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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07-08-08 오후 2:12:44 조 회 수 2147
제 목 [종사상] 홍암 나 철의 생애와 구국운동
내 용

이 동 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1. 머리말

한국근대민족운동사에서 대종교 · 기독교 · 천도교 · 불교 등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종교는 단군 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종교로 일제침략에 대항한 항일투쟁에 괄목할 만한 업적과 성과를 거두었다. 1909년 교조 羅喆에 의해 檀君敎로 창시되었다가 1910년 8월 경술국치 직전에 大倧敎로 교명을 바꾸었다. 대종교는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중국 吉林省 和龍縣 三道溝 靑波湖로 옮겨 대종교총본사를 이전하고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종교는 서간도일대에 시교당을 설립하고 博達學園, 東昌學校, 白山學校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7년 7월 ‘대동단결선언’을 공표하고, 1919년 2월에는 ‘대한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독립의지를 밝혔다. 아울러 대종교인이 중심이 되어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단체로는 重光團 · 正義團 · 北路軍政署(大韓軍政署) 등을 들 수 있다. 대종교인들의 항일독립운동은 東圓黨이라는 비밀조직을 통해 추진되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을 위한 종교 또는 조직으로 인식될 정도로 한민족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독립운동지도자들 가운데 대종교 관련인사가 상당수 있었다. 대종교 교조 나 철, 2대 교주 金敎獻, 3대 교주 尹世復을 비롯하여 徐一 · 朴殷植 · 申采浩 · 李東寧 · 李始榮 · 李相龍 · 金佐鎭 · 申圭植 · 柳東悅 · 李範奭 · 洪範圖 · 李相卨 · 朴贊翊 · 金承學 · 曺成煥 · 趙琬九 · 黃學秀 · 金枓奉 · 安熙濟 · 徐相日 등을 들 수 있다. 국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대종교 교도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대종교가 독립운동선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대종교 교조 홍암 나 철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구국을 위한 의지와 사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2. 출생과 성장

나 철은 1863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면곡부락 115번지에서 羅龍集의 세 아들 중 둘째아들로 출생하였다. 초명은 ‘斗永’이고, 號는 耕田(經田), 字는 文卿이다. 뒤에 ‘斗永’을 ‘寅永’으로 개명하여 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에 올라 ‘羅寅永’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후 1909년 단군교를 重光하고 ‘寅永’을 외자인 ‘喆’로 다시 개명하였고, 道號를 弘巖으로, 堂號를 一之堂으로 改名, 改號하였다. 그 이유는 이름에서부터 유교적인 行列을 버리고 민족 주체성을 되찾으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나 철은 어려서는 당시 호남의 석학인 구례의 王錫輔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1년(29세) 6월 대과에 장원하여 관직에 올라 같은 해 11월 25일 承政院 假注書(史官)가 되었고 承文院 權知副正字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1895년(33세) 5월 12일 徵稅局長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나 철은 일제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 가자 국권수호를 위한 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04년 나 철은 호남출신 청년지사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단체인 維新會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 침략 야욕을 노골화하고 1905년에는 을사5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등 국운이 점차 기울어 가자 나 철은 吳基鎬 · 李沂 · 洪弼周 등과 함께 일제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對美外交活動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또한 4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對日外交抗爭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나 철은 평화적인 외교활동으로는 도저히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투쟁방략을 전환하여 친일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을사5적 처단거사를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나 철은 大韓自强會와 湖南學會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호남학회에서는 1908년 6월 李沂와 함께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07년 國債報償運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권수호에 앞장섰다.
나 철은 국권수호를 위해 다방면에 걸쳐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고민하던 중 민족주체성을 확립하고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1909년 단군교를 창건하였다. 다음해인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고 포교활동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하였다.



3. 대일외교항쟁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1904년 8월 22일 외부대신서리 尹致昊와 일본공사 林勸助 사이에 ‘외국인 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을 강제로 체결하고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 협정에 의해 외교고문에는 미국주재 일본공사관 고문 스티븐스가, 재정고문에는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 目賀田種太郞을 임명하였다. 또 일본인 丸山重俊을 경무고문, 幣原坦을 학부참여관으로 임명하여 한국의 외교 · 재정 · 경찰 · 문교 등 내정간섭을 노골화하였다. 일제는 외국인 고문 임명과 동시에 일본군사령관 長谷川好道가 병력을 주둔시키고 1905년 서울의 경찰치안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이 노골화 되어가고 국운이 기울어가자 국권회복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나 철은 오기호 · 이기 · 鄭薰模 · 金寅植 등과 함께 국제여론을 파악하고 민간외교항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당시는 카쓰라-테프트밀약과 포오츠머드조약 체결을 앞두고 있는 시점으로 한국문제가 불리하게 전개될 것을 예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나 철은 외부대신 李夏榮을 찾아가 이 문제를 협의하여 대한제국 정식대표로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주선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공사 林勸助의 방해책동으로 도미외교항쟁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나 철은 방략을 변경하여 이기 · 오기호 등과 함께 한국침략 당사국인 일본으로 건너가 4차례에 걸친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제1차 대일외교항쟁은 1905년 6월 나 철은 동지들과 함께 일제의 저지를 피해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나철 일행은 한국침략을 주도한 핵심인물인 伊藤博文 · 大隈重臣 · 望月龍太郞 등을 차례로 만나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한국 · 일본 · 중국 삼국이 동맹하여야 하며 일본은 한국에 대해 善隣의 交誼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이등박문과 일본천황에게 격문을 보내어 평화조약 준수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일본의 한국침략이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무익한 처사로 이를 지양하고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나 철 일행이 일본에서 대일외교항쟁을 벌이던 중 1905년 11월 18일 을사5조약 강제체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목이 잘리더라도 협약에 동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고, 한국침략의 원흉인 일본특파전권대사 이등박문에게 항의서한도 발송하였다. 또한 일본천황에게도 을사5조약 강제체결이 부당함을 주장하는 항의서한을 보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에서의 대일외교항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1906년 1월 24일 일단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일제가 을사5조약을 강제체결하자 張志淵은 󰡔皇城新聞󰡕에 ‘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울분을 토로하였고, 閔泳煥 · 趙秉世 등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자결 순국하였으며 전국규모의 의병전쟁이 일어났다. 나 철과 그의 동지들은 을사5조약을 강제 체결한 매국대신들을 ‘을사5적’으로 규정하고 ‘을사5적 처단 의거’를 감행하기로 하였다.
나 철의 제2차 외교항쟁을 위한 도일은 1906년 5월 12일인데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으나 곧 바로 귀국하였다. 1906년 10월 20일 나 철은 姜基煥과 함께 일본 동경으로 가서 제3차 외교항쟁을 전개하였다. 나 철은 국내에서보다는 한국침략정책을 수립하는 일본정계의 중심인물인 松村雄之進 · 頭山滿 · 岡本柳三助 등을 만나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나 철 등이 일본에서 수 차례에 걸친 활발한 외교항쟁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고 내정간섭을 노골화하여 한국을 반식민지화하려 하자 투쟁방략을 바꾸기로 하였다. 나 철과 그의 동지들은 을사5적 처단의거를 위해 일본에서 단도 2자루를 구입하고 1906년 12월 귀국하였다.
나 철은 1907년 3월 25일 을사5적 처단의거가 실패하자 지도로 유배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7일 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나 철은 3차례에 걸친 대일외교항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1908년 11월 정훈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제4차 대일외교항쟁을 계속하였다. 일본정계요로와 만나 외교담판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 을사5적 처단의거

나 철과 오기호는 을사5적 처단의거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自新會를 조직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는데 2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朴大夏 · 李鴻來 · 金東弼 · 李容彩 등과 상의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고 을사5적 처단거사를 결의하였다. 나 철과 오기호는 먼저 거사에 필요한 무기와 자금 조달을 위해 자기 부인들의 패물을 팔았고, 李光秀(成均館博士) 2만냥, 李容泰(前內部·宮內府大臣) 1,700원, 鄭寅國(前郡守) 300원, 尹柱瓚(農商工部 主事) 1,000원, 崔翼軫(扈衛局員) 200원, 閔衡植(學部協辦) 1만 4천냥, 金然灝(前參奉) 5千金이 모금되었다. 그리하여 모금된 거사자금으로 김동필이 인천에서 권총 50정을 구입하고 거사일을 1907년 2월 13일로 정하였다. 거사일로 정한 2월 13일은 음력 1월 1일로 文武百官이 陳賀차 입궐하는 날이었다. 결사대원 30인을 선발하여 이기가 작성한 自新會趣旨書와 나 철이 작성한 愛國歌, 同盟書, 斬奸狀과 무기를 휴대하였다. 또한 윤주찬은 이광수와 함께 대한제국 정부에 올리는 글과 일제 통감부와 군사령부 그리고 각국 영사관에 보내는 공문 및 내외국인들에게 알리는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을사5적 결사대 구성은 다음 표와 같다.


처 단 대 상
결 사 대 장
결 사 대 원
參政大臣 朴齊純
吳 基 鎬
10명 내외
內部大臣 李址鎔
金 東 弼
10명 내외
軍部大臣 權重顯
李 鴻 來
10명 내외
學部大臣 李完用
朴 大 夏
10명 내외
法部大臣 李載克
徐 泰 運
10명 내외
前軍部大臣 李根澤
李 容 彩
10명 내외


나 철은 을사5적 처단의거 하루 전날인 3월 24일 동지들을 모아 다음과 같은 글로 격려하였다.

여러분, 오늘의 이 일은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둘도 없는 바른 길이요, 우리 2천만 민중의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자유를 사랑한다면 決死의 각오로 힘써 주시오. 이 5적을 베어서 내부의 병통을 제거한다면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은 길이 독립된 나라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 성공하느냐가 오늘에 있고 그 실패하느냐가 오늘에 있습니다. 사느냐가 여러분에게 있고 죽느냐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인영이 부족한 몸으로 이 의거를 주창하면서 오늘 줄줄이 흐르는 눈물을 거두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피를 씻으며 心膽을 기울이고 엎디어, 이 의거를 우리 血性있고 智勇있는 여러분의 가슴 앞에 제출합니다. 여러분 각기 순결한 애국심을 격려하여 빨리 흉악한 매국적을 베어서 우리 나라를 높이 이 세계상에 독립하게 하여 주시오. 그런다면 인영은 18지옥에 들어가서 恒河沙의 온갖 고통을 당하더라도 한량없이 기쁘겠습니다. 부디 부디 힘써 주시오

1907년 3월 25일 결사대원들은 각자 정해진 장소에 분산 배치되어 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참정대신 박제순이 광화문 앞을 지날 때 오기호가 지휘를 잘못하여 기회를 놓쳐 실패하고 말았으며, 법부대신 이재극이 서대문을 통과하기를 기다렸으나 워낙 경비가 삼엄하여 결행하지 못하였다. 또한 군부대신 권중현이 中署寺로 통과할 때 저격하였으나 실패하고 결사대원 康相元이 체포되고 말았다. 내부대신 이지용을 남대문부근에서 처단하려 하였으나 강상원 체포로 경계가 삼엄하여 일단 해산하였다. 을사5적 처단의거가 실패하자 나 철 · 오기호 · 金憲植 등은 박제순과 이지용을 처단하기 위해 재차 폭탄을 넣은 상자와 편지를 외국인이 보낸 것처럼 가장하여 집으로 배달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을사5적 처단의거가 실패로 끝나자 대한제국 정부는 이 사건을 정부전복을 위한 내란사건으로 규정하고 체포된 자들을 평리원으로 이송하고 진상파악을 위해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나 철은 재거사를 위해 박대하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결사대원을 다시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서창보가 체포되어 거사전모가 밝혀지자 1907년 4월 1일 나 철 · 오기호 · 김동식 · 이기 · 이광수 등 지도부가 자수하였다. 재판과정에서 나 철은 매국역적을 처단하려한 의거를 내란죄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하였으나 나 철을 비롯한 18명이 형을 선고받았다. 나 철은 流刑 10년, 이용태와 閔衡植은 교수형, 오기호는 5년을 각각 구형받았다. 그후 민형식 외 1명은 黃州郡 鐵島로, 나 철 외 11명은 智島로, 李承大외 12명은 珍島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나 철과 오기호는 1907년 12월 7일 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5. 대종교 중광과 사상

나 철은 기울어 가는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도미외교항쟁, 도일외교항쟁, 을사5적 암살 등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국권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략으로 채택한 것이 바로 한국 고유의 민족종교를 창시하고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여 이를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우리 민족종교는 그 원류가 檀君朝鮮에서 계승되어 부여에서 代天敎, 신라에서 崇天敎, 고구려에서 敬天敎, 발해에서 眞倧敎, 고려에서 王儉敎로 전승되어 오다가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 원종때부터 단절되었다. 나 철은 단절된 한국 교유의 민족종교를 ‘重光’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檀君敎를 창립하였다. 단군교포명서에 단군교 ‘重光’의 의미를 언급하고 있는데 “국조 단군이 창립했던 단군교가 고려때 몽고 침입 이후 약 700년간 단절되었던 것을 한말에 다시 계승하였다”고 하였다. 단군교포명서에는 단군교의 교리, 단군교 중광의 동기, 단군교의 성격 등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1909년 1월 15일 나 철 · 吳赫(오기호) · 이기 등은 서울 齋洞에 모여 단군교를 ‘重光’하였다. 단군교 중광 당시 참석한 인사로는 姜虞 · 崔顓 · 柳瑾 · 정훈모 · 김인식 · 金春植 · 金允植 등 수십 명으로 주로 나 철과 함께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한 인사와 을사5적 처단의거에 참가했던 인사들이다. 그들은 翠雲亭아래 6間 草屋 北壁에 ‘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하였다. 단군교포명서의 주요내용은 ① 단군의 교화가 멀리 중국에까지 미쳐 알려졌고 ② 그 전통이 역대로 계승되어 왔으며 ③ 근세조선에 와서 그 전통이 쇠미해지고 ④ 따라서 국가도 미약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유자들이 단군의 신성한 교는 연구하지 아니하고 孔孟程朱의 글에 치우쳤기 때문이며 ⑤ 모든 동포는 모두 단군교를 숭봉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 영원한 복록을 받고 이 세상 인류를 구제해야 한다는 요지이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1910년 8월 5일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대종교 교조 홍암 나 철의 사상은 ‘대종교 8대경전’인 󰡔天符經󰡕 · 󰡔三一神誥󰡕 · 󰡔神理大全󰡕 · 󰡔神事記󰡕 · 󰡔會三經󰡕 · 󰡔八理訓󰡕 · 󰡔眞理圖說󰡕 · 󰡔三法會通󰡕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대종교 8대경전을 통해 나 철의 단군관 · 본체관 · 인류관 · 주체관 · 종교관 · 우주관 · 세계관 · 인생관 · 구세관 등 대종교의 심오한 사상을 이해할 수 있으나, 본고에서는 나 철이 대종교를 중광 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하여 단군관과 주체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檀君觀

단군교포명서에는 우리 민족의 신앙의 대상을 단군으로 하여 단군을 “大皇祖 檀君聖神”이라 하였다. 또한 단군이 ‘天命을 受하시고 檀木雲宮에 降臨하샤’라고 하였다. 단군에게 내린 ‘天’에 해당하는 신위는 ‘聖雲’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종교 경전에는 ‘단군’이라는 용어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帝’ · ‘神’ 또는 ‘一神’이라는 표현이 있을 뿐이다.
대종교 교조 나 철은 이 사상을 계승하여 ‘····· 三位一体시니 桓因과 桓雄과 桓儉이라 함이 實我 天祖 檀君一位의 神을 分称함이며’라고 하여 단군을 우리 민족의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神理大典󰡕 등 자신이 저술한 대종교 경전에는 ‘단군’이라는 용어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포고문 등 일반문서에서는 ‘단군’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경전과 같은 진리서에서는 우주적인 ‘한얼님’을 내세워 特殊性(민족)과 普遍性(세계)을 적절하게 구분하여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단군을 宇宙의 本体인 ‘한배 한얼님’의 作用 자리로 보아 特殊性을 띤 倍達民族에게는 ‘단군 한배검’을 신앙의 대상으로 내세워 하느님과 단군을 일체화하여 우리 민족의 긍지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보편성을 띤 경전에서는 단군을 말하지 않고, 神(하느님)을 내세웠으니 이것은 세계를 평등화하는 우주적인 종교임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信仰의 對象을 体(本體)와 用(作用)으로 나누어 특수성(민족)에는 用인 ‘단군’을 강조하고, 보편성(세계)에는 体인 ‘一神’을 주장한 全體的인 調和를 강조한 사상이다.


(2) 主體觀

대종교 교조 나 철의 종교적 특성은 철저한 主體思想의 중흥과 확립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① 현생인류의 始源地가 白頭天山이라는 점.
② 宇宙의 本體요 主宰인 ‘한(神)’이 백두천산에 下降하시어 敎와 政을
열으셨다는 점.
③ 우리 배달민족은 그 ‘한’의 天統과 聖血을 직접 계승한 神子天孫인
하느님의 宗孫이라는 점.
④ 그래서 天下 万道 万敎가 우리 백두산의 倧道에서 分派되어 나갔다
는 점.
⑤ 이러한 배달민족 고유의 正統宗敎와 思想과 歷史를 弘巖이 繼承 重
光하였다는 점.

등은 하나의 반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이며, 다만 오랜동안 外勢와 事大의 창궐로 말미암아 잠시 매몰되었던 것일 뿐이라는 확고한 신념에 바탕을 둔 주체관이다.
또한 진리상으로도 본아가 되는 ‘한얼(하느님)’은 내밖에 외존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내재한다는 주체아를 우주의 본체로 하였다.

나 철이 1909년 단군교를 중광 할 당시 공포한 ‘단군교포명서’ 내용을 살펴보면 단군교 교리와 단군교를 중광하게 된 동기와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단군교포명서에는 우리 역사에서 단군교를 신봉한 箕子 · 高句麗 東明聖王 · 乙支文德 형제 · 廣開土大王 등은 모두 성공하였으나 불교를 받아들인 百濟와 新羅는 멸망하였고, 大祚榮의 단군교신앙에서 渤海 300년의 創興, 그리고 신라 金春秋 · 金庾信시대는 단군교로 번성하다가 불교와 유교로 쇠망하였으며, 高麗 王建의 父祖가 불교와 유교를 篤信하여 가정의 견문을 承襲하였으나 그 후 蒙古의 침입으로 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한국역사를 돌이켜 볼 때 단군을 숭배하고 단군교를 신봉한 위정자나 개인은 성공하였고, 외래종교인 불교와 유교를 신봉한 국가나 개인은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고 전제하고 나 철은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하는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중광하여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일제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6. 중국으로의 대종교총본사 이전과 망명 활동

1909년 나 철은 단군교를 중광하고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여 교세가 확장되어 교도수가 2만 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1910년 8월 5일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아울러 대종교총본사를 중국으로의 이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칭한 이유는 ‘단군교’라는 용어자체가 단군을 모시는 민족종교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나 철은 ‘대종교’로의 교명 개칭과 함께 1910년 10월 25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에 支司를 설치하고 총본사 이전계획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교명 개칭문제로 교조 나 철과 정훈모 사이에 爭訟問題가 발생하여 정훈모는 단군교 교명을 그대로 유지하고 서창보 · 兪鐸 등의 추대을 받아 都敎長이 되어 국내에 머물게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포교활동이 금지되자 나 철은 동지들과 함께 1911년 7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여 강화 · 평양을 경유하여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 北麓 청파호를 답사한 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총본사를 이전하였다. 총본사를 이전하고 靑一學校 등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대종교총본사를 중국으로 이전한 후 나 철은 교단조직을 정비하였는데 총본사 산하에 동서남북 四道本司를 설치하였다. 1914년 당시 교구는 다음 표와 같다.


구 분
관 할 구 역
東道本司
동만, 노령 연해주, 함경도
西道本司
남만, 중국, 몽고, 평안도
南道本司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北道本司
북만, 흑룡강성


나 철은 교단조직을 정비하고 각 교구 주관자를 임명하였는데 동도본사 서일, 서도본사 신규식 · 이동녕, 북도본사 이상설, 남도본사 강우이다. 대종교가 중국으로 총본사를 이전한 후 교세가 확장되어 대종교 교도수가 30만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대종교 포교활동에 탄압이 가해져 1914년 11월 중국 화룡현 지사로부터 대종교해산령이 내려졌다.
교조 나 철은 중국으로 대종교총본사를 이전하고 교단을 정비한 후 서울로 돌아와 남도교구에서 교단조직과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5년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종교가 아니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남도본사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나 철은 일제의 간악한 탄압과 만행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 천진전을 떠나 1916년 8월 15일 九月山 三聖祠에서 유서를 남기고 순국하였다.



7. 맺음말

대종교 교조 나 철은 186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으나 일제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 가자 관직을 버리고 국권수호운동에 투신하였다. 나 철은 1904년 비밀결사단체인 유신회를 조직하고 청년지사들을 규합하였다. 당시는 일제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 주권수호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나 철은 먼저 외교적인 방법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4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평화적인 외교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방략을 전환하여 국내 친일정권을 타도하고자 자신회를 조직하고 을사5적 처단의거를 결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외에도 나 철은 대한자강회 · 호남학회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 등 다방면에 걸쳐 애국계몽운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나 철은 1909년 오기호 · 이기 등과 함께 단군교를 중광하여 민족주체성을 확립하고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단군교가 교세가 확장되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단군교를 탄압하고 포교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에 나 철은 1910년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대종교총본사를 중국으로 이전하였다. 중국으로 총본사를 이전하고 망명한 나 철은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교단조직을 정비하여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대종교 교조 나 철은 일제의 간악한 탄압을 견디다 못해 1916년 순국하였다. 나 철은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정신적인 구심점을 대종교를 통해 확고하게 수립하고, 한민족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진 종교가요, 사상가요, 독립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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