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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08-04-16 오후 1:21:50 조 회 수 1226
제 목 국학사상가를 찾아서(1)_ 홍암 나철
내 용
본명은 인영(寅永)이며 호는 홍암(弘巖)으로, 전남 벌교에서 출생했다.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거쳐 33세 때 징세서장(徵稅署長)의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국운이 기운 것을 목격하고 곧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04년 오기호(吳基鎬:1865-1916)·이기(李沂:1814-1909) 등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그 후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세우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간 그는“동양평화를 위해 한·청·일 3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서 부조(扶助)하자”는 내용을 일본 정계에 전달하고, 3일간 단식농성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조약체결에 협조한 매국노를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한편 그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을 때 서울역 근처에서 백전(伯佺)이라는 노인으로부터 후에 대종교의 경전이 된〈삼일신고(三一神誥)〉와〈신사기(神事紀)〉를 전해 받은 바 있었고, 1908년 도쿄[東京]의 한 여관에서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을 만나 대종교의 중광(重光 : 다시 일어남)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단군교포명서(檀君敎布明書)〉를 받았다. 그 해 12월 도쿄의 한 여관에서 정훈모와 함께 두일백으로부터 영계(靈戒)를 받았다. 정치적 구국운동에 대한 좌절 대신 민족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돌린 나철은 마침내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이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重光節)이라고 한다.

나철의 입지 과정을 보면, 그는 전남 벌교의 한미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교적 소양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했다. 그가 개화사상에 눈을 돌려 근대화에 눈을 뜬 것도 유학자의 안목에서다. 그가 여러 차례의 도일활동(渡日活動)을 통해 외교적 독립을 외쳤던 것도 유교적 우국지사로서의 행동이요, 을사매국오적에 대한 주살(誅殺) 거사도 유학자로서의 비분강개였다.
나철이 유학자로서의 허물을 벗고 국학자로서 변신하는 계기는 단군신앙을 접하면서다. 그는 대종교 중광을 계기로 국어·국문·국사·국교의 회복을 통해, 노예적 사관에서 자주적 사관으로 유·불 정신에서 신교(神敎) 정신으로 그리고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우뚝 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국학적 관점에서 나철은 창교(創敎)가 아닌 중광(重光 : 다시 일으킴)을 택함으로써, 사상적·시간적·공간적 특성을 두루 갖춘 순수 국학적 요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대종교에 의해, 우리의 국교 관념이 대두되고 국어·국사의 연구가 주도되었다는 사실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나철이 단군 신앙의 중흥을 모색한 배경에는 평소 그가 품어 온 정신의 중요성이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는 망국으로 치닫는 격변기에 우국의 행보를 옮기면서도, 늘 시대적 사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정신’을 갈망했다. 그가 평소 품어오던‘국망도존(國亡道存 :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의 가치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의 부활을 후일 대종교의 중광에서 찾는데, 박은식이 찾아 지키고자 했던‘국혼’과 신채호가 갈구하던‘국수’의 의미로도 연결되는 것이다.
나철은 단군교 포교과정에서 순수 우리말을 구사하면서 주시경·김두봉·이극로 등으로 이어지는 한글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나철은 국사인식에서도 기존의 유교·불교 사관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인식의 토대는 단군교단으로부터 전수받은 교리(敎理)·교사(敎史)와〈단군교포명서〉등과 같은 문류(文類)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다. 그는 반존화적 역사관과 함께 신교적(神敎的) 정신사관을 통하여 민족사학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김교헌·박은식·신채호로 이어지는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지평을 개척했다.
또한 나철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국교의식을 환기시켰다는 점이 특기된다. 그는 대종교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연면히 흘러온 종교이며, 우리 민족의 종교적 사유를 가장 옹글게 간직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박은식은 대종교가 국교의 가치가 있음을《한국통사》에서 언급했고, 신채호도 단군신앙이 우리 민족의 국교임을 주창했으며, 정인보 역시 해방 후〈순국선열추념문〉을 통하여 국교의 기원을 단군에 두고, 나철을 국교(國敎)로써 민족의 뜻을 뭉치려 하였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철학적인 방면에서도 나철의 업적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사유체계를 유·불·선을 통섭(統攝)하는 삼일철학(三一哲學) 혹은 종사상(倧思想)이라는 가치로 체계화시킨 점이 눈에 띈다.
한편 나철의 국학정신은 닫혀있는 가치가 아니다. 흔히들 국학하면 국수적이고 폐쇄적인 가치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바람직한 국학의 본질이 자기만을 고집하는‘닫힌 학문’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올바른 연구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해 가는‘열린 학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홍암의 국학정신이 갖는 또 하나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철은 일제의 대종교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국외 포교로 교단을 유지하고자 만주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에도 힘을 기울여 1911년에〈신리대전(神理大全)〉을 간행했다. 1914년에는 교단본부를 백두산 북쪽에 있는 청파호 부근으로 이전하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확장에 주력하여 30만 교인을 확보했으나 일제는 1915년 10월‘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교단 존폐위기에 봉착하게 된 그는 1916년 8월 15일 구월산의 삼성사에서 일제에 대한 항의표시로 49세의 나이로 순교조천(殉敎朝天)했다.

지금도 백두산 북쪽 기슭인 만주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가면 초라한 무덤 셋이 있다. 하나는 민족사관의 선봉에 섰던 무원 김교헌이고 또 하나는 무장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 백포 서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스승이자 국학의 선각인 또 한 사람의 무덤이 그 곳에 있다. 국학이 무너진 우리의 분단 현실을 세월의 무게로 짊어진 채로, 1916년 8월 15일 자진순명(自盡殉命)한 홍암 나철의 무덤이 그것이다.
(<배달민족의 역사의식과 사상가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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