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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07-11-14 오후 3:48:20 조 회 수 1312
제 목 우리 국학의 반성과 과제
내 용
김동환(국학연구소 연구원)



국학과 관련하여 우리의 주변 상황은 밝은 것이 하나도 없다. 국내적으로는 民族解體論과 國史無用論 등등의 反國學的 주장들이 득세를 하고, 국외적으로는 동북아 패권 장악을 위한 중국과 일본의 음모가 한층 가열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나온 우리 국학의 자취를 보면, 고려 중기 이후 빼앗긴 국학의 주도권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삼국시대 집권층에 통치논리로 등장한 佛學과 과거제도의 도구과목으로 자리 잡은 기득권층의 儒學이 우리의 국학인 양 고착된 것이다.

兩亂 이후 華夷論的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일면서, 단군의식에 대한 강조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단군의식에 대한 강조가 기존의 정치세력에서 소외되었던 小論․南人 계열의 지식인들이나, 성리학적 사상적 경험을 달리하는 道家的 지식인들에 의해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특히 조선 숙종조인 1675년에 만들어진 『揆園史話』는 성리학적 성향을 완전히 벗어버린 단군 중심의 사서로서, 현존하는 조선조의 기록 중 단군에 관한 체계적인 내용을 편년체의 형식으로 묶어놓은 유일한 서적이다. 北崖子의 저술로 알려진 이 책에서는 「檀君記」라는 부분을 통하여 1세 단군 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의 행적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규원사화』에서는 단군신앙의 원류이며 우리 국학의 줄기인 神敎의 기원과 흐름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북애자는 『규원사화』를 통해 유교에서 본질적으로 벗어나지 못한 허목 등의 탈성리학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성리학의 본질적 한계성을 냉철하게 지적하면서, 요동치는 국제질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본질적인 변혁이 필요함을 주창하였다. 요컨대 성리학에 편승한 단군론이 아니라, ''本性'' 에 입각한 단군론을 제시하였다는 면에서 유학을 근간으로 한 단군론자들과 차원이 다른 사상적 혁명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18세기 들어 단군의 존재를 강렬하게 부각시킨 국학 인물로 이종휘(李種徽:1731-1797)를 꼽을 수 있다. 이종휘는 『東史』라는 저술을 통해 단군을 本紀에 수록하면서, 단군을 중국황제와 대등하게 다루었다. 그는 우리 민족 고대 神敎의 근원을 단군에서 찾은 인물로, 마니산 제천․태백산의 檀君祠, 기자의 交神明, 부여의 鯤淵祀, 고구려의 太后廟․동맹․東明廟․隧神祀․仙人, 신라의 神山信仰 등이 모두 단군의 신교를 계승한 것이라 했다.

19세기 말에는 한국 巫俗의 기원까지도 단군에서 찾으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1885년 필사본으로 나온 『巫堂來歷』(서울대학교 규장작 소장)이 그것이다. 『무당내력』에서는 한국 무속의 기원이 檀君神人의 신교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조선 말기의 민간 무속신앙 속에도 단군신앙이 급속히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白峰이라는 인물이 주도한 백두산 修鍊集團은 단군신앙의 맥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집단으로서, 단군과 관련된 經典類와 史書類를 세상에 내놓아 20세기 단군 열기와 국학연구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제는 19세기말부터 우리 역사에 대한 목적성 연구를 본격화했다. 본디 일본의 조선연구의 출발은, 에도시대 일본의 주자학자들이 조선의 주자학, 특히 이 퇴계의 학문을 존경․연구하는 입장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고사기』『일본서기』 및 그 밖의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이 등장하면서, 일본이 태고시대부터 조선을 지배해 왔다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형성한 조선관은 막부말기의 ‘정한론’, 메이지 이후의 조선침략의 유력한 관념적 지주가 되었고, 소위 ‘일선동조론’․‘일한일역론’으로 불려지는 의식형태로 고착화되었다.

20세기 초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소위 식민지주의사학을 본격적으로 접맥시켰다. 식민지사관의 목적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역사적 견지에서 정당화 하려는데 있었고, 그 내용의 핵심은 한국사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강조함에 있었다. 타율성론이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즉 한국의 역사는 북쪽의 중국․몽고․만주와 남쪽의 일본 등 이웃한 외세의 침략과 압제 속에서 비주체적으로 전개 되어졌다는 것이다. 이 타율성 이론은 만선사관, 반도적성격론, 사대주의론 등의 특수한 관점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또한 정체성론은 한국이 왕조의 교체 등 사회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 사회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려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자였던 후꾸다는 “근대사회의 성립을 위해서는 봉건 제도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전제에서, 한국이 근대화에 늦어 혼미하고 있는 근원을 조선에 봉건제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사를 비교하여 20세기 초의 한국의 사회 경제발전단계는 일본에 있어 고대 말 10세기 경의 후지와라시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체성이론은 한국사의 사회경제적 낙후성을 지적하는 단순성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논리는 이렇게 소위 정체된 한국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일제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그 저의가 있기 때문으로 식민지사관의 근본정신과 직결되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사관에 의해 강조된 한국사의 변개 부분의 실례를 몇 가지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사의 시대 구분에 있어, 특히 낙랑군시대를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중국의 피지배시대임을 강조했다.
② 단군에 대한 사실을 보이지 않고 의식적으로 기자를 먼저 내세워 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했다.
③ 신라․백제의 실제 건국을 4세기 이후로 미루어 은근히 우리 역사의 후진성을 강조했다.
④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백제․신라가 강성한 후에도 옛 삼한지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나라는 일본이었다고 주장했다.
⑤ 외세의 한민족 지배를 강조하는 것만큼, 한 민족의 대외 전쟁 승리는 과소평가하거나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고구려의 대수전쟁(살수대첩)승리, 또는 대당전쟁(안시성 싸움)승리 등의 내용은 아주 간단히 서술한 반면, 백제 멸망 후 왜의 구원군 파견과 실패는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러한 몇 서술 행태를 보더라도, 한국의 국가적 기원이 단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중국의 식민지에서 시작된다는 것, 우리 고대사에 있어서 역사의 상한선을 가능한 한 끌어내리려 했다는 것, 한국문화의 발전은 外문화의 모방과 그 유입에 의한 것이라는 것, 외세의 침략이 강조되고 그 퇴치능력은 크게 평가되지 못했으며 따라서 외세에 대한 사대주의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음을 볼 때, 식민주의사관의 음모와 그 병폐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을 집대상한 결과물이 『조선사』37권이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대종교계열의 민족주의 사가인 박은식이 중국에서 지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국내에 유입되자, 이에 당황한 나머지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조선사』편찬에 갑자기 열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조선사편수회 초기에는 1년 목표의 강의록 『조선사강좌(1923∼24)』를 발간하였고 이때 조선의 식민사학자들이 조선사편수회에 편입되어 활동을 하게 된다. 1922년 12월 4일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총독부훈령 64호)이 확정․발표되었으며, 조선사의 편찬은 총독부의 산하기관인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관장하게 되었으나, 많은 조선인들이 그 정체성에 의문을 품자, 1923년 6월 칙령에 의해 총독 직할의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되었고, 아울러 조선사편찬사업은 중추원에서 분리되었다.

이 작업에 참가한 인물들의 특성은 조선사의 편찬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구로이타(黑板勝美)․이나바(稻葉岩吉)․이마니시(今西龍)이고, 편수회 참가자들은 유형별로 살펴보면 총독부 관리․총독부 직원 및 촉탁으로 근무하였던 한국인․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신진 사학자들이었다.

일제의 한국사관이 총괄되어 있는 『조선사』37권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정책적으로 결정한 사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3․1운동 후 한국인들의 독립 정신을 무마하고 이들을 회유․동화시킬 고차원의 식민지 문화정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조선사』는 그들이 시행한 문화정책의 명분을 살리는 한편, 이로써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흐리게 하여 장기적인 식민지화의 포석을 굳히는 데 이용된 것이다.

일제의 조선 침탈은 역설적으로 우리 국학의 에센스(상고사와 단군에 대한 인식)를 고양시키는 결정적 계기로도 작용한다. 즉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단군과 상고사와 관련된 역사인식이 급속도로 더욱 확산된 것이다. 이러한 열기의 발판에는 1896년에 설립된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한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의 역할 뿐만 아니라, 1906년에 결성된 西友學會(후일 西北學會로 개편)의 활동과 더불어 〈대한매일신보〉라는 매체가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열기는 1909년 『檀君敎佈明書』가 반포되면서 최고조를 맞았다. 단군신앙에 있어서의 단군이라는 존재는 국조이며 시조인 동시에 창교주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우리 神敎의 역사관이 精神史觀的인 요소의 강조와 大陸史觀的인 측면의 부각, 그리고 文化史觀的인 방향이 중시되었던 것도 이러한 측면과 밀접한 것이었다.

『단군교포명서』의 반포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워 준 일대사건으로써, 우리 민족사의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역사 속에 침잠되어 오던 단군신앙의 부활을 통해, 당시 주권을 잃어버린 암울한 민족사회 전반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민족정체성의 와해 속에서 방황하던 수많은 우국지사들과 동포들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國亡이라는 수모를 당하게 된 역사적 원인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함께 道存이라는 정신적 일체감을 통한 치유방안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국학(우리의 文․史․哲․文化) 중흥의 당위적 방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그러나 우리 국학의 철학적 줄기가 될 수 있는 역사적 전통은 우리 위정자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인멸되었으며, 일제 식민지사관의 논리적 도구로 원용된 실증주의사학의 명분을 앞세운 식민사학자들의 논리 앞에, 우리 상고사의 대부분이 민족사에서 소외되었다.

한국사학이 실증적인 면에서의 업적은 두드러지지만 史論的 측면에서의 연구가 부족했다는 평가도 史觀의 不在 혹은 ‘탐구로서의 역사’가 없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실증주의사학은 하나의 학풍을 이룬다기 보다는 역사학 연구의 기초조건으로서의 그 본래의 기능에 한정되어 가고 있음을 상기해 보면, 실증의 과정을 겪지 않는 역사연구가 있을 수 없지만 실증만으로 끝나는 역사연구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Ⅲ.

해방 후 우리 국학의 입지는 더욱 위축되었다.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의 잔재와 이념의 대립, 그리고 대책 없는 서구화의 추종 속에서 국학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물론 국학에 대한 우리 선열들의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해방 후인 1946년 대종교 계열의 국학대학이 설립되고 『國學』이라는 잡지가 발간되기도 했다. 1946년 6월에 국학을 중흥하자는 기치 아래 창간된 이 잡지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學報의 성격을 가졌으나, 안타깝게도 1947년 2월 통권 제3호를 끝으로 폐간했다.

창간호에는 안재홍과 이극로의 축사와 더불어, 정열모의 ‘국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권두언을 실었고, 설의식의 ‘자아의 광복’, 이선근의 ‘당쟁과 조선’이라는 논문도 수록했다. 이밖에도 방종윤의 ‘훈민정음과 훈몽자회와의 비교’, 김경탁의 ‘한글의 모음 위치에 대하여’, 유치진의 희곡 ‘며느리’ 등을 수록했으며, 김태준의 , ‘신문학 건설의 이념’, 임화의 ‘진정한 민족문학의 길’, 박세명의 ‘아동문학의 재인식’과 같은 문화사론들도 나타남을 볼 때, 문․사․철을 중심으로 국학의 활성화를 모색하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0연대에 들어서는 연세대학교에 동방학연구소(후일 국학연구원으로 개칭)가 설립되면서, 정인보․최현배로부터 만들어진 국학의 전통을 이으려 했다. 특히 『東方學誌』를 통한 꾸준한 연구발표는 현대 국학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다. 1970연대에 들어 한양대학교에 국학연구원이 만들어지고 1980연대에 와서는 순수한 민간학술단체인 국학연구소가 출범하였으며 1990연대에 들어서는 안동에 유교를 이념적 토대로 한 한국국학진흥원이 설립되는가 하면, 2007년에는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에 國學科라는 학과까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국학에 대한 의미규정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현재의 국학이 명목상의 국학으로만 이어져왔을 뿐 실질적인 국학이 없었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화나 학문과 관련한 주체적 인프라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특히 국학과 연관된 연구줄기는 끊어진 지 오래다. 외래학이 국학인 양 행세한 지 오래고, 우리 국학의 본모습을 알고 싶다는 외국학자들의 아우성에도 묵언수행을 한 지 오래다. 수입된 학문사조나 방법론의 범람 속에서 우리다운 국학을 만들어 내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외래학으로 포장된 국학을 국학으로 내 세우기도 부끄러웠을 것이다.


Ⅳ.

세계화의 급격한 추세는,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를 바꾸어 놓았고 또 끝없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국가를 넘어선 지역공동체로의 지향은, 경제적 목적만이 아니라 정치적 일체감을 추구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문명충돌이나 문명공존을 들먹이면서 문화적 패권주의를 통한 영향력 확산이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는 상황이다.

근자에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역사문제 또한 심심치 않게 대두되고 있다. 이 역시 넓은 의미의 동북아 분화패권 다툼으로, 중국의 고조선사․고구려사․발해사 찬탈 문제와 일본의 교과서 왜곡․독도영유권 주장․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이 그것이다.

시류의 변화 또한 우리를 더욱 다급하게 하고 있다. 민족이라는 의미는 내일을 위해 사라져야 할 골치덩이로 매도되고 있고, 탈민족주의라는 풍조가 신시대 지식인의 유행인 양 횡행한다. 우리는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탈민족의 이면에 숨겨진 제국적 침략주의의 그림자와, 세계화란 낭만에 가려진 문화적 패권주의의 용트림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공자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중국 대륙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새로운 중화주의를 위한 가치 만들기 작업의 핵심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한무제 시절의 동중서가 유교를 국학의 위상으로 세워 논 이후, 중국 정신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공자사상이다. 1925년 9월에는, 중국의 명문 칭화(淸華)대학에, 중국의 고유문화를 연구하고 中西文化의 교류를 내세운 국학연구원이 설립되기도 하였으나 1929년에 문을 닫았다. 20세기 공산주의의 흥기와 더불어 퇴조되었던 그 사상을, 다시금 중국 정신의 기둥으로 세우려 하는 것이다. 중국의 새로운 비전인 신중화주의의 야망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말한다.

儒學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국학(Sinology)과, 神道를 토대로 한 일본의 국학(Japanology)을 보면서, 우리 국학(Koreanology)의 근간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쉽게 암시받을 수 있다. 중국 국학의 중심인 유교의 질곡에서 긴 세월 허덕이던 시기와, 일본 국학의 뿌리인 신도의 정신적 침략으로 반세기를 유린당할 때에도, 국조 단군의 가치를 앞세워 그 난국을 극복코자 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격동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이나 학문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 문제는, 각 집단(국가나 민족)에 있어 선택이 아닌 필수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단일민족․유구한 역사․반만 년 문화민족 등의 피상적인 구호에 익숙해 있던 우리에게도, 우리는 누구며,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 왔고, 또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때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인 동시에, 문화를 무기로 한 세계화 시대의 생존조건을 갖추는 것이기도 하다.

국학은 그 집단의 정체성을 대신한다. 그것은 그 집단의 性情을 만들어 내는 感性學인 동시에, 상대적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理性學이기도 하다. 국학을 발견치 못하는 집단은 건강한 국가정체성를 가꿀 수 없으며 국학을 내세우지 못하는 집단은 창조적 세계학을 지향할 수 없다. 오히려 국가적 노예근성이 싹틀 수 있고, 남의 집단에 의해 희롱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이 말해 준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문화적 난국에 당면하여 우리는 국학이라는 의미를 또 다시 생각치 않을 수 없다. 국학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 정체성의 논리요 외국에 대한 국력이론이며, 원심론(세계화론)을 위한 구심론(민족이론)임을 먼저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위기 때마다 정신적 단합요소로 작용한 국학은, 우리의 역사를 역사답게 만들어 온 문화사의 정수이며 민족을 민족답게 지켜 준 정신사 고갱이다.

우리는 수천 년을 함께 공유해 온 민족사를 가지고 있으며, 민족적 단일성을 지구상 어느 민족보다도 자부해 온 집단이다. 또한 인류의 과학적 자산으로 평가되는 한글창제를 통해 훌륭한 언어사회로서의 자긍심을 영위해 왔고, 세계 어느 가치와도 互換되는 홍익인간이라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만들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 민족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국가정체적 학문으로 체계화시키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동북아 삼국 중 일본은 이미 오랜 세월 전에 국가적 차원에서 국학의 총체적 의미를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문화적 시스템까지도 완성되었고 학문적 양산 상태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 중국 역시 20세기 초에 치열한 국학 논쟁을 통해, 그 의미를 여과한 지 오래며, 근자에 들어서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 국학에 대한 국가적 합의를 마치고 추진․정립 상태에 들어가 전국적 시스템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 되고 있다.

마음 아픈 것은 한국만이 국가적 차원이나 민간 차원에서, 국학의 개념만이 아니라 그 범위나 실체․속성과 연관된 어떠한 의미 규정도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국학 논리의 정립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즉 일본과 중국의 국학은 이미 국가적으로 합의 된 내부논리의 확산을 통해 외부논리에 대항하고 보편적 논리로서의 지향만을 향해 정진할 수 있으나, 우리는 지금부터 과거(국학의 의미 규정)와 현재(구성원들의 합의) 그리고 미래(보편적 논리로의 지향)와 싸우면서 국학논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중국이나 일본이 왜 국가적 차원에서 국학에 천착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국학을 정신적 사회간접자본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회간접자본(SOC)이란 물질적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기반을 말한다. 그것은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하고, 투입된 자본 회수에 오랜 시간이 걸리며, 그 효과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사회간접자본은 개인이나 사기업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되는 것이다.

국학 역시 마찬가지다. 국학을 정신적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학문적 기반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간접자본의 특징이 다른 나라에서 제공받을 수 없는 서비스 등이 반드시 포함된다는 측면에서 보면, 다른 나라에서 제공받을 수 없는 정신적 재화나 방법론 등에 대해서 국학이 감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그대로 도출된다. 이러한 인식의 기반 위에서는 국학을 민간부문에서 담당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이 국가가 책임을 지고 국학을 이끌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우리의 국학은 공공부문에서 버려진 지 오래고 민간부문에서조차 외면당한 상태다. 이러한 결과로, 우리의 정신적 사회간접자본을 다른 나라의 精神財가 대부분 지배하게 되었다.



국학은 나라의 國是다. 그러나 우리 민족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국학이다. 공공 교육 과정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사회 교양 교육 과정서도 방치된 결과다. 나라가 포기하고 공교육이 외면한 우리의 국학에 대한 논리 회자가 사학이나 사회교육인들 온전할 리가 없다.

이러한 시대의 절박함을 바탕에 두고, 아직도 정착되지 않은 우리 국학의 이론적 체계화를 위한 장을 열어가야 한다. 서구이론에 함몰된 우리의 어문학, 실증주의를 앞세운 식민지사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역사학, 서양철학 일변도에 묻혀진 우리의 철학, 그리고 외래종교에 철저히 유린된 우리의 接化群生 성정을 되살리는 작업, 이것이 바로 국학의 과제다.

이것은 한국인다운 한국인을 만들어 내는 기본적 장치이며, 우리 사회의 혼돈과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또한 분단의 현실을 극복해 갈 수 있는 시대적 당위임은 물론, 곧 다가올 동북아시대에서 우리를 옹글게 지킬 수 있는 정체성임과 동시에, 진정한 세계화 시대에서의 열린 주인이 될 수 있는 디딤돌이 바로 국학이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근대 국학 중흥의 일성을 포효했던 『단군교포명서』반포 100주년이 다가 온다. 우리에게 玄妙之道의 가치를 일깨워준 나철을 위시한 김교헌・서일・윤세복, 우리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앞장섰던 주시경・김두봉・이극로・최현배・이윤재, 유린되는 우리의 역사를 온 몸으로 막으려했던 박은식・신채호・정인보・안재홍 등등의 국학 선열들 앞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고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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