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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07-08-08 오후 2:23:15 조 회 수 2314
제 목 [종사상] 배달민족 삼법수행의 도맥적 고찰
내 용
이 규 행 ( 언론인 본 연구회 고문 )

대종교 중광 90주년을 맞이하여 중광의 주역인 홍암 나 철 대종사의 수행방법을 중심으로 우리 배달민족의 전통적인 수련법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뜻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철 대종사가 대종교의 중광에 나선 계기는 물론 구한말의 시대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백두산(白頭山)에서 도천(禱天)하고 있던 백봉(白峯)신사(神師)의 명(命)과 영계(靈戒)를 받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백봉 신사는 신비에 쌓인 인물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설(說)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는 종교적 차원에서 가공의 인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자료를 토대로 살펴 본 결과 그는 실존인물이 분명하며, 아직도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신한다. 나 철 대종사가 백봉 신사의 제자인 두암(頭岩) 백전(伯佺)으로부터 삼일신고와 신사기 등의 책을 전달받았을 때의 나이는 90세였는데 백봉 신사의 나이는 1백세가 훨씬 넘었다고 했다. 내가 갖고 있는 기록으로 셈하면 당시의 백봉 신사의 나이는 1백 89세였고 올해 2백 82세의 수를 누리고 있다.
백봉 신사의 수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백봉 신사는 인간이란 56억 7천만개의 소신(小身) 즉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며 수련을 통해 그것을 회광(回光)시키면 대우주와 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백봉 신사가 단군성조 이래의 인연을 말하면서 배달민족의 고난은 지난날의 죄 값을 치루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배달민족을 회광시키고 단군의 가르침을 중광시킬 주역으로 나 철 대종사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수련이나 수도의 경험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도(道)의 세계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제자를 선택하는 법이다. 스승이 도맥을 이을 제자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하늘의 이치라고도 할 수 있다. 스승이 제자에게 도맥을 잇게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진언(眞言)을 내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책이나 문서를 전하는 것이다.
백봉 신사가 나 철대종사를 선택해서 도맥을 잇도록 한 것은 후자의 방법 즉 책과 문서를 전하는 방법이었다. 나 철 대종사가 전달받은 삼일신고나 신사기 그리고 단군교포명서 등은 우리 배달 민족의 역사와 도맥 그리고 수행 방법의 모든 것을 담은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 가운데 나 철 대종사의 유서가 있다. 나철 대종사는 54세가 되던 병진년 음력 8월 15일에 구월산 삼성사에서 조천(朝天)하면서 여러 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특히 ‘도감(道鑑)’이란 이름으로 쓰여진 것은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유일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도감’이란 문자 그대로 ‘수도(修道)하는데 거울(鑑)’을 삼으라는 뜻이고 ‘수행의 핵심을 깨우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감’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부분은 삼일신고의 신훈(神訓)에 있는 자성구자(自性求子) 강재이뇌(降在爾腦)라는 말이다. 둘째부분은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으로 수행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삼일신고 진리훈(眞理訓)에 나오는 말이다. 이 두 부분은 믿음 곧 신앙과 수련 곧 수도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알파이고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성구자’ ‘강재이뇌’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자성구자’란 ‘자기의 본성(本性)’에서 하늘 또는 한얼의 ‘씨앗(子)’을 찾으라는 뜻이고 ‘강재이뇌’란 그렇게 찾으면 ‘너희 머리 속’에 ‘내려와 있느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자성 즉 자기의 본성이란 자기의 진성(眞性)을 말하는 것이며, 뇌(腦)란 머리골 즉 신부(神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사상 내지는 전통신앙의 근본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늘과 내가 하나이고 하늘의 씨앗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내 머리 속에 있다는 생각과 믿음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한얼과 참은 내 안에서 구하는 것이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훈’에는 ‘자성구자’ ‘강재이뇌’라는 말에 앞서서 성기원도(聲氣願禱) 절친견(絶親見)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고 특히 견(見)이라는 글자에 대해서는 ‘나타난다’는 뜻에서 ‘견’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현’이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나 주장들은 한결같이 두 가지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첫째의 잘못은 삼일신고의 원전(原典)을 철저하게 고구(考究)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의 잘못은 수련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데서 온 것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성기원도’의 참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문신지성(聞神之聲)’하고 ‘견신지기(見神之氣)’하기 위한 기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늘의 기운을 보기 위한 기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절기(離聲絶氣)하면 불견진부(不見眞府)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소리와 하늘의 기운을 떠나거나 끊고는 참의 모습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기원도’하면 반드시 하늘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절친견(絶親見)의 참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기원도’란 어떻게 하는 기도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오음오기(五音五氣)’로 하는 기도이다. ‘오음오기’로 하는 기도는 ‘단전(丹田)’에서 울어 나오는 기도이고 온몸을 진동시키는 기도이다. 그 기도는 하늘의 파장(波長)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소리와 하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기원도’란 희구(希求)하는 기도가 아니라 ‘현재완료형의 기도’이고 ‘감사의 기도’ 내지는 ‘성취의 기도’인 것이다.
이 기도는 삼일신고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최고의 기도 또는 기도의 진수(眞髓) 내지는 참기도의 본령(本領)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종교이든 간에 이런 기도와 수행 방법이 아니고는 공효(功效)가 이루어질 수 없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 철 대종사가 ‘도감’에서 일깨워주고 있는 수행법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지감’ ‘조식’ ‘금촉’이다. 이것을 일컬어 ‘삼법수행(三法修行)’이라고 하거니와 이 세 가지 방법의 수행은 모든 종교의 수행방법을 아우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단군은 공자(孔子)나 노자(老子), 석가(釋迦)보다 훨씬 앞서서 세상에 뜻을 펼쳤으며 유교는 그 뿌리를 ‘지감법’에 두고 있고, 도교는 그 뿌리를 ‘조식법’에 두고 있으며, 불교는 그 뿌리를 ‘금촉법’에 두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인용된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느니 일컬어 풍류(風流)라, 삼교(三敎)의 근원이 선사(仙史)에 상비(詳備)하였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한 군생(群生)을 접화(接化)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연원과 내력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지감법’이란 글자 그대로 느낌(感)을 끊는 것(止)을 이르는 것인데, 느낌에는 기쁨(喜)과 두려움(懼), 슬픔(哀)라 성냄(怒), 탐냄(貪)과 싫어함(厭)의 여섯 가지가 있다. 공자는 이 느낌을 정심(正心) 즉 바른 마음과 수신(修身)으로 그치게 하고 제가(齊家)하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조식법’이란 숨쉼(息)을 고루(調)하는 것을 이르는 것인데, 숨쉼에는 맑은 김(芬)과 흐린김(歹闌 ) 찬김(寒)과 더운김(熱), 마른김(震)과 젖은김(濕)이 있다. 노자는 여섯 가지 숨쉼에서 허심(虛心)으로 숨을 고루고 세상을 초탈한 자연양생법(自然養生法)을 가르쳤던 것이다.
‘금촉법’이란 부딪침(觸)을 금(禁)하는 것인데, 부딪침에는 소리(聲)와 빛깔(色), 냄새(臭)와 맛(味), 음탕함(淫)과 살닿음(抵)이 있다. 석가는 정심(靜心) 곧 고요한 마음으로 부딪침을 다스리고 유물적(唯物的)인 부귀(富貴)를 멀리하면서 유심적(唯心的)인 자타일체(自他一体)의 경지를 가르쳤던 것이다
지감법은 한마디로 좌법 즉 앉는 자세에서 좌우되고, 그것은 충서공부(忠恕工夫)이고 예의(禮儀)로 귀결된다. 조식법은 한마디로 어떤 호흡법을 하느냐에서 판가름 나고 그것은 흔히 일컬어 신선공부(神仙工夫)라고도 하는데 조식법의 귀결은 조화(造化)이다. 금촉법은 한마디로 수인법(手印法)에서 좌우되고 그것은 참선공부(參禪工夫)이고 자비(慈悲)로 귀결된다.
이 세 가지 수행법은 각각 따로 할 수도 있지만 삼일신고에서는 반드시 같이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종교 가운데 이 세 가지를 같이 수행하는 곳은 극히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에 집중하여 2천년, 3천년의 세상제도를 했지만 아직도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세 가지 방법을 하나로 묶는 ‘삼법귀일(三法歸一)’일 수밖에 없으며, ‘삼법귀일’이면 곧 만법귀일(萬法歸一)로 귀결되기 마련인 것이다.
지감법이 좌법(坐法) 즉 앉는 자세에서 판가름난다면 어떻게 앉아야만 할 것이가. 흔히 수도하는 기본 좌법을 말할 때 반가부좌(半迦趺坐)나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필수적인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런 좌법이 나름대로의 뿌리와 전통이 있는 것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 배달 민족의 전통적인 좌법으로 정통성(正統性)을 갖는 것은 그런 좌법이 아니다.
우리의 정통좌법은 천부(天符)좌법 또는 일자(一字)좌법이라고 일컬어지는 궤좌(跪坐) 즉 무릎을 꿇고 앉는 좌법이다. 삼일신고의 독법(讀法)을 쓴 고구려의 마의극재사(麻衣克再思)는 단정히 꿇어앉는 ‘궤좌’야 말로 우리의 정좌법(正坐法)임을 밝힌바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정통 좌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른바 양반다리 좌법으로 앉던가 반가부좌나 결가부좌가 좌법의 큰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나는 좌법이나 자세가 개인의 수도 또는 수행을 좌우하는 기본조건이라고 강조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좌법이나 자세는 나라와 민족의 흥망과도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의 고난은 우리 민족의 좌법 내지는 자세가 나빴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법이나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바른 생각과 건전한 육체를 보지(保持)할 수 없는 법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지도자들의 좌법이나 자세가 바르지 못한 것을 보면 가슴이 절로 무거워진다. 더군다나 수많은 청소년들의 좌법이나 자세가 비뚤어지고 있는 상황은 바로 교육부재의 위기상황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을 바로 잡는 길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좌법과 자세를 바로 잡는 것에서 시발을 찾아야 하리라고 믿는다.
꿇어앉는 궤좌는 사사(私邪)로운 마음(魔音)이 나오는 육체를 굴복시켜서 우리의 한얼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첩경인 것이다. 앉는 좌세 그 자체가 큰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식사를 할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식사한다면 음식 맛도 맛이거니와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오게 마련이다.
수신(修身) 즉 몸을 닦는 길은 무엇보다도 정심(正心)으로 하여야 되는 법이다. 꿇어앉는 자세인 궤좌는 바로 정심(正心)공부의 첫 단계라고 강조해 두고 싶다.
조식법이 숨쉬기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라면 어떤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가. 숨쉬는 방법은 어떤 의미에서 무수히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흡 방법의 차이에 따라서 도가(道家)에서는 수많은 유파(流派)가 생겨났으며, 종교나 종파(宗派)에 따라서도 호흡의 방법을 달리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공효(功效)를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호흡 방법이 판이하다. 무도(武道)나 차력술(借力術)을 하는 경우에는 이른바 지식(止息) 즉 숨을 끊는 방법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심을 이룬다. 이에 반해 일반적인 의미에서 수도(修道)하는 호흡은 끊어지지 않는 자연 호흡이 주종을 이룬다.
그렇다면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조식법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순리(順理)에 맞는 자연 호흡법을 기조(基調)로 삼는 것이다. 순리의 자연 호흡법이란 끊어지지 않는 일원(一圓)을 이루는 숨쉬기를 말하는 것이다. 하늘도 둥근 일원이고 해도 일원이다. 지구도 일원이고 달도 일원이고 별도 일원이다. 그런 일원의 호흡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호흡법은 천부(天符)의 호흡법이라고 일컬어진다. 천부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것은 천인합부(天人合符) 즉 하늘과 사람이 하나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단군이래 전해 내려오는 천부경(天符經)은 바로 ‘천인합부’의 가르침을 말해주는 경전이다. 그것은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동시에 땅도 사람도 모두 하늘의 이치와 상통(相通)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하늘의 운행과 땅의 운행 그리고 인체의 운행이 모두 같은 이치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천부경은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일시무시(一始無始)로 시작해서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나는 81자(字)로 이루어진 경전이다. 여기에서 일(一)은 억천만물(億千萬物)의 본(本)이면 시(始)이며 종수(終數)이다. 일(一)은 둥그렇게 구부리면 원(圓)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一)에서 종(終)하는 일(一)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부경은 법륜운화운전(法輪運化運轉)의 법리(法理)를 밝힌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천부경은 천도(天道)와 지구(地球)가 불식(不息) 즉 쉬지 않고 순환(循環)하는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인체(人體)의 기(氣)와 혈(血)도 불식 순환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천부경은 비단 우주의 대도(大道) 뿐만 아니라 사람의 수련 특히 호흡을 통한 운화운전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원리는 모른 체 천부경이 있으니 지부경(地符經)도 있고 인부경(人符經)도 있다는 사설(邪說)이 횡행(橫行)하고 잘못된 호흡 수련법으로 세인을 현혹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늘(天)의 운화(運化)와 순환(循環)은 길고(長) 멀고(遠) 느린 것(緩)이 특징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량(無量) 무강(無彊) 무한(無限)한 것이다. 이에 비해 사람(人)의 운화와 순환은 상대적으로 매우 짧고(短) 급하고(急) 빠른 것(數〓삭)이 특징이다. 따라서 사람의 운화와 순환을 하늘의 법도에 맞추려면 호흡을 길고, 멀고 느리게 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하늘 이치에 맞는 호흡법은 곧 여천합덕(與天合德)하는 것이며 하늘이 곧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울러 하늘의 운화와 순환이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사람의 호흡도 그 운화와 순환이 인체의 중심 곧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부경에서는 그것을 본심본태양(本心本太陽)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단전(丹田)을 뜻하는 것이다
금촉법이 수인법에서 좌우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불가(佛家)에서는 수인법에 따라 공효(功效)가 다르다고 보기 때문에 수많은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특히 밀교(密敎)의 경우는 3백가지 이상의 수인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인 수인법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하나는 악고법(握固法)이고 또 하나는 합장법(合掌法)이다.
악고법이란 어린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에 태어날 때의 주먹 쥔 손의 모양을 일컫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준 최초의 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합장법이란 두 말 할 나위도 없이 두 손을 모아 하늘에 비는 자세를 일컫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온갖 고난에 시달리면서 하늘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게 하는 궁극적인 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는 육체의 오관(五官)이 소리와 빛깔, 냄새와 맛, 음탕함과 살닿음의 촉각(觸角)으로 말미암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네 가지 고통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사후(死後)의 영혼까지도 이것으로 결박당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요히 앉아 합장하므로써 불성(佛性)을 자각하여 금촉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삼일신고에 보면 금촉법으로 삼일신고를 반드시 읽으라고 되어 있다. “깨끗한 방을 가려 진리도(眞理圖)를 벽에 걸고 세수하고 몸을 깨끗이 하며 옷깃을 바로 하고 비린내와 술을 끊으며 향불을 피우고 단정히 꿇어앉아 한얼께 묵도하고 굳게 맹세를 지으며 모든 사특한 생각을 끊고 삼백예순여섯알의 단주(檀珠)를 쥐고 한마음으로 읽되 원문 3백 66자로 된 진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주에 맞추어 끝마칠지니라”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삼일신고를 읽는 회수에 따라서 나타나는 공력을 말하고 사특한 생각으로 읽는 형식만 취하면 오히려 수명과 복록이 줄게 되어 재앙을 입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지감’ ‘조식’ ‘금촉’의 세 가지 방법은 결국 하나를 생각하는 궤좌와 하나로 이루어진 둥근 호흡과 하나되기를 비는 합장으로 상징된다고 할 수 있다. 삼일신고는 지조금(止調禁)의 삼법을 오로지 힘쓰게 되면 ‘성통공완(性通功完)’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성통공완’이란 수행의 목표인 동시에 최고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삼일신고의 가르침은 성통공완이란 결국 수련과 봉행(奉行)을 함께 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아무리 수련에 온 정성을 기울인다고 할지라도 수련에만 시종(始終)하면 소승독선(小乘獨善)에 그쳐 대도(大道)에 어그러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봉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수련과 표리(表裏)를 이루고 본말(本末)을 이루는 것으로 선행(善行)과 음덕(蔭德) 그리고 호사(好事)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성통공완’한다는 것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홍익인간’이란 말의 참뜻은 ‘성통공완’으로 표상된다는 이야기이다.
이점과 관련해서 백두산의 백봉 신사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수행은 ‘내수(內修)’와 ‘외자(外慈)’라고 말한바 있다. ‘내수’란 곧 내적인 수행을 일컫는 것인데 그 내용은 좌법과 호흡과 독경(讀經)이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외자’란 자선사업뿐만 아니라 음덕과 선행을 쌓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백봉 신사가 말하는 홍익인간의 근본정신은 일개인(一個人)이나 일개의 국가 또는 하나의 사상이나 하나의 종교의 테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얼의 뜻을 받들어 무사(無私)의 정신으로 대도(大道)를 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 철 대종사의 수행법은 삼법수행과 함께 세 가지의 특징이 크게 부각된다. 첫째는 단군 유적지 순례를 통한 수행이고 둘째는 만주 무송(撫松)의 백두산 밑에서 72일간의 단식(斷食) 수행을 한 것 그리고 셋째는 구월산 삼성사에서 수행의 최고경지인 절식(絶息)으로 순명(殉命) 조천(朝天)한 것이다.
특히 72일간의 단식수행은 그것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법 자체로서도 크게 기록되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종교적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의 40일간의 광야에서의 단식 기도가 괄목할 만한 것이고 석가의 단식고행이 수련의 수범이 된바 있다. 그러나 일찍이 72일간의 단식이란 기록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나 철 대종사의 그런 기록은 엄동설한의 겨울철에 그것도 만주땅 백두산 밑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거의 기적 같은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누구나 죽었으리라고 생각하던 혹한의 상황에서 몸에서 뜨거운 김을 뿜어내며 72일간의 단식 수행을 마무리 지은 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런 단식 수행을 두 가지 각도에서 풀이한다. 첫째, 나 철 대종사의 인연이 남달랐고 단군 이래의 수련비법을 전수 받았기 때문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만약 수련 비법인 해의 기운과 달의 기운 그리고 북두칠성의 기운을 운화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 나 철 대종사가 좌정했던 무송의 영산(靈山)은 백두산의 영기를 받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곳은 기록에 따르면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 종사가 대종교시교당과 학교를 세운 곳이 기도하지만 백봉 신사가 백두산 밑의 수련 거점으로 지정한 곳이기도 했다. 만약 백두산의 영기가 스며 있는 곳이라면 그 앉은자리에서 더운 기운이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까닭이 없을 것이다.
나 철 대종사가 스스로 숨을 끊은 절식(絶息)으로 순명했다는 것은 종교의 역사로나 수행의 역사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석가는 수를 다해 열반했고, 공자는 병사했고, 노자는 우화등선했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인간의 죄를 대속했다. 그러나 나 철 대종사는 스스로의 숨을 끊어 버린 것이다. 수련의 경지에서 말한다면 숨을 스스로 절식(絶息)하여 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코나 입으로 숨을 쉬지 않고 끊는다고 할지라도 체호흡(體呼吸) 내재는 세포호흡(細胞呼吸)을 하게 되면 죽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 다다른 경우일지라도 세포 하나 하나에게 숨을 끊도록 하는 공력을 갖고 있다면 물론 숨은 끊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상상하기는 어려운 경지이다. 바로 이런 경지를 나 철 대종사는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나 철 대종사가 조천한 이후 대종교의 지도자들은 민족혼을 일깨우고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는데 전심전력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백포(白圃) 서일(徐一)종사는 회삼경(會三經) 등을 저술하여 수행의 마당을 넓혔고,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종사는 배달민족사를 바로 세웠고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종사는 대종교사정리와 함께 ‘삼법회통(三法會通)’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단암(檀庵) 이용태(李容台) 선생은 삼법회통을 풀이한 ‘수진비록(修眞秘錄) 삼설일록(三說一錄)’을 저술했다.
특히 ‘삼법회통’과 ‘수진비록․삼설일록’은 우리 민족의 삼법수행법을 최초로 구체화하고 저작으로 남겼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 철 대종사의 특징적인 수행법과 함께 삼법 수행의 참 의미와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새롭게 조명되고 연구와 수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남북의 민족 통일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세계 속의 홍익 인간 이념의 구현을 위해서 오늘의 세대(世代)가 지닌 역사적 책무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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