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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08-04-16 오후 1:26:16 조 회 수 1675
제 목 국학사상가를 찾아서(5)_ 예관 신규식
내 용
자는 공집(公執)이며, 호는 예관(睨觀)·일민(一民), 때로는 아목루실(兒目淚室)이라는 필명을 사용했고, 청주(淸州)에서 출생하였다. 관립 한어학교(漢語學校)와 육군무관학교를 나와 육군 부위(副尉)로 진급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죽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실패, 오른쪽 눈만 실명하였다. 그래서 예관이라는 호를 썼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며,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활동하다가 국권피탈의 소식에 분개, 다시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나철(羅喆)에 의해 구조되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 손문(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가담하였다. 신규식은 목숨의 은인인 홍암 나철과 인연이 되어 대종교 중광과 함께 가장 먼저 입교하여 죽을 때까지 대종교를 독신한 인물이다. 1910년 스스로 해외 시교(施敎)를 자임하여 상해로 떠나는데, 당시 중국관내의 한국인 대부분이 동삼성 일대(東三省 一帶)에 모여 활동했으므로 상해일대에서 한국인 활동은 전무한 상태였다.
망국의 한을 품고 망명한 그는 나라가 망한 원인을, 단군 종교와 민족사를 망각한데 원인이 있다고 탄식을 했다. 또한 노예로 전락한 현실 속에서도 자주성을 잃어버린 채, 우리의 모습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신규식은 이러한 질곡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길로 단연 대종교 부흥을 내세운 인물이다. 엄격히 말하면 그는 혁명가이며 종교가였다. 조국을 광복하는 일을 하나의 공작(工作)이나 포부로만 생각지 않고 일종의 종교요 신앙으로 보았던 것이다. 까닭에 그는 한민족이 부흥하려면 반드시 대종교가 발전해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대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국민의 민족정신이 그만큼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신규식은 상해로 건너온 후 대종교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매주 교우들과 경배를 올렸는데, 당시 활동했던 대종교 중심 인물들로서는 조완구·김두봉·백순·박찬익·정신 등의 많은 사람들이 활동했다. 그리고 매년 어천절(御天節)과 개천절(開天節), 그리고 국치기념일(國恥紀念日)에는 반드시 상해에 있는 교포들을 모두 모아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써 중국 당국과 처음 접촉을 시도한 사람도 신규식으로, 그는 중국에 건너 온 후 송교인(宋敎仁)과 친분을 시작으로 황극강(黃克强)·진기미(陳其美) 등 중국혁명동지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이름도 신정(申檉)으로 개명하고 중국동맹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1911년 10월 진기미를 따라 무창의거(武昌義擧)에 참가하면서 한국 독립지사로서는 중국 신해혁명에 투신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또한 신규식은 중국혁명지사들의 문학단체인 남사(南社)에 가입함을 인연으로 하여 환구중국학생회에도 참여함으로써, 인재양성을 위한 조직적 협조를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신규식은 1912년 대종교계 인물들을 중심으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상해독립운동의 중심기구로 만들었다. 박은식이 총재를 맡고 신규식이 본부의 이사장직을 맡은 동제사는 그 구성원의 핵심인물들이 시민적 민족주의사상·개량적 사회주의사상·대동사상(大同思想)을 정치사상으로 하며 국혼(國魂)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대종교의 국교적 신앙을 공통으로 가졌던 점으로 보아 그들에 의해 경영되는 동제사의 기본이념과 독립운동방략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신규식은 진기미 등과 더불어 한국과 중국의 혁명지사들의 뜻을 교감할 수 있는 모임으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조직에 앞장섬으로써, 후일 상해임시정부 조직의 발판을 마련함과 함께 대중국(對中國) 정치·외교의 중요한 토대를 구축했다. 사실상 이 단체의 중국 측 주요 인사들이 후일 손문(孫文) 광동정부의 주요직을 많이 맡았고 국민당정부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므로, 상해임시정부의 수립과정에서나 수립 후의 정치·외교항쟁의 과정에서 중국혁명정부와의 긴밀한 유대가 가능했고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계획이 좀 더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5년 신한혁명단이 결성되면서다. 신한혁명단 또한 신규식·박은식·이상설·유동열 등 대종교의 중심인물들이 주동이 되어 만든 것으로 당시의 세계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망명정부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이후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신규식은 1915년 박은식(朴殷植)과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 잡지《진단(震檀)》을 발간하여 민족의식 고양을 통한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議政院) 부의장에 선출, 법무총장을 거쳐 1921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었다. 이 해 광동[廣東]의 신생 중화민국 정부에 대사로 부임,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고 중국의 북벌서사식(北伐誓詞式)에도 참가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다. 저서에《한국혼(韓國魂)》《아목루(兒目淚)》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배달민족의 역사의식과 사상가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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