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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08-04-16 오후 1:27:08 조 회 수 4334
제 목 국학사상가를 찾아서(6)_ 육당 최남선
내 용
사학자이자 문인이다. 본관은 동주(東州 : 鐵原)이며 호는 육당(六堂)이다. 그리고 자는 공륙(公六)이며 아명은 창흥(昌興)이다. 관상감 기사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경영했던 아버지 헌규(獻圭)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1년 3살 연상의 현씨(玄氏)와 결혼했다.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少年班長)이 되어 도일(渡日), 도쿄[東京]부립제일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가 1906년 다시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하여 유학생회보인《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여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반발하는 한국인 학생 총동맹휴학으로 중퇴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겸했으며 다음해 잡지《소년》지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소년》은 근대적 종합잡지의 효시이며 후에 이 잡지가 창간된 11월 1일이 잡지의 날로 정해졌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13년 다시《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청춘(靑春)》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 ·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 연구에 전념하여《조선역사통속강화》를 연재했다. 1924년《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이때부터 친일 행각을 자행하였다.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만몽일보(滿蒙日報)》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 되었다. 6·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그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 한국역사를 탐구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일관되게 민족문화의 실체를 밝히려 노력했고, 전생애에 걸친 역사연구를 통해 초기의 계몽주의와 준비론으로 무장한 민족운동가에서 조선주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의 역사연구의 공적은 크게 2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논문《불함문화론》을 통해 우리 문화의 사상적 기반을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수필《백두산근참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런 관점은 우리 문화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발생하여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로 발전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단군론》《아시조선》등을 통해 우리 역사의 시작을 건국신화에서 찾고 정사(正史) 중심의 사관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로써 민족상고사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으며, 한 민족의 근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조선상고사를 보완하기 위해 옛 문헌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조선과 만주 일대의 답사를 통해 고대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 그밖에《조선역사강화》《고사통》등의 한국사 개설서나《살만교차기》《조선불교》등의 종교·민속 연구서에는 조선주의에 입각한 역사연구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특히 그가 발견한 이원(利原)의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摩雲嶺新羅眞興王巡狩碑)는 한국 고대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둘째, 그는 옛 문헌이나 고전문학 작품을 출판하여 널리 보급시키는 문화사업을 실천했다. 일찍이 신문관이라는 인쇄소를 설립하여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우수함을 입증했고, 민족문화의 위대함을 상기시키려 한 이런 노력은 1910년에 설립한 조선광문회의 활동으로 집약된다. 즉 조선광문회에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1911)《열하일기(熱河日記)》(1912)《삼국사기(三國史記)》(1914) 등의 옛 문헌과,《춘향전》《사씨남정기》《심청전》《조웅전》 등의 고전문학 작품을 새롭게 정리하여 펴냈다.

출판을 통한 역사연구와 보급은 8·15해방 후에도 이어져 동명사를 통해《조선독립운동사》《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국민조선역사》 등을 펴냈다. 그의 옛 문헌에 대한 관심은 전통문화의 소생과 여기에 기초하여 새로운 신문화를 수립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된다.
저서에 창작 시조집《백팔번뇌(百八煩惱)》, 시조집《시조유취(時調類聚)》, 역사서《단군론(檀君論)》《조선역사》《삼국유사해제》《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등 다수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배달민족의 역사의식과 사상가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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