜻이다.(天之三神 人之三宗 其義一也)"

이러한 삼의 원리는 우리 민족의 삶의 체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지배해온 수리(數理)이며, 한민족 생활원리와 정서 속에 흥건히 농축된 민간신앙이기도 하다. 심지어 풍류와 흥의 장단 또한 삼박자다. 지금 우리 전통음악에 널리 쓰이는 대부분의 장단 즉,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굿거리 세마치 타령 등이 모두 그렇다. 이(二)박자 계통의 중국음악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또한 진동하는 현이나 공기의 기둥에서 나는 자연적 7음계를 만들기 위해서도, 단지 세 가지의 일차음(一次音:온음정 4도음정 5도음정)만 있으면 된다는 것은 삼수(三數)야말로 자연의 운율임을 알려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수철학(二數哲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주(周)나라 이전의 중국문화도 삼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사실이다. 동이족이 세운 은상시대(殷商時代)의 각종 청동제삼족기(靑銅製三足器)와 갑골점(甲骨占) 등의 유물에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으며, 심지어《도덕경》에 드러나는 삼일철학적 가치는 《천부경》의 수리를 보는 듯한 착각이 일고, 그 구성 또한《천부경》81자와 동일한 81장으로 이루어졌음이 주목된다. 이것은 아마도 허짜오광(曷兆光)의 지적대로, 중국 도교가 은문화(殷文化)의 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초나라 문화권에서 발생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까닭에 은상시대에 정립되기 시작한 동양의 음악에서도, 각종 악기를 제작하는데 사용된 황종척(黃鐘尺)을 구분척(九分尺)으로 하고, 또 모든 음의 기준인 황종음(黃鐘音)의 수인 황종수(黃鐘數)를 81(9×9)로 삼았으며, 이 황종수 81을 기준으로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 따라 12율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1……3……9……81로 전개되는 삼수분화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삼의 철학은 배달민족의 선험적 규범으로서, 인간 본연의 깨달음을 알려주는 지침(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인 동시에, 인간의 삶의 질서(조직 규범 체제)로도 작용하고, 한민족의 생활방식을 시공을 넘어 규제하는 최상의 틀로써 자리잡고 있다.
한편 삼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서양에서도 남다르다. 일찍이 피타고라스학파는 우리의 전체 우주가 수(數)로부터 온 존재로 믿고, 일(一)이라는 신(神)은 이(二)를 만든 창조주이고 두 수가 합쳐 삼(三)이 되므로, 삼(三)은 바로 우주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도 전체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상(事象)을 삼수분화의 논리로 이해했으며, 트리아드(Triad:3)는 만물의 완성태라고 니코마코스는 말한다. 특히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인 이암블리코스는 "트리아드(3)는 모든 수를 능가하는 공정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트리아드(3)가 모나드(Monad:1)의 잠재성이 최초로 현실화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우리 민족 삼일철학의 근본이 되는 일체삼용(一體三用)의 원리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흥미를 더한다.
더욱이 불가능한 것조차도 삼(三)이 필요하다는 주장에서 삼의 오묘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즉 트라이바(Tribar:세 개의 면이 서로 직각으로 만나게 그려지는 것)의 모양은 3차원 공간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불가능한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물리학의 메커니즘도 삼일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주장까지 대두됨을 볼 때, 이 세상 모든 이치가, 삼의 운용수인 팔십일과 삼의 완성수인 삼백육십육, 즉 삼이 곧 "만왕만래 용변부동본(萬往萬來 用變不動本)"이라는《천부경》의 천리(天理) 속에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

2. 고구려의 삼신신앙

고대 사회에서의 종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종교는 무력과 더불어 고대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또한 강력한 대륙국가로의 성장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신앙의 힘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가령 고구려 건국정신의 하나인 다물(多勿:옛 땅을 되찾음)정신이, 신교(神敎)의 전래문헌에 완기토(完基土)로 나타나며, 고구려 입국정신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완기토정신은 성지회복(聖地回復)의 의미와 연결되는 것으로, 고구려인들의 삶에 중요한 의미로 자리잡은 듯하다. 정인보도 다물정신을 고구려입국의 근본종지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그 가능성을 더한다.
먼저《삼국사기》에서 암시되는 고구려의 하느님(삼신)신앙 증적을 살피면,

"어느 날 하느님이 내려와 말하기를, ''내 자손을 시켜 이 땅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이 땅을 떠나라''(日者天降我曰將使吾子孫立國於此汝其避之)"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칭한 해모수(自言天帝子解慕漱)"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我是天帝子河伯外孫)"

"내가 바야흐로 태양(하느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려 한다(我方承景命欲啓元基)"

"나는 하느님의 아들인데 이 곳에 와서 나라를 세우노라(我是天帝子來都於某所)"

등이 나타난다. 이것은 고구려 건국조인 고주몽과 관련된 일화들로써, 종교사적으로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교와 불교 중국 도교의 내용과는 분명히 다른 우리 고래의 하느님신앙에 대한 사상소(思想素)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삼국사기》에 실려있는 간략한 동명왕 부분에서 하늘(님)과 관련된 내용이 적지 않게 실렸다는 점도 그렇다. 또한《삼국사기》에서 주몽이 하느님의 명으로 국가를 세우기 위해 떠날 때에, 세 사람의 친구(鳥伊 摩離 陜父)와 동반하며, 또 다른 세 사람의 조력자(再思 武骨 黙居)를 만난 것을 건국을 위한 천명이라고 말한 것은, 고구려의 건국이 삼신신앙과 연결됨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고주몽(一)과 세 친구(三), 그리고 세 조력자(三)가 고구려라는 한 국가(一)를 건설한다는 것은, 삼신신앙에 나타나는 일삼삼일의 원리에 부합하는 상징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건국신화에서의 숫자의 의미는 단순한 헤아림의 의미를 넘어선 고도의 상징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 주길 바란다.
《대변경》에 실려 있다는 고주몽의 다음 가르침이 위의 상징성을 더욱 구체화 시켜주고 있다.

"大辯經曰高朱蒙聖帝詔曰天神造萬人一像均賦三眞於是人其代天而能立於世也(《대변경》에 말하기를, 고주몽 성제께서 조서를 내려 ''하느님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 하나의 형상으로써 고르게 세 참함(성품 목숨 정기-필자주)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삼진(三眞:性命精)이란 하느님의 본성으로써, 인간이 육신의 탈을 쓰면서부터 나타나는 삼망(三妄:心氣身)과 반대가 되는 의미다. 진정한 인간은 거짓인 삼망을 물리치고 참인 삼진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신교의 전래 수련법인 삼법수행(三法修行:止感調息禁觸)이 바로 그것이다.《태백일사(太白逸史)》에 언급된 고구려 을지문덕의 다음 훈계가 이것에 대한 답이다.

"乙支文德曰道以事天神德以庇民邦吾知其有辭天下也三神一體氣分得性命精自在光明昻然不動有時而感發而道乃通是乃所以體行三物德慧力化成三家心氣身悅滿三途感息觸要在日求念標在世理化靜修境途弘益人間也(을지문덕은 도로써 하늘을 섬기고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덮는다고 말하면서,''나(을지문덕-필자주)는 이런 말이 세상에 있음을 안다. 삼신일체(하느님-필자주)의 기운을 받아 이를 나누어 성품 목숨 정기를 얻으니, 광명을 마음대로 하고 우러러 움직이지 않으나, 때가 되면 감동이 일어나니 도가 이에 통한다. 이것이 몸이 되어 삼물인 고이 슬기 힘을 행하고, 화하여 삼가인 마음 기운 몸이 되며, 즐겨 삼도인 느낌 고룸 부딪힘을 채우는 이유이다. 그 중요함은 날마다 재세이화하고 정수경도(靜修境途)하여 홍익인간을 생각함에 있다….''"

또한 을지문덕이 고구려 석다산(石多山) 사람으로서, 일찍이 입산수도하여 꿈에 하느님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것이나, 마니산에 올라 경배를 드리고 백두산을 찾아 제천을 했다는 기록 또한 의미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을지문덕도 삼신신앙의 숭배자요 실천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백운거사 이규보(1168-1211)가 고구려 건국조인 동명왕의 신화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넘어 감탄을 표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즉 이규보는《구삼국사(舊三國史)》〈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얻어 보고, 김부식이 중국의《위서》나《통전》과 마찬가지로 동명왕의 성적(聖蹟)에 대해 소기(少記)한 것을 한탄하면서, 동명왕의 신이한 행적이야말로 분명한 역사요 고구려 또한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천명했다. 이것은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상징적 성화(聖話)에 대한 유학자로서의 기존 통념을 주체적 시각에서 바꾸어 바라본 일사례에 불과한 것이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단군을 계승하고 있다는 다음 기록에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된다.

"계해년(B.C.58) 봄철 정월에 역시 하느님의 아들인 고추모(高雛牟-고주몽을 말함-필자주)가 북부여의 뒤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예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니 이 분이 바로 고구려의 시조다."

한편 한민족 삼신신앙의 주재자인 하느님이란 관념도 유구한 세월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의 하느님신앙은 신교(神敎) 경천교(敬天敎)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까지 전해져 오다가, 한말까지 민간신앙으로 모습으로 이어져온다. 조선중기까지는 한자어인 상제(上帝) 천신(天神) 등으로 불리던 것이, 한글 문학의 발전과 더불어 하느님 칭호가 나타나는 것이다. 본디 불교나 유교에서는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이란 존재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뿌리 깊게 하느님신앙이 지속되어 온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민족의 성정에 자리잡은 가치로, 어떠한 종교를 접하더라도 통하고 포용하는 하느님이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전래〈회심곡(回心曲)〉을 보더라도,"이 세상에 나온 사람/뉘 덕으로 나왔던가/하나님의 은덕으로/아버님전 뼈를 타고/어머님전 살을 타고/칠성님께 명을 타고/제석님께 복을 타고/석가여래 제도하여/인생일생 탄생하니/……"로 노래된다는 것은, 제석이나 석가여래에 앞서 삼신하느님의 점지로 생을 얻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근자에 들어 이 노래가 종교적 목적에 의해 왜곡(''하님의 은덕''이 ''석가여래 공덕으로''로 바뀜)되어 유포된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여호와를 대신하여 우리의 하나님을 가져간 것과 유사한 사례다.
이러한 시간과 종교를 초월한 우리 민족 하느님에 대한 보편적 숭배의식은, 선교사인 C. A. 클락의 다음 기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Dr. Underwood speaks of meeting a Buddhist priest in a temple who said, ''Hananim is of course supreme. Buddha is one of the lesser gods,'' and he says that ''the supremacy of Hananim is apparently acknowledged alike by Confucianists, Buddhists and Shamanists.''"( 언더우드가 절간에서 불승을 만났는데,"하느님은 온누리의 주재신이고 부처는 그 밑에 자리한 하급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불승이 말했다면서, 언더우드는 "분명히 한국에서는 불교신자 유교신자 무속숭배자 할 것 없이 모든 종교인들이 하느님을 우주의 절대자로 숭배한다"고 말했다)

그 하느님신앙의 전통은 고조선의 건국 이전부터 해를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환님'' 또는''한님''으로 부르면서 숭배했던 가치에서 찾을 수 있다. 환웅과 해모수가 같은 뜻으로, 둘 모두가 이 땅에 강림한''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이나, 단군과 해모수를 동일인으로 보고 해모수는''해머슴애''가 한자로 표기된 것이며 단군 또한''해의 아들(日子)''이라는 의견이 있음을 볼 때,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최고신은 하느님으로 그 상징이''해(日)''였으며, 단군이나 해모수는 ''하느님의 대리자''로 나타난 것이다. 더욱이 신교사서에서는 단군해모수를 한 존재에 대한 지칭으로도 사용했음을 보면, 단군과 해모수가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동일의미로 파악함에 무리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단군이나 해모수뿐만 아니라, 기자(箕子) 역시 그 어원이''개아지''로서 ''태양의 아들''이라는 최남선의 주장, 그리고 또 다른 기자(奇子)의 의미 역시''태양의 아들''이라는 기록이나, 고구려의 시조 동명이나 신라의 시조 혁거세 또는 불(弗)-밝-박(朴) 등도 모두 광명한 하느님과 연결되고 있다. 고주몽의''고(高)'' 또한''해(解)''와 같은 의미로 보고 태양의 의미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하늘의 태양인 ''밝''에 따라서, 땅에는''밝''산(백두산)을 심고 인간에는 ''밝''신도(神道)를 세웠으며 인류에 대하여는''밝''종족으로 나타나니, 우리 스스로가 신명의 족속이요 태양의 자손이며 하느님의 후계자임을 내세웠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 고대 국가의 신앙 양태는, 하늘의 후계자인 우리 민족이 광명한 하느님과의 교감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고조선인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영매를 ''새(天使鳥)''로 생각했으며 태양의 세계에는 신조(神鳥:三足烏-세발까마귀)가 존재하고, 이를 신성한 ''태양신의 새''로 여겼다. 본디 까마귀는 신적 존재의 대리자로서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이며, 샤먼과 관련된 대부분의 신화에서도 신 혹은 신들의 대리자로서 독수리나 태양의 새가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태양신앙이 대중에게까지 일반화되었던 지역이 아시아 이집트 고대유럽이라는 연구도 이것과 연결된다. 최남선 또한 태양신앙의 문화권을, 아시아의 동 북 서로부터 이집트에 미치고 다시 동남 내지 동으로 아메리카까지 나타나며 가장 두드러진 곳이 진역(震域)으로 꼽은 바 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각 마을에는 하느님의 전령사인 천사조가 내려앉고 오르는,''솟대''라는 긴 신주(神柱)를 세워 하느님의 가호와 가르침을 받도록 하는 풍습을 만들게 되었다. 이 소도(蘇塗)의 솟대 문화가 고조선 민속문화의 하나로 정착되었으며, 단군을 ''수두하느님''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도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스러운 곳으로 상정되는데, 세계의 중심축으로 성스러움을 낳는 지역, 우주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지나갈 수 있는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다. 까닭에 소도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천국의 출장소로서, 인간이 정화와 재생 그리고 구원을 위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신성한 공간(소도)에 대해 중국 기록에서는 일부 몰이해적인 해석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의 기록에 나타나는 소도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 부분에 대해서 정인보는 다음과 같이 공박하고 있다.

"소도(蘇塗)의 기풍(氣風)이 이러하게 된 것은 전혀 위족념(衛族念)으로 좇아 고취(鼓吹)됨이니, 이때에 있어서는 전승(戰勝)이 곧''홍익(弘益)''이다. 그 신앙(信仰)의 경향(傾向)을 보더라도 요급(要急)을 따라서 기구(祈求)하는 바 다르매, 같은 삼신(三神)을 섬기면서도 그 영우(靈佑)가 그 요급(要急)한 데에 치우치기를 각기(各其) 바랐으니, 백전(百戰)하던 국가(國家)는 삼신(三神)의 영우(靈佑)가 군사(軍事)에 내릴 것을 믿어,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三國志 東夷傳 夫餘條)에 ''부여(夫餘)는 군사(軍事)가 있을 때면 천(天)에 제(祭)하였다''하였으니,''군사제천(軍事祭天)''이라 함과 ''소도작전(蘇塗作戰)''이라 함이 그 내용(內容)에 있어 하나니…"

이것은 소도의 풍속으로 내려오는 세속오계의 기풍을 그대로 설명한 것으로,''귀신을 섬긴다(事鬼神)'' ''싸움을 좋아한다(好作賊)'' ''불교와 비슷함이 있다(有似浮屠)''와 같은 중국의 기록이, 유불선을 통섭하는 우리의 세속오계 기풍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잘못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가 있으니, 충 효 신 용 인의 오상(五常)의 도다(蘇塗之立皆有戒忠孝信勇仁五常之道也)"라고 말한 신교사서의 기록과 부합하는 내용이다.
중국인들이 고구려인들을 "사람들의 성격이 포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즐긴다"고 평한 것이나,"걸음걸이는 거의 뛰는 듯하다" 혹은 "나라 사람들이 기력이 있으면 전투를 익힌다"는 기록들도 위의 특성을 전제로 이해해야 할 부분들이다. 더욱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군진에 나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어아가(於阿歌)〉를 부르게 하였고 삼신께 제를 올릴 때도 천악(天樂)을 사용했다는 내용을 보면, 종교적 의례를 통한 군사적 사기 고무를 위한 것이었음도 발견할 수 있다. 신채호가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을 상고 소도제단의 무사(武士)로 이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교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도(수두)는 하느님을 섬기며 노래하고 춤추는 집을 말한다"고 함으로써, 소도와 상고 제천의 본질을 그대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기록에는,"고구려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마을에는 밤이면 남녀가 무리지어 서로 간에 노래를 부르며 즐긴다"는 일상생활의 내용도 나타난다. 이것은 "원시종교는 생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춤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라는 영국 인류학자 R.R.마렛의 주장과 연결되는 것으로, 고구려의 동맹이나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의식에서 빠지지 않는, 가무(歌舞)의 종교적 의미를 더듬을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J.허이징가의 다음 설명에서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예배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Celebrate''라는 동사는,''의식을 거행하다'' ''신나게 놀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종교적 제의들은 축제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놀이의 활발한 움직임과 연결된다."

아무튼 소도(수두)신앙은 세월이 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각기 그 거주지를 중심으로 수림(愁霖)을 길러 대수두(백두산)를 모상하고 소수두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전통 유습은, 후일 각 마을마다 솟대 혹은 당나무를 세우고 지역의 평안과 안녕을 하느님께 축수하는 행사로 내려와, 지금도 유지되는 곳이 많다.
한편 정인보는 고구려의 삼신신앙에 나타나는 천제와, 소도의 신성지역을 유사한 의미로 연관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다.

"삼신(三神)의 천제(天祭)와 소도(蘇塗)의 신역(神域)같은 것이 서로 연관(聯貫)되었음은 물론이요, 이 외(外)에도 수혈영신(隧穴迎神) 같은 것은 뚜렸한 연관상(聯貫狀)을 발견(發見)할 수 있나니, 그 일이 특수(特殊)하니 만큼 그 연관(聯貫)함이 더 의미가 있다. 대개 고구려(高句麗)의 수혈영신(隧穴迎神)이 본디 태초(太初)의 속(俗)인데, 반도내 단군(半島內 檀君)의 적(蹟)을 전(傳)하는 곳, 특수(特殊)한 삼신신앙(三神信仰)의 적(迹)이 산악간(山嶽間)에 있기만 하면 대개 대혈(大穴)을 그 근방(近方)에 놓고 요초(爎醮)의 허(墟)가 있게 되니, 이야 후인(後人)의 각득(覺得)하지 못하니 만큼 고의(故意)로써 미쳤음이 아니다. 우선 묘향산(妙香山)이니 삼성대(三聖臺)니 단군대(檀君臺)니 고초신앙(古初信仰)을 전(傳)하는 제허(祭墟)이매 단군굴(檀君窟)이 거기 있으며, 구월산(九月山)이 삼성사(三聖祠)의 소재(所在)로 사왕봉(四王峰) 제천(祭天)의 적(迹)이 의연(依然)한데, 구월산(九月山) 산정(山頂)에도 대혈(大穴)있으니…(중략)…, 단군(檀君) 제천지(祭天址)인 마니산과 삼랑성(三郞城)의 강화(江華)가 고명(古名)이 혈구(穴口)인즉, 강화마니전등등(江華摩尼傳燈等)의 산정(山頂)을 제허(祭墟)로 하는 동시(同時)에 부근(附近)에 굴혈(窟穴)이 있어 혈구(穴口)의 명(名)이 이로써이던 것이다."

즉 고구려의 수혈영신을 우리 민족 고래의 풍속으로 보고 모든 것이 굴(窟․穴)과 연관이 깊음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단군사화에 등장하는 동굴의 종교적 상징의미를 전승 공유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정인보는 중국문헌에 보이는 고구려의 영성(靈星) 사직(社稷) 수신(隧神) 제천(祭天) 등이 별개가 아니라 모두 제천을 나타내는 것으로 단정했다. 특히 영성제(靈星祭)야말로 다른 제사가 아닌 삼신하느님에 대한 제(祭)로 단정하고 있는데,《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에 고구려의 ''천신삼신''을 ''태일삼성(太一三星)''으로 잘못 옮겨 번역했음을 논리적으로 공박했던 것이다. 오히려 정인보는 우리 삼신신앙의 전통이 한나라에 옮겨져 그들의 사책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동이족이 세운 은나라가 천지인 삼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논의보다도 훨씬 충격적인 것이다. 까닭에 정인보는 우리의 천제와 중국 한족(漢族)의 교사(郊祀)가 서로 다르므로,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진(秦) 한(漢)시대 훨씬 이전에, 산동부근에서 조선족과 한족 간에 치열한 종교적 충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렇듯 우리 전래의 하느님신앙을 계승한 고구려의 삼신신앙은, 하느님의 대리자로 자처한 고주몽의 건국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국중 제천이었던 동맹 역시 하느님에 대한 제천이었다. 신교사서에, 동맹은 하느님께 제를 올리는 것이라는 기록이나, 하늘을 대신하여 공을 행하는 한맹(寒盟)이라는 명칭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고구려의 동맹대제(東盟大祭)는 ''팔관재(八關齋)''라는 명칭으로도 유전되어 고려의 ''팔관행사''로 자리잡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 산상왕이 삼신께 빌어 아들을 얻으므로 그 후 삼신께 자식을 발원하는 풍습이 생겼다는 기록도 발견되며, 묘향산의 단군굴, 금수산에 있는 동명왕의 기린굴, 석다산의 을지문덕굴 등이 모두 고구려 삼신신앙의 유적으로 전해진다. 더욱이 백두산 인근은 고구려 신앙의 성지로서, 위로는 단군사화에 나타나는 성역의식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우리민족의 성역관을 전승해 전해주었다. 안재홍이 지적한 아래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구려(高句麗) 동명왕(東明王) 탄생(誕生)에 엉클어진 모든 전설(傳說)과 신화(神話)가, 그 무대는 모두 백두산(白頭山)이요 천지(天池)요 삼지연(三池淵)이요 천하잉천(天河孕川-실은 原生의 義)인 송화강(松花江)이요 압록수(鴨綠水)요 또 천평(天坪)이라."

그러나 전래하는 불가(佛家)나 유가(儒家) 혹은 중국의 사서에서는 삼신에 대한 체계적인 언급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교사서들의 수난과 연관이 깊다. 수많은 전란으로 인한 유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교나 불교를 통한 통치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우리 스스로 인멸시켰음이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신채호의 다음과 같은 탄식은 이러한 정서를 대변한다.

"영국사(英國史)를 지으면 영국사(英國史)가 되며, 노국사(露國史)를 지으면 노국사(露國史)가 되며, 조선사(朝鮮史)를 지으면 조선사(朝鮮史)가 되어야 하겠거늘, 유래(由來) 조선(朝鮮)에 조선사(朝鮮史)라 할 조선사(朝鮮史)가 있었더냐 하면 수긍(首肯)하기 어렵다. 안정복(安鼎福)이《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짓다가 개연(慨然)히 내란(內亂)의 빈번(頻煩)과 외구(外寇)의 출몰(出沒)이 동국(東國)의 고사(古史)를 탕잔(蕩殘)케 함을 비탄(悲歎)하였으나, 나로써 보건댄, 조선사(朝鮮史)는 내란(內亂)이나 외구(外寇)의 병화(兵火)에서보다, 곧 조선사(朝鮮史)를 저작(著作)하던 기인(其人)들의 손에서 더 탕잔(蕩殘)되었다 하노라."

특히 신채호는 고대 삼한(三韓)도 삼신설(三神說)에 의해 만들어 졌으나, 삼신에 대한 믿음이 타락하면서 붕괴일로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이며, 삼신이야말로 우리 고유신앙(신채호는 仙敎라 칭함)의 주체로서 기독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의 삼불여래와 흡사하다고 이해했다.
아마도 고구려 삼신신앙에 대한 체계적 논구자료가 그나마 옹글게 남아 있는 곳이 신교(혹은 선교)의 계승체라 할 수 있는 대종교단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신교사서에 나타나는 삼신하느님숭배의 기록을 보면,

"집집마다 천단(天壇)을 만들고 새벽마다 경배(敬拜)하니 이때부터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상이 확고히 하였다.(前檀君朝鮮, 第一世 檀君王儉)"

"천하에 조서를 내려 삼신전(三神殿)을 세우고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위(三神位)를 봉안하여 백성들에게 경배케 하였다.(前檀君朝鮮, 第二世扶婁)"

"고대 임금들이 반드시 상제 및 단군삼신을 공경하여 섬김으로써 도(道)를 삼았다.(古代國君必先敬事上帝卽一大主神也及檀君三神因以爲道)"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三神)께 제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與衆奉祭于三神其至神之德兼聖之仁)"

"을보륵이 아뢰기를…(중략)…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三神)께 나아가 세 번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환(九桓)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乙普勒進言曰…(中略)…皆七日爲回就三神執盟三忽爲佺九桓)"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三神)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이를 인삼(人蔘)이라고도 하고 선약(仙藥)이라고도 한다.(到太白山祭三神得靈草是謂人蔘又稱仙藥)"

등등 수많은 곳에서 발견된다.
근대에 들어서는 홍암 나철이 대종교를 일으키면서, 창교가 아닌 중광(重光:다시 일으킴)을 택함으로써 신교의 계승의식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그에 의하여 선포된 〈단군교포명서〉에도 ''단군→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신교의 맥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발해의 3대 임금 문왕(대흠무)이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종교단의〈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를 보면,

"신고(神誥)가 본디 돌과 나무의 두 책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되 돌책(石本)은 부여나라 고(庫)에 감추고 나무책(檀本)은 위씨(衛氏:위만을 말함-필자주)의 둠이 되었다가, 아울러 병화에 잃었다 하며,…(原文 12字 遺失)… 이 책은 곧 고구려의 번역한 바이오, 우리 할아버지(발해 태조 대조영-필자주)의 읽으시고 기리신 것이니라. 소자(발해문왕-필자주)가 신고(神誥)를 받아옴으로부터 항상 잃거나 떨어질까 두려우며, 또 돌 나무 두 책의 세상풍파가 울린바 됨을 느끼고, 이에 영보각(靈寶閣:책을 간직해 두는 집-필자주)에 두었던''임금기림(御贊:발해 태조 대조영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삼일신고예찬-필자주)''보배책을 받들어, 태백산(백두산-필자주) 보본단 돌집 속에 옮아 감추어서, 썩지 않을 바탕이 되게 하리라 한다."

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것은 현전하는 삼신신앙 경전의 하나인《삼일신고》가 고구려본을 토대로 발해로 계승된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내용으로, 고구려 삼신신앙 정통론을 분명히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삼일신고》에 대한 예찬을 발해 고왕 대조영이 읊었다는 것과《삼일신고》의 서문을 발해의 반안군왕(盤安郡王)인 대야발이 남겼다는 점, 더불어 그 해설을 발해 때의 국상(國相)이었던 임아상이 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특히 대야발이라는 인물은 대조영의 동생으로서 신교사서인《단기고사》를 저술한 인물과 동일인이다.
또한 다른 신교사서에는 환웅이《천부경》을 설교(設敎)했다는 것과, 단군왕검이 종교를 창립하여《삼일신고》를 널리 알렸으며 ''366사의 신정(神政)''[참전계경으로 생각됨-필자주]으로 가르쳤다는 내용도 전한다. 그리고《단군세기》에 ''《천부경》을 논하고《삼일신고》를 강연했다(論經演誥)''는 기록이 있고,《태백일사》에는《천부경》과《삼일신고》에 대해 그 유래와 내용을 비교적 상술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 동명왕의 신하였던 극재사(克再思)가 기록했다는 다음의〈삼일신고독법(三一神誥讀法)〉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베옷 극재사가 말하기를, 아아 우리 믿는 무리는 반드시 신고(神誥)를 읽되, 먼저 정(精)한 방을 잡아서 진리도(眞理圖)를 벽에 걸고 세수하여 몸을 깨끗이 하며, 외관을 항상 바르게 하고 술 고기를 끊으며, 박달향을 피우고 단정하게 꿇어앉아서, 잠잠히 하느님께 빌고 크게 믿는 다짐을 세우며, 모든 사특한 생각은 다 끊고 삼백 예순 여섯 낱의 큰 단주를 가져서 한마음으로 읽되, 본글(正文) 삼백 예순 여섯 말의 참이치를 위 아래로 통하여, 단주로 더불어 맞게 한 뀀이 되게 하라.
삼만 번에 이르면 재액이 점점 사라지고, 칠만 번이면 병이 침노하지 못하고, 십만 번이면 총칼을 가히 피하고, 삼십만 번이면 새 짐승이 길들여지고, 칠십만 번이면 사람과 귀신이 다 두려워하고, 일백만 번이면 신관 선관들이 지도하고, 삼백 육십 육만 번이면 삼백 예순 여섯 뼈를 바꾸며, 삼백 예순 여섯 혈에 모이며, 삼백 예순 여섯 도수로 합하고, 괴로움에 떠나며 즐거움에 나아가니, 그 신묘함을 가히 다 적지 못할지라.
만일 입에는 외우되 마음에는 어기고 간사한 소견을 일으켜서 버릇없음이 있으면, 비록 억만 번 읽을지라도 마치 바다에 들어가 범을 잡는 것과 같아, 마침내 성공을 못하고 도리어 수명과 복이 줄게 되며, 재앙과 해로움이 바로 이르고 굴러 괴롭고 어두운 누리에 떨어져 아득해 희망을 찾을 수 없으리니, 가히 두렵지 않을까! 힘쓰고 힘쓸지어다."

이 독법은《삼일신고》를 정독하는 방법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공효(功效), 그리고 참된 정성을 통한 봉독(奉讀)의 중요성을 적은 것이다. 물론 여기에 표현된 공효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로 돌릴 수밖에 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든 종교에서의 주문(呪文)이나 독경(讀經)은, 찬송과 더불어 일반인의 신앙경험을 위한 중요한 도구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여기서도 삼수의 완성수인 삼백 육십 육에 대한 오묘함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삼백 육십 육이라는 숫자는, 단군사화에 등장하는 삼백 육십 여사와 동일한 상징의미로, 단순한 수합(數合)을 넘어 ''질서의 완성'' ''조화의 실현'' ''이상향 구현'' ''수행의 완성''이라는 종교사상적 가치와 통하는 말이다. 즉 삼백 육십 육을 한 글자로 표현한 것이 배달민족 진리의 존재태인 ''한''이요, 단군 사화에 등장하는 ''홍익인간''이며, 《삼일신고》''진리훈''에 나타나는''성통공완(性通功完)''이 바로 그것이다. 까닭에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이도여치(以道與治)''의 가치 또한, 수리적 상징으로 보면 이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당 시대에 추구하고자 했던 삼신신앙의 공효요 실현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더욱이 극재사라는 인물이《삼국사기》에서 고주몽을 돕는 삼인(三人:再思․武骨․黙居) 중의 한사람으로, 고주몽이 ''극(克)''이라는 성까지 붙여주었던 인물임을 상기해 본다면, 고구려 입국정신이 삼신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단군교오대종지서〉의 다음 내용이 더욱 수긍이 간다.

"동명성왕께서, 본(삼신신앙-필자주) 교문(敎門)의 어진 선비인 오이 마리 협부를 거느리고 엄호수를 건너, 본 교문이 열린 지 2,297년에 고구려를 세우셨다. 본시 동명성왕께서는 임금의 높은 성덕으로 문무를 겸비하시어, 겨레의 쇠퇴분열상을 근심하시고 겨레를 일으키려는 뜻으로 본 종교를 받들고 장려하시니……"

이렇게 보면, 대종교단이나 세간에 비전되어 오는 신교사서들과, 기존 사료 간의 정황상의 유사함도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료의 부전으로 인한 우리 학계에, 고구려사상사나 한국사상사에 대한 향후 연구에 있어, 다양한 시각과 방법의 필요성을 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사상사연구는, 역사연구에서 중시하는 자료의 서지학적 검증 이상으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살아있는 가치(비록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와 동떨어져선 안 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편 고구려의 삼신신앙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삼족오(三足烏:세 발 까마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족오는 하늘의 전령사이며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영매의 상징으로 동이족 삼심신앙의 대표적 형상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상징인 태양 속에 금색까마귀(金烏)가 산다는 오랜 전설과 연결된 것으로, 고구려 시조 동명왕이 새나라를 세우기 위해 군사를 이동할 때에도 태양과 까마귀가 연결되고 있음이 나타난다.
태양삼족오는 동이족의 새토템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지만, 삼족오의 형상이 동이족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중국 서북부의 앙소문화 등, 북방문화와 접하는 지역에서 널리 발견되며, 북유럽의 Odin신화에서도 늘 세 마리의 까마귀가 따라 다니고 있음이 확인된다. 다만 북방문화의 전통이 강한 동이족에서, 삼족오의 전통이 강하게 또 지속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특히 고조선문명권의 종교가 태양삼족오의 상징과 직결된다는 신용하의 주장이 관심을 끈다. 즉 그 문명권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태양숭배'' ''하느님숭배''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상 표현의 양식 혹은 상징적 표현의 구현물이 ''태양삼족오''라 말한다. 까닭에 고조선문명권의 제1형 후국(侯國)들인 예 맥 부여 옥저 구려 진 숙신 읍루 등과 제2형 후국들인 동호 오환 선비 해(奚:고막해) 유연 산융(흉노) 돌궐 오손(烏孫) 실위(室韋) 및 그 직접적인 후예들이 모두 태양숭배와 하느님숭배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 상징적 표현으로 태양삼족오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솟대문화'' ''소도문화''도 이러한 새의 상징성에 의해 형성된 결과물로 보았다. 또한 신용하는 중국문헌《회남자》 《산해경》 《초사(楚辭)》에 나오는 소호족(少昊族)의 태양삼족오신화을 분석하면서, 그 신화의 뿌리도 부여 고구려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태양삼족오가 발견되는 고구려의 고분을 보면, 무용총 각저총 쌍영총 오회분4호묘 장천1호묘 등 여러 곳에 등장한다. 그리고 태양삼족오의 의미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이병도는 강서고분의 연구를 통해 태양삼족오를 음양사상과 연관시켜 바라보았으며, 이은창은 삼족오태양의 동심원과 삼족오를 별개로 인식하면서 동심원을 불상(佛像)의 두상과 연결시켜 이해했고, 이형구는 고대 동방의 태양숭배신앙과 조류숭배신앙이 합치된 우주사상으로 해석했다.
한편 우실하는 태양삼족오가 삼수분화(三數分化)의 세계관이 하늘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삼신사상(三神思想)에 토대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삼족오가 세 개의 다리라는 기형적 모습에서 이미 삼수의 개념을 형상화하고 있고, 태양의 일원상 안에 삼족오를 배치함으로 일(一)에서 삼(三)으로 분화되는 수상(數象)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삼수분화 세계관의 기초가《천부경》과《삼일신고》에서 출발한다고 밝힘으로써, 태양삼족오가 전술한 고구려 삼신신앙의 형상화임을 뒷받침했다.
이것은 신용하도 실재하지 않는 삼족오의 세 발을 근거로 삼족오가 삼신(三神)의 상징화임을 확신했으며, 다른 지역의 두 발 까마귀와는 수리철학상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적 배경으로,《삼국유사》〈고기(古記)〉와 동일계열로 본《규원사화》〈단군기(檀君記)〉의 내용과, 박은식이《한국통사》에서 삼신신앙인 신교(神敎)가 국교적 가치가 있음을 설명한 부분을 근거로 들고 있다.
신교사서에도 "세 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너비가 삼척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것은 단군시대에 이미 삼신신앙의 상징적 체계가 정착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인데, 후일 고구려 11대 임금 동천왕(227-248)이 단군의 자격으로 동맹제 때마다 삼신께 제를 올렸다는 기록과, 고구려 재상 을파소(?-203)가 기도를 통해 단군 삼백 육십 육사인《참전계경》을 얻어 세상에 알리고,

"신시이화(神市理化)의 세상은 八訓(참전계경-필자주)으로 날줄(徑)을 삼고 五事(삼일신고-필자주)로 씨줄(緯)을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홍익제물(弘益濟物)하였으니, 참전(叅佺)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라고 말한 내용 등을 종합할 때, 고구려의 태양삼족오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삼신신앙에 대한 상징적 형상화임이 분명하다. 삼신(三神)을 노래하고 무리를 모아 수련시켰던 고구려 을밀선인(乙密仙人)의〈다물흥방지가(多勿興邦之歌)〉라는 내용 속에 담긴 삼신신앙의 흠모를 주목하기 바란다.

"…(前略)…
참은 온갖 착함의 극치이고
神은 참하나를 주관한다네.
극치이기에 三眞은 하나로 돌아오고
참하나이기에 一神은 곧 셋이라.
하늘과 땅 사이 나 스스로 있음이여
多勿은 나라를 일으킴인저.
…(後略)…."


Ⅳ. 결 론

불교와 유교를 떠난 고구려의 사상을 정리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기존 자료의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건국하여 대륙을 호령하고 불교나 유교를 고구려의 사상으로 녹일 수 있었던 것은 삼신신앙과 무관치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명왕신화나 광개토대왕의 흔적, 또한 천제봉행 등에 나오는 삼신신앙에 대한 사상소가 이것을 암시해 주며, 신교사서에 나타나는 삼신신앙에 대한 수많은 기록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더욱이 고구려의 고분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태양삼족오의 상징성에서도 고구려 삼신신앙이 형상화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다만 신교사서에 분명하게 녹아 있는 고구려 삼신신앙의 자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 부담되었을 뿐이다.
다음 구절이 생각난다.
"지금의 풍속이 한 글자라도 유교 가치에 맞지 않으면 뭇화살의 집중적 비난을 피할 수 없을 만큼 유가(儒家)의 예봉은 섬뜩하다. 저《천부경》과《삼일신고》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여도 어찌 쉽사리 논할 수 있으리오."(《太白逸史》〈蘇塗經典本訓〉第五.)
이 말은《태백일사》를 편찬한 조선조 이맥의 탄식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대를 주도하는 가치나 사상에 거슬리는 것이, 때로는 두렵고 힘들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일찍이 신채호도, 고구려 이문진의《신집(新集)》과 백제 고흥의《서기(書記)》그리고 신라 거칠부의《국사(國史)》가 전하지 않음을, "역사의 영(靈)이 있다면 처참한 눈물을 뿌릴 일이다"라고 한탄한 바 있고, 묘청의 난이 김부식에 의해 진압되면서 우리 민족이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노예가 되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조 수서령(收書令)을 통해 압수된 수많은 신교사서(神敎史書)들의 유실은, 민족사의 줄기로 보면 한탄을 넘어 대성통곡할 사건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이맥의 탄식 내용과 같이, 당대 유교적 위정자들이 가지고 있던 유교적 역사 가치에 의해, 생각하는 선비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신교적(神敎的) 역사 가치가 압살당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사상 또한 마찬가지다. 그 핵이 되는 삼신사상의 내용이 짓밟혀진 신교사서의 장(將)과 절(節)에 담겨 있으며, 그 주변을 이루는 사상소 역시 버려진 신교문헌의 문장과 어휘 속에 녹아 있다. 그러나 신교사서를 통해 고구려의 이러한 모습을 구현해 보고자 함은, 우리 학문적 현실로 보아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 재야의 억지논리로 치부될 수 있고 객관성을 잃은 픽션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까닭에 이 글에서 시도한 신교사서에 대한 적극적인 원용에 대해, 우학도(愚學徒)의 잡설(雜說)이라 몰아세워도 할 말은 없다. 또한 무지가(無知家)의 억설(臆說)이라 한들 변명치 않겠다. 다만 고매한 학인(學人)들의 너그러운 관용과 현명한 학자들의 열린 사고도 더불어 소망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 민족사의 위기가 코앞에 닥쳤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진보한다는 가치명제가 우리의 역사 경험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누구의 책임이라 말하지 말자. 다만 우리의 역사도 진보해야 한다는 민족적 당위명제를 위해 다양한 슬기를 모아야 할 때다.

[알소리 4호]- 한뿌리 발행(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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