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관리자 email gukhak@gukhak.org
작 성 일 2012-11-23 16:44:37 조 회 수 1022
제 목 국학의 일반적 속성
내 용

 

國學一般的 屬性

 

1. 國學論理性

 

우리는 국학이라 하면 국가정체성(國家正體性)을 드러내는 학문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칭에 대한 거부감과 아울러 국수주의적이며 비논리적 학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제군국주의의 논리적 도구로 이용된 일본 국학에 대한 경계가 무엇보다 크다. 더불어 해방 이후 서구중심의 가치 정착과 군사정권에서의 오용(誤用)에도 그 원인이 있다. 그리고 민족구성원 내의 이해관계로 인한 경계 또한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속성(屬性attribute)이란 정보(情報)가 가진 가장 작은 논리적 단위다. 또한 그 자체만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단독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국학의 일반적 속성이란, 국학이론을 효율적으로 얽어내기 위한 논리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국학의 속성(논리성)을 파악함에 있어, 학적(學的) 속성과 더불어, 그 내적 속성(특수적민족적 속성)과 외적 속성(보편적인류적 속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학적 속성은 국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는 전제적 속성이다. 또한 내적 속성만 강조된다면 배타적 학문으로 전락할 수 있고 외적 속성만을 지향한다면 이미 국학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국학은 우리 학문의 근본이요 출발인 동시에, 세계학문으로 나가기 위한 토대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먼저 그 동안 우리 국학에 대한 연구 성향은 국학의 속성을 분명하게 개념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즉 우리 것에 대한 기준이 없이 포괄적이고 원칙적인 개념 설정과 학문의 제업적에 대한 나열형식의 탐구, 그리고 역사적 상한에 대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학이 국학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속성은 학적 속성인 통학적(通學的) 논리성과 함께, 내적 속성인 사상적 정체성공간적 차별성’, 아울러 우리 민족의 형성으로부터 민족사를 관통할 수 있는 시간적 연속성을 새롭게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외적 속성이라 할 보편적 개방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通學的 論理性

 

고대엔 학문의 영역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신학이나 철학 속에 대부분의 학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학문 간의 소통이 쉽게 이루어지는 시대였다. 특히 인문학의 토대인 문철은 하나의 학문 범주에서 인식되고 호흡했다. 그러나 지금은 효율성과 전문성이라는 명분으로 학문이 세분화되었다. 학문 간의 벽이 높아지고 타영역의 학자들은 이해하기도 힘든 전문용어가 수두룩하다. 학제 간의 연구는커녕 이해하기도 힘들어졌다. “지식을 얻으려면 소통해야 하고 소통해야 지식이 원대하게 확장될 수 있는데 우리는 학문과 시대, 사람, 학문 사이의 삼통(三通)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새삼 와 닿는다.

본시 인문은 분과학문체제로서의 ()’으로 정립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인문은 분과학문체제의 외부에 존재한다. 설령 인문학에서 에 주목하지 않고 사회과학의 대립항으로서, 개성이나 기술적 성격에 주목한다고 하여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중국 국학의 중심을 이루는 경서(經書)의 통학적 성격을 보면 이해가 쉽다. , 범위와 수량의 차이는 있지만, 경서는 모두 상고 이래의 학술사상과 문물제도에 관한 자료와 인륜·정사·사회질서 등에 관한 준칙과 도리 등이 담겨 있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통합적인 앎을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고전도 예외는 아니다. 유교적 가치 위에 만들어진 삼국사기, 불교적 정신 속에 잉태된 삼국유사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 두 서적은 단순히 역사서가 아닌 유교와 불교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는 서적이다. 또한 삼국사기』「열전에 나타나는 전기적 요소는 문학적 장치를 떠나서 이해할 수 없고, 삼국유사의 서술 양식인 인물 위주의 치밀한 구성과 품격 높은 문학성은 이미 주지하는 바다. 즉 유교서이며 역사서이고 문학서라 할 수 있는 것이 삼국사기이고, 불교서이며 역사서이고 문학서라 할 수 있는 책이 삼국유사. 마찬가지로 규원사화역시 신교서이며 역사서이고 문학서라 해도 시비거리가 안된다.

중국이 중국 국학의 모전(母典)으로 삼고 있는 육경(六經)이나, 일본이 그들 국학의 텍스트로 여기는 고사기』․『일본서기』․『만엽집등의 성격도, 그 집단의 역사와 철학 그리고 문학을 토대로 않고서는 이해 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의 국학자들이 문철에 두루 통했던 이유가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국학(한국학)이 조선문화의 총체성을 탐구하기 위해 여러 분과학문의 연구자들이 통합적 학술운동으로서 그 성과를 축적해 왔다는 견해도, 이러한 속성과 연결된다. 또한 나철박은식신채호김두봉안재홍정인보 등의 국학자들이 문철에 회통했던 배경도 위와 같은 통학적 논리성을 구현한 것이다.

중국이 근자에 중국국학의 대가들을 모아 국학은 통학(通學)이다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개최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중국인민대학 국학원 원장인 지바오청(紀宝成)을 위시하여, 탕이졔(汤一介:北京大学哲学系教授)짱카이지(张岂之:清华大学历史系教授)펑치융(冯其庸:中国人民大学国学院名誉院长)다이이(戴逸:历史学院教授)팡리티엔(方立天:哲学院教授) 등등의, 중국 문철의 석학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기보성은 철을 나누어 인식하는 방법은, 20세기 초 서구의 학제를 들여온 것으로, 이것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의 중국 교육과 학문적 수요에 적응하지 못하므로, 모든 학과의 서구화를 초래하여 국학의 지위를 부여하기가 매우 난처해졌다.”고 밝힌 뒤, 국학은 종합학문의 하나로 문철을 합해야 함을 강조했다. 현재 문철로 나누어져 있는 분석적 학문을 모두 포함하는 통학적 내용의 국학이 아니고서는 상호 효율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 교육제도와 학위제도를 정비하고 국학 인재를 배양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특히 북경대학교 철학계 탕이졔 교수는 이러한 국학의 교육적 제도화와 학위 설치의 중요성필요성을 긍정하면서, 이미 이러한 분위기는 성숙되었다고 말했다. 청화대학 역사계 짱카이지 교수도 이에 동조했고,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다이이 교수는 국학은 통학(国学是通学)”이라고 강조하면서철의 통합적 운용을 적극 주장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동양 경전의 모든 것이 문학이요 철학이며 역사다. 따라서 자료를 해독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도 문철을 떼어 놓을 수 없다. 이제 그러한 학문이 다시 요구된다. 국학이 바로 그것이다.

 

3. 思想的 正體性

 

우리 국학의 정체성은 고신교(古神敎)의 붕괴와 더불어 흐려졌다. 위정자들에 의해 선택된 불교와 유교의 전래 보급은, 우리 고신교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것이다. 특히 정치적 통치이론으로서의 유교의 정착으로, 고신교는 반체제적 가치로까지 간주되었다.

신라 진덕여왕 시기 당시 실권자는 김춘추였다. 그가 당나라의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고 돌아와 국학의 설치를 건의한다. 그리고 신라 신문왕 2(682)에 설치한 통일신라시대의 교육기관으로서의 국학은 중국의 정체성을 통치이론으로 제도화시키는데 기여를 했다. 이러한 국학제도는 고려와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계승된다. 고려에서는 국자감(國子監)성균감(成均監)성균관(成均館)국학 등으로 명칭이 바뀌다가 조선에 와서 성균관으로 통일되었다.

더욱이 고려 광종 9(958) 쌍기(雙冀)의 건의로 유교적 시()()()()으로 치러진 최초의 과거제도는, 우리의 정체성을 중국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기폭제가 된다. 본시 중국의 유교적 질서를 통한 관리 선발제도인 과거제도는 수나라 문제(文帝)가 처음으로 시행하여 청나라 광서제(光緖帝)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도 1300년간 이 과거제도를 지속시켰다.

고려 성종 원년(982) 최승로가 올린 시무(時務) 28조도 고신교의 정체성에 위축과 무관치 않다. 이 시무 28조는 선불융합적 성향의 고려 문화를 유교를 중심으로 한 유불 중심의 고려문화로 선회케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무 28조는 현재 22개 조항만 남아 있다. 그 중 13조와 21조가 토착신앙에 대한 규제 혹은 제한과 관련된 조항이다.

13조에 연등과 팔관회 행사의 축소에 대한 내용과 21조에 나타나는 음사(淫祀)에 대한 제한 등이 그것이다. 즉 최승로는 우리 고유의 신앙의례와 가치를 중국 중심의 유교적 제례의식과 가치에 의해 규제하고자 했다. 그는 백성들의 과도한 경제적 부담을 현실적 명분으로, 중국 의례의 예법과 풍속에 어긋난다 하여 연등과 팔관회의 행사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가 유교적 질서 위에서 새로운 의례질서를 다잡고자 했음은, 시무 제 20조에서 불교의 행사를 유교적 예기(禮記)에 정리된 월령(月令) 규범에 의해 제한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책을 대부분 수용하여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를 정식으로 폐지했으며, 신교적 종교의례 또한 불교적 의례로 대신하고자 했다. 다음의 기록이 이를 암시한다.

 

八關會雜技들이 不敬하고 煩瑣하다는 이유로 이를 전부 폐지하고 法王寺에 가 焚香을 하고 舊庭으로 돌아와 君臣들의 朝賀를 받았다.”

 

나아가 성종 2(983) 정월에는 원구단(圓丘壇) 기곡제(祈穀祭)와 적전(籍田) 친경의례(親耕儀禮)가 시행되면서 유교사상에 입각한 오례체제(五禮體制)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종의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신교탄압정책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성종의 이러한 정책에 대해 많은 관리들은, 국인(國人)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발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성종 12(993) 거란 침입 당시, 다음과 같은 이지백(李知白)의 상소라 할 수 있다.

 

前民官御事 李知白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聖祖가 창업하여 王統을 드리운 이후 금일에 이르러 한 사람의 충신도 없어서 갑자기 토지를 가벼이 적국에 주려고 하니, 통탄하지 않겠습니까?(中略)청컨대 금은보화로써 소손녕에게 뇌물을 주어 그 의사를 살피소서. 또한 가벼이 토지를 떼어 적국에 버리려고 하니, 어찌 先王燃燈八關仙郞 등의 일을 다시 행하고 다른 나라의 異法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국가를 보호하고 태평을 이루는 것과 같겠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먼저 神明에게 고한 연후에 싸울 것과 화친할 것을 聖上께서 결정하십시오하니, 성종이 그렇게 하였다.”

 

이 내용은 고려시대 신교의 흥망을 추리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록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상소 내용이 유교적중국적(事大主義的) 성향에 대한 저항을, 신교적(民族主義的) 입장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먼저 한 사람의 충신도 없다라는 지적을 통해 국토수호의 의지마저 팽개쳐 버린 관료들에 대한 지탄은, 당대의 국가의식이 얼마만큼 나약해졌는가를 드러내 주는 대표적 한탄이다. 또한 외세의 침입이나 중국풍에 대한 대항정신으로 연등팔관선랑의 복원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사상적 의미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즉 연등팔관선랑의 정신은 자주적민족적 성향의 사표로서 신교의 정체성임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후일 팔관회가 복설된 뒤 공식적으로 중단된 예는 네 번 있었다. 모두 원(몽고)의 간섭기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것은 팔관회의 자주적민족적 성격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반증이다. 고려 정체성의 상징이라 할 팔관회의 위상이 몽고의 적극적 간섭에 의해 추락해 갔음을 말하는 것이다. 한말(韓末) 단군신앙(팔관)의 부활체인 대종교단에서, 몽고 침입에 의한 팔관행사의 단절을 교맥(敎脈)의 단절로 이해하고 있음도 이와 무관치 않다. 즉 단군신앙 중흥에 앞장섰던 홍암 나철의 다음 기록에서도 그러한 의식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蒙古高麗 侵虐 異族嫌疑로다. / 書籍文記 다 뺏고 敎門祭典 廢絶

 

안으론 仁智를 닦으며 밖으로는 信誼로 사귀고, 진실한 정성은 八關의 재계가 있으며, 풍속은 또한 九誓의 예를 전하였고, 三法을 힘써 행하여 먼저 욕심물결의 가라앉음을 도모하며, 한 뜻을 확실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 문이 열림을 얻게 하라

 

나철은 몽고의 침략으로 인해 교문제전(敎門祭典) , 팔관이 단절된 것으로 이해했고, 팔관의 재계가 우리 민족 진실한 정성의 예()임을 말하고 있다. 묘청이 팔관과 통하는 팔성의 힘으로 금나라에 대해 자주성을 나타내고자 했고, 이지백 역시 팔관의 정신으로 거란에 대해 맞서라 했다. 또한 대몽항쟁의 정신적 배경에 팔관의 힘이 뒷받침되었으며 일제시대에 팔관의 부활체라 할 대종교가 총체적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것은, 팔관의 정신에 담겨있는 자주적민족적 의취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국학의 정체성을 논함에 있어 다시 부딪히는 부분이 민족주의 논란이다. 즉 한국에서의 한국학이 민족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한데 비해,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구미학계의 한국학 성과가 오히려 더 괄목할 만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곧잘 거론되는 열린민족주의시각에서 한국학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제시대라는 엄중한 민족위기의 상황에서의 학문적 대응이 조선학을 낳았다는 역사적 맥락을 중시하면서도, 전지구화가 진행되는 현재의 상황에 맞춰 한국학을 재구성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 근대 우리 국학의 성립을 말함에 있어 우리 나름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음의 견해를 눈여겨보자.

 

한국학의 정체성을 논함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요소는 세 가지다. 첫째, 한국학은 주체성과 실천성을 표방한 조선학운동이 저항적 민족주의에 근거하였듯이 민족주의와 연관이 깊다. 둘째, 한국학은 조선 문화의 총체성을 탐구하기 위해 여러 분과학문의 연구자들이 통합적 학술운동으로서, 그 성과를 축적해 왔다. 셋째, 한국학은 서구에서 기원한 학술제도를 변용한 일본의 과학적 학술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자기보호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일종의 생존전략으로 출발하였다. 따라서 태생적으로 (소극적이기는 하나) 국체적 경쟁의 시야를 담은 것이다.”

 

물론 우리 문화의 독자성 유지를 위한 노력 역시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은 중국의 영향을 심대하게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그것을 변용재창조의 과정을 거쳐 한국문화의 독자적 개성을 확립하여 온 측면을 잃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일본화 된 서양문화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지속된 것은 한국지성사가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동양학계에서는 한국학의 독자성을 인정하는데 인색하다. 오히려 우리 한국학자들은 이러한 인식의 오류를 수정하고 그 전환의 길을 동아시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동아시아에서 한국학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한국학의 세계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체제하에서도 국학의 모태는 위기를 맞았다. 우리의 독자적 문화와 영역의 존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식민주의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통과 관습을 조사하거나, 조선을 동화의 대상으로 보아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였다. 그들의 조선문화 인식은 중국문화의 아류, 또는 일본과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규정하여 그 독자성을 무시하였다. 식민지시대 일본의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해외 한국학이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따라서 1930년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조선학운동은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드러내려는 몸부림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정체성 없는 국학은 존립할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국학은 사상적 정체성을 내포해야 한다. 사상적 정체성이란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성에 근접한 가치로써, 타집단(타국가타민족)과 구별되는 철학적 사유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한국 불교가 인도철학의 정체성 위에서 자리 잡은 사상체계라면 한국 유교는 중국철학의 정체성 위에서 체계화된 사유가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불교나 유교는 한국사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국철학으로는 간주하기 힘들다. 철학은 학문 이전의 학문이요 사상 이전의 사상이라는 말을 생각해 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유불과는 다른 우리의 정체성이 있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진흥왕조에,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름하여 풍류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라는 말이 그것이다. 풍류란 배달도신교(선도)’를 말하는 것이다.

근대 국학의 정체성을 세운 나철은 교문을 세우니 이름하여 대종이요, 현묘한 도의 근원은 삼일이라(乃設敎門曰大倧 玄妙之原道三一)”고 밝혔다. 현묘지도의 근원이 신교의 삼일철학에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순교 당시 제자 엄주천에게 남긴 유서에서도 신라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를 간곡하게 일깨우는데, 이것은 최치원의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에 나타나는 신교가 우리의 정체성임을 각인시키려는 나철의 의지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최치원의 현묘지도(풍류도)는 한국 고대종교의 결정체로서, 국가적민족적영토적문화적 통합에 의해서 형성된 한국 고대의 가장 뚜렷하고 독창적인 종교요 사상이며 문화였기 때문이다.

일본 동경대학교 대학원 철학분야 수사과정(修士科程) 및 박사과정(博士課程) 교과과정을 보면, 일본유학사(日本儒學史)가 중국철학 속에, 불교사상사지나불교사(支那佛敎史)일본불교사가 인도철학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불교나 유교의 정체성 또한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확인해 주는 것이다. 특히 학문의 정체성 문제가 세계화 시대의 학문교류과정에서는 더욱 중요시될 것으로 판단된다. 불교를 가장 잘 성숙시킨 중국이 불교가 아닌 유교를 국학의 중심으로 삼은 것이나, 불교와 유교가 다양한 문화로 자리 잡은 일본이 신도를 국학의 모태로 세우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우리 스스로 숙고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학문은 지금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특히 국학은 국내외적으로 파국 상황이다. 서구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한국민족주의와의 거리를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즉 한국 학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민족주의적 연구 자세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러한 민족주의적 연구로부터 거리를 두는 경향이 주류를 이룬다. 더욱이 미국의 한국학은 미국 대학에서 주변부에 속하는 동아시아학과 안에서도 또 주변부, 이중으로 주변화된 위치에 처해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학이 흔히 대학에서의 연구에 활기를 불어 넣는 보다 폭 넓은 지적 경향들 및 질문들과 동떨어져무관련성(irrelevance)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총체적 정체성의 위기, 그것의 우리 국학의 모습이다.

 

4. 空間的 差別性

 

우리 국학은 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민족(nation)을 분석 단위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현재 국학(한국학)은 내적 모순에 직면해 있다. 한편으로는 그 학문적 작업을 제한하는 국가민족이란 틀에 대해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민족에 기반을 둔 한국학이라는 분야를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긴장 속에 처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국학의 공간적 차별성을 모호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모순으로부터의 탈출구로 제시되는 것이 지구지역학(Glocalism)으로, 한국학에 재구성 구상이다. 그것은 하나의 시각이자 방법인 동시에 연구영역을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글로컬리즘은 경계해야 할 구호다. 글로컬리즘이 세계통합주의와 지역중심주의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로 느껴지며, 결국 우리 내부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화 추종 파벌(?)들에게 흡수될 이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지구지역학을 말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한편으로 서구 중심의 보편주의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란 공간성을 중시하면서도 특수성에 매몰되지 않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학문의 길을 한국학이 추구할 수 있으리라 가능성 때문이다.공간적 차별성으로서의 국학의 속성이 중요한 점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한국학의 세계화라는 구호에 집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국학의 장소성을 강조해 보자는 것이다. 즉 장소를 갖는, 그러나 특수한 것에 매어 있지 않은 국학을 추구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공간적 차별성이란 중국일본미국 등의 다른 지역 학문과 구별됨을 말하는 것으로, 지역적 차별성보다는 학문적 대상 혹은 방법의 차별성을 일컫고자 한다.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나 외국인이 우리 국학의 의미에 부합하는 학문적 대상을 연구하는 경우는 이 속성에 포함되는 것이요,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나 외국인이라도 우리 국학의 의미에 벗어나는 학문적 대상을 연구할 때에는 이 속성에서 제외된다고 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 민족 개념이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다인종이 어울리는 지구촌사회가 가속화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다양화된 우리 사회의 민족 개념도 모호해졌다.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상호교류가 확대되면서 민족경제민족사업민족이해민족관계 등, ‘민족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다양한 실천적 영역들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남북 간의 민족에 대한 개념적 편차가 매우 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심지어 남쪽 내부에서도 정치세력 간에 민족에 대한 이해가 매우 다르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해외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코리안의 민족이해가 결코 동질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점차 명료해졌다. 일본의 재일조선인들도 민족을 매우 강조하지만 결코 남북한의 그것과 같지 않으며, 그들 사회 내부에서조차 민족에 대한 지향과 의미 부여가 다른 것이 확인되었고, 중국의 조선족들이 말하는 민족정체성은 다민족국가로서의 중국인 정체성과 함께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어서, 일본이나 미국의 동포와 함께 범주화하기 어려운 것임도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지역적 차별성보다는 학문적 대상 혹은 방법의 차별성을 일컫고자 함도 이러한 이유다.

우리는 국경은 있으나 국경을 인정 할 수 없는 지구적 지방주의시대(Glocalism)’를 맞고 있다. 즉 세계화라는 구호가 결코 피할 수 없는 현 단계 인류 문명의 대세라면, 우리 정체성의 운명은 세계화 속에 한국화를 얼마나 더 포함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이것은 학문의 세계화라는 구호 속에 전제 되어야 할 국학의 공간적 차별성의 의미와도 관련된다.

즉 철학하면 당연히 서양철학을 생각하는 우리 지식인들의 타성을 성찰케 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한 안목과 해석을 외면하고 서양의 방법론(그것도 랑케사관만을 중시하는)에만 반세기 이상을 허비한 우리 역사학계에도 경종을 줄 수 있다. 더욱이 전문가들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수많은 외래사조에 의해 유린당한 우리 어문학의 현실을 청산하는 데도 중요한 방향타가 될 것이다. 우리를 우리의 기준으로 먼저 파악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세계적 기준이나 보편적 준거 역시 파악할 수 없음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외래의 방법론을 무조건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동안 국학연구의 대부분을 외래의 방법론에 맡겨온 까닭에 창조적 시각을 잃어버린 우리의 안목을 균형적으로 교정해 가자는 의도일 뿐이며, 뼈를 깎는 성찰이 없이는 우리 중심의 학문을 개척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공간적 차별성에 의한 국학적 속성이 필요한 이유다.

5. 時間的 連續性

 

국학은 시간적 연속성을 소중히 해야 한다. 시간적 연속성이란 우리의 역사 속에 단절되지 않고 흘러온 우리 것에 대한 통시적 가치라고 규정짓고 싶다. 특히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가치가 유입되어 습합 또는 혼재되어 온 우리의 경험에서는 이러한 연속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수많은 건국이 한 번의 조국(肇國)으로 관통하는 당위성을 제시해 줌은 물론, 다양한 외래사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융회와 통섭을 가능케 한 사상소(思想素)의 연면한 흐름을 긍정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가령 불교로 윤색된 듯한 신라의 화랑도가 우리 고유의 풍류도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려 불교사회에서 행해진 팔관의례 역시 고구려 동맹이나 신라 토속신앙의 계승의식이 나타나고 더 근본적으로는 단군 시대의 소도정신까지 소급되어 올라간다. 또한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의 제례 속에도 전래의 신교적 정신의 맥은 끊이지 않았다. 근대 국학의 주요 인물로 꼽히는 신채호나 박은식도 우리 국학의 줄기를 상고 시대로부터 연면히 흘러왔음을 주장하는데, 여기서도 국학의 시간적 연속성에 대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근대문학이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전통단절론에 토대를 둔다면, 우리의 근대문학은 서양 혹은 일본의 영향 속에 만들어진 모방문학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전통계승론에 근거한다면 우리의 근대문학이 조선조 실학문학을 계승한 발전적 문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일제 질곡의 시대를 일제식민지시대로 보느냐 임시정부시대로 보느냐도 이러한 시간적 연속성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특히 시간적 연속성은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과도 관련이 깊다. 한민족사에 연면히 흐르는 내재적 속성을 전제로 융회와 변증적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일국사를 정체적(停滯的)타율적으로 보지 않고, 국내적 계기의 법칙적 전개에 따라 발전해온 것으로 파악하려는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내재적 발전론이 너무 자기중심적인 관점이라고 공박한다. 가령 한국의 성공적인 경제성장이나 민주화, 문화적 동력을 설명하려는 사회과학자들 역시 지나치게 내재적 동력만을 강조하고 식민지 변수나 국제적 변수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한국학계의 시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판이 본격화 된 것은 미국의 대표적 한국 역사 연구자인 제임스 팔레James B Palais가 제기한 내재적 발전론 비판이었다. 신기욱과 마이클 로빈슨이 편집하고 미국의 중요한 한국학 연구자들이 다수 참여한 책자인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은 이런 해외의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편집자들은 한국 20세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nationalistic'하다고 평가한 후, ‘nationalism' 이외에도 'modernism'‘colonialism'을 별도의 축으로 하여 식민지시대사를 재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내재적 발전의 관점을 좀더 넓게 보면, 첫째, 민족 또는 국가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내적적인 계기에 의한 자기발전의 과정을 통해 실현되며, 둘째, 개별 민족사국가사의 전개과정에는 세계사의 보편적인 추세가 반영된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민족과 관련한 논의의 다양한 맥락과 복합적 함의를 무시한 채 민족과 탈민족, 또는 민족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평면적인 대립구도로 사고하는 것은 학문적 발전을 위해서나 실천적인 유용성을 위해서나 바람직하지 못하다. 민족탈민족의 논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기보다 양자가 지닌 각각의 역사적담론적 의미를 밝혀내는 종합적인 지적 과제다.”라는 의견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근대 국학의 선각인 나철이, 단군신앙을 일으킴에 있어 창교가 아닌 중광(重光)을 택한 것과 다가올 문명시대에 중창(重創)의 도약을 기약한 이유도 자명해진다. 즉 우리 민족사에 흐르는 현묘지도와 팔관이라는 신교적 내재성을 긍정함과 동시에, 그 가치가 내일로 연결되는 현재진행형에 있음을 확인시킨 것이다.

 

6. 普遍的 開放性

국학의 보편적 개방성또한 외면할 수 없는 문제다. 보편적 개방성이란, 국학의 집단(국가 혹은 민족)적 속성을 넘어, 타집단 학문과의 조화지양을 통해 상생의 논리를 추구해 가는 상대주의적 가치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다문화다종교 사회가 보편화되는 추세에서, 국학의 국수주의적 이미지를 극복하고 세계화 시대의 국학으로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근자에 추진 중인 중국의 국학이 개방성을 중요한 속성으로 내걸고 있다는 점도 이것과 무관치 않다. 중국 국학의 거두였던 지셴린(季羨林), 다인종으로 구성된 중국의 현실을 겨냥한 듯한 국학 견해도 주목된다. 그는 중국 국학을, 한학(漢學)이나 유학(儒學)의 협의적 의미가 아니라, 전중국의 56개 민족문화가 축적된 대국학(大國學)이라는 개념을 내세운 것이다. 물론 지셴린의 대국학 제창에는 복선이 있다. 즉 다민족 중국사회를 통합할 대중화주의 논리로서의 대국학일 것이다. 목하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다양한 문화정책들이 이를 반증한다.

아무튼 우리도 일종의 끊임없는 변증적 교환을 통해 우리의 특수한 것을 보편화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보편적인 것을 특수화할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종합에 다가갈 수 있는 슬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민족 자체에 대한 논의를 소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만의 입장이 아니다. 민족 자체가 지적 논쟁의 대상으로 된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한국사회의 발전과 개방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한국에 대한 연구가 자국학(自國學)의 수준을 뛰어 넘어 보편적인 연구주제로 다루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지구지역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첫째로, 지구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한국인 한, 한국이란 공간성을 강조하다 보면 특수성에 매몰될 위험성은 남아 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특수성 또는 구체성을 보편적으로 독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서구이론에 매몰당할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지구지역학의 실현 가능성은 희박해 진다. 서구이론에서 벗어나려면 궁극적으로 그 기반인 유럽적 보편주의를 극복하고 그에 기반을 둔 지식구조의 이념과 제도를 재구성할 가능성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국학의 발전과 세계화를 위한 대책은 서양 한국학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양 한국학이 지닌 지역학적 성격오리엔탈리즘적 세계관동아시아학의 말단이라는 위상에서 비롯된 한국학의 위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까닭에 윌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의 보편적 보편주의라는 주장에 귀기우릴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주는 것이 서구가 아니고 받는 것이 나머지 세계가 아닌 세계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우리 모두가 주고받는 만남의 장소라는 외침이 그것이다.

본시 우리 민족의 성정은 개방적이요 이타적이다. 우리의 건국이념이 홍익민족이 아닌 홍익인간으로 출발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또한 이것은 우리 국학의 정체성 속에 인류보편적 속성이 배태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국학의 미래지향성의 좌표도 여기에 있다.

일본의 국학이 국수적이요 폐쇄적이라는 한계는 이미 경험한 바다. 그들의 군국주의적인 과거와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지금의 욕심 뒤에도 일본의 국학이 상존해 있다. 중국 국학의 중심인 유교 역시, 중국인에 의해 그 폐쇄적 한계가 이미 지적된 가치다. 일찍이 류스페이(劉師培)가 지적한 유가(儒家)의 네 가지 단점 중에서, 상호 비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고 이설(異說)을 배척한다는 지적에서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정서는 현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중화사관의 욕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은 우리 국학이 중국이나 일본의 국학보다는 개방성에서 앞선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미래의 국학 경쟁(동북아시대의 논리상생적 세계화의 논리)에서 절대적 우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경험을 보더라도, 불교나 도교 그리고 유교의 전래과정에서 나타난 우리 고유의 정신적 속성은 배타와 대립이 아닌 포용과 조화의 가치로 나타났다. 일찍이 신라의 석학 최치원이, 우리 국학의 정체성을 풍류도로 규정하고, 그 정신의 운용이 현묘지도로 나타나며, 그 속에 숨어있는 조화적 속성을 접화군생의 가치로 단정한 것도 이것을 뒷받침한다.

 

      up : 국학의 학문으로서의 위상
      down : 국학의 내용적 실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