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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일 2013-06-19 15:27:05 조 회 수 1101
제 목 홍산문화와 우리민족 종교문화의 원류
내 용

 

(연구방향 탐색) 홍산문화와 우리민족 종교문화의 원류

임찬경(국학연구소 연구원)

 

김용규의 책인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습니다.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지요.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갑니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규범과 관습 속으로, 학문 안으로, 문학 속으로, 미술과 건축 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부단히 파고들어가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룹니다. 서양문명이 특히 그렇지요. 따라서 내 생각에는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를, 그 세계가 오랫동안 숭배해온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비록 흔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썩 좋은 방법입니다. 이 방법이 서양문명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바로 보고 그 해결책을 마련할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이 책의 주된 목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바르고 정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배관도, 급수펌프도, 정수장도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계화의 거센 물결을 타고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보편화되고 있는 서양문명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떠맡긴 심각한 문제들-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에 대한 해법도 찾기를 기대하지요.”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서양문명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려면 기독교의 신을 이해하는 것은 꼭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방법으로 하나의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서양문명과 비교되는 동양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문명에 대한 심층적 파악은 어떤 것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민족 문화에 대한 심층적 파악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서양문명의 지배자 혹은 母胎로 얘기되는 기독교는 그 발전이 지극히 정치적이며 인위적인 것입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승인한 것에 대해, 역사가들은 당시 서로마 패권을 두고 혈육끼리도 죽고 죽이던 내전상황 속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서로마의 주인이 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으로부터 인정받은 권력'이라는 주장을 할 필요가 있었고, 기독교에 빠져있는 그의 어머니인 헬레나의 영향도 받았으며, 총체적으로 보면 정치적으로 기독교를 이용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313년 이후 1700년 동안 기독교의 신은 서양사회에서 압도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숭배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서양의 문명과 문화가 기독교를 모태로 하고 있는 듯이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동양문화, 우리민족문화의 母胎나 源流는 무엇일까요? 사실 서양문명의 母胎나 源流를 찾는 작업이 오히려 활발한 것에 비하면, 우리민족 문화의 母胎나 源流에 대한 접근 노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부족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수도꼭지만을 들여와 물이 전혀 나오지 않자, 다시 배관과 급수펌프 및 정수장을 들여와 물을 나오게 만들고, 아예 서양의 물조차 들여와 그 물을 먹으며 또한 그 물에 젖어서 우리의 고유가치를 점차 잃고 있는 현실을 이제 극복하려 노력해야만 합니다.

최근 몇 년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홍산문화는 우리민족 고유가치의 모태나 원류를 찾는 하나의 코드가 될 수 있습니다. 1979년에서 1985년까지 이어지는 시기에 燕山 북쪽에 위치한 요령성 서부의 山地인 東山嘴 및 牛河梁 등에서 그 이전에 중국 각 지역에서 이미 발견되었던 신석기시대 유적들에 비교하면 그 규모가 다소 크고 또 체계적인 것처럼 보이는 祭壇과 함께 女神廟, 積石塚 및 다수의 玉器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유적들의 발굴 이후 內蒙古 동남부와 河北省 및 遼寧省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紅山文化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홍산문화는 중국의 중원 일대와 남방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적 양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화적 특성으로 인하여, 홍산문화는 고대의 일반화된 개념인 소위 ‘중국의 문화 또는 문명’ 권역에서 밖으로 비껴있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권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홍산문화의 해석에서 그 특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동산취와 우하량에서 발견된 적석총과 제사 유적 및 옥기입니다. 여기서 적석총은 무덤이나 제단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적석총과는 별도의 여신묘를 통해서 신석기 시대라는 단계에서 종교가 생겨나 그 사회의 정신을 대체적으로 지배했을 가능성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홍산문화의 또 한 가지 특성으로서 적석총 안의 각 무덤에는 옥기가 부장되어 있는데, 홍산문화의 옥기가 그 분포 범위의 광범위함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규범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한 영역 안의 사람들이 일정한 관념의 형태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추론하도록 해줍니다.

현재까지 한국 학계에서는 우리민족의 고유가치관 즉 민족정체성의 뿌리가 어떻게 형성되고 또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여러 관점이 제시되어 자못 논쟁 중입니다. 우리는 우리민족 고유가치관의 근원을 민족고유신앙에서 탐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수일은 그의 저서 『문명교류사 연구』 중의 「한민족의 고유가치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생활문화의 내면적 근간을 이루는 가치관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고유 가치관만은 상당한 지속성을 가지고 민족의 생존과 발전의 잠재력으로 항시 작용한다. …민족의 고유가치관은 기층문화의 근간인 민속문화와 직결된다. 그런데 민족문화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민속문화는 근원적으로 민족 고유신앙에서 연유된다. 따라서 고유신앙은 고유가치의 모태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 神은 외래종교처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이러한 神觀은 그들의 생사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죽음은 현세와의 단절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며, 사실상 살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죽음과 삶은 생활 속에 간격없이 공존해 있다. …고유신앙은 비록 제도종교처럼 경전 같은 지적 구조물이나 예배 등 정형화된 행동규범, 그리고 교단과 같은 공동체 운영은 없지만, 생활의 심층에 자리잡고 본래적인 의식 형태로서 민족고유의 가치관 형성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한편 사상사 측면에서 보면 고유신앙을 기조로 한 민간사상은 끈끈이 전승되는데 반해 官認思想은 수용자의 자세에 따라 생멸과 명암의 각이한 운명을 겪게 된다. 관인사상이란 관권 아래 주로 국책으로 공인된 외래사상을 말하며, 민간사상이란 서민대중의 생활 속에서 무형으로 전승된 고유사상을 가리킨다. 역대 한국의 관인사상은 권력구조의 변화에 따라 성쇠기복이 무상한데, 이것은 유럽의 관인사상과는 자못 다른 양상이다.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공인으로 전래된 후 고려 공양왕 4년(1392)까지 1020년간 국교로 신봉되었으나 이조의 排佛崇儒 정책에 밀려 입산하자, 유고가 대신 새로운 관인사상으로 등장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물질과학사상이 침투됨에 따라 유교사상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관인사상과 달리 고유신앙이나 원시종교 같은 민간사상은 비록 세련된 현대사상으로 순화되지는 못하였지만 여전히 민족 심성의 저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서민대중의 정신생활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정수일의 서술에서 “고유신앙은 고유가치의 모태”라는 관점은 우리민족의 고유가치관을 탐색하는 것이 고유신앙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유신앙은 무엇일까요? 우리민족의 고유신앙과 관련하여 巫敎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황금가지’라는 제목으로 변역출판된 J.G.Frazer의 『The Golden Bough』에서는 “나의 대담한 추론에 따라 만일 세계 전역에 걸쳐 주술의 시대가 종교의 시대보다 앞서 존재했다고 한다면, 과연 무엇이 인류에게 신앙과 실천의 원리로서의 주술을 버리고 대신 종교를 믿게 한 것인지가 문제시될 것”이라며, 이어서 주술이 역사적으로 종교에 선행한 과정 및 주술에서 종교로 변화하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J.G.Frazer의 서술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 가운데 보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지성인들이 뒤늦게나마 주술이란 원천적으로 오류이며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자연을 이용하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일부 영리한 지성인들은 주술의식이나 주문이 실제로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다만 대다수의 무지한 동료들이 잘못 믿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각했던 것이다. 주술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하는 위대한 발견은 그것을 알아차린 총명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마도 점진적이긴 하지만 근본적인 어떤 혁명을 불러일으켰을 법하다. 그때까지 인류는 자연이 완전히 자기 지배하에 있다고 믿어 왔지만, 이제 이런 발견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비로소 자신이 자연의 힘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인류의 무지와 무력함에 대한 고백에 다름 아니다.” J.G.Frazer는 인간이 주술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면서 인간이 “모두 자신보다 더 강력한 힘에 복종할 따름이며, 자신이 조종할 수 없는 운명에 순종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만일 위대한 우주가 인간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운행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보다 훨씬 더 강한 어떤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존재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주 운행을 지배하고 인간이 종전에 자신의 주술을 통해 일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런 모든 현상들을 지배한다고 여기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뒤이어 “이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존재의 힘에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살겠노라고 겸허하게 고백하게 되었”는데, “아마 이런 과정에서 보다 사려 깊은 사람들은 주술에서 종교로의 위대한 전향을 시도했을 것”이라고 서술합니다. 물론 J.G.Frazer의 종교를 보는 관점과는 다르게 우리민족의 고유신앙의 기원과 발전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서구의 기독교, 아시아의 불교와도 다른 우리민족 고유신앙은 그에 적합한 우리민족 특유의 관점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 소개한 정수일의 책 중 「동서 相異의 가치관적 연원」이란 제목의 서술에서 우리민족 특유의 가치관에 대한 탐색 방법 획득 가능성도 시사되고 있습니다. “가치관이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가치를 중심으로 한 관점과 시각으로서, 여기에는 자연관‧우주관‧철학관‧인생관‧도덕관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가치관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심적 활동에 의해 규제되며, 주로 종교‧예술‧학문 등 문명 영역에서 표현된다. 그런데 인간의 심적 활동은 원천적으로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와 대응에서 비롯되며, 그 전개 과정은 이러한 이해나 대응과 함께 전승과 교육에 의해 추진된다. 따라서 상이한 자연환경은 각이한 심적 활동을 유발시키고, 각이한 심적 활동은 또 상이한 가치관을 산생시키며, 상이한 가치관은 궁극적으로 문화에서의 相差를 결과한다. 그래서 동서간의 상이한 가치관은 동서 문명의 相差를 낳은 연원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심적 활동을 동양적 개념으로는 靜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관에는 止觀‧觀照‧思惟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문명은 지관과 관조를 基幹으로 하여 이루어진 문명이고, 서양문명은 사유를 기간으로 하여 이루어진 문명이라고 한다. 자고로 지관이 인도인들의 세계관이라면 중국인들의 세계관은 관조다. 그래서 인도 문화는 종교성이 강하고 중국 문화는 예술성이 뛰어난 문화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반면에 서양은 주로 사유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이해하여 왔다. 따라서 서양문명은 다분히 학문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이렇게 동양문명이 지관적이고 관조적인데 반해 서양문명은 사유적일 수밖에 없게 된 근원적인 動因은 바로 상이한 자연환경에 있다.” 위의 서술에서 정수일은 동서양 가치관을 비교하고, 동양의 사례로 인도와 중국을 들었는데, 당연히 한국은 동양 안에서의 또 다른 특수한 한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비교, 더 나아가 동양 안에서의 여러 문화권의 비교를 통해서 한국의 특성으로서의 고유가치관을 태어나게 만든 고유신앙을 접근하는 탐색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사실 한국의 고유사상, 고유가치관과 고유신앙을 연결시켜 해석하는 여러 논의는 이미 오래 지속되어 왔습니다. 특히 한국인의 고유신앙을 巫敎로 보고, 무교와 고유사상의 관계를 분석하곤 했는데,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일치된 견해는 제시되지 못했습니다. 황필호는 『한국 巫敎의 특성과 문제점』에서 “지금까지 학자들은 한국인의 고유사상은 전혀 무교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전적으로 무교사상이라고 주장해왔다. 예를 들어서 이능화는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이능화를 비판한 임석재는 그 반대편에 서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토론한 김인회의 입장은 좀 애매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의견을 따르는 듯하다.”고 분석합니다.

황필호는 이능화, 김인회, 임석재, 정진홍, 유동식, 홍일식 등 무교와 관련한 연구를 진행한 사례들을 예로 들며 우리민족 고유신앙을 무교로 정의하고 그 신앙에 따른 민족정체성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최준식도 고유사상과 무교의 관련성을 언급하면서 『巫敎-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에서 무교는 한국인의 근본종교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한국에서의 무교 현황에 대한 서술은 다음과 같습니다.“한국은 한국인들이 인정하건 안 하건 巫敎가 정신적인 바탕이 된 나라라는 것이 필자의 오랜 논지이다. 한중일 동북아 삼국을 놓고 보면 이 삼국은 불교나 유교 같은 상층의 종교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두 종교가 역사적으로 전개된 양상을 보면 삼국에서 다소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 큰 틀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기층으로 내려오면 이 삼국은 완전히 다른 종교 체계를 갖게 된다. 이 양상을 중국부터 보면, 중국의 민중들이 가장 애호했던 종교는 말할 것도 없이 도교이다. …이에 비해 일본의 기층 종교는 말할 것도 없이 神道이다. 기층종교라고 해서 이 종교가 상층과 관계없다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이 신도가 상층이나 기층과 같은 계층에 관계없이 국민적인 종교로서 기능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 문화의 기층에 흐르는 고유종교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누누이 주장한 것처럼 무교가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동북아 삼국 가운데 중국이나 일본은 자기들의 기층 종교를 인정한 반면, 한국은 철저하게 그것을 무시하고 미신으로 매도했다는 데에 있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전통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무교의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신들의 뿌리를 무시한 것이다. 자신들의 뿌리를 외국에서 들여온 종교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를 폄하한 것이다. 이 무교가 한국인의 영원한 기층 종교라는 데에는 충분한 증거자료를 제시할 수 있다.” 위에 소개한 최준식의 서술에서 보였듯, “동북아 삼국 가운데 중국이나 일본은 자기들의 기층 종교를 인정한 반면, 한국은 철저하게 그것을 무시하고 미신으로 매도했다는 데”, 과연 사실일까요? 왜 한국인들은 “자신의 전통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무교의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신들의 뿌리를 무시하며, 자신들의 뿌리를 외국에서 들여온 종교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사회에 대해 던지면, 과연 우리의 현실이 무교를 우리민족 또는 우리사회의 기층종교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요?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여러 해결해야 할 의문들을 안고, 그 해답을 찾아, 우리민족의 고유가치관의 형성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작업을 벌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탐색작업의 첫 작업은 바로 우리민족 상고사에서 형성된 초기의 고유신앙을 분석하는 작업이지 않을까요? 확실히 홍산문화의 동산취 및 우하량 유적에서 발견된 여신상과 제단,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분명 종교가 초기 발생하여 발전하던 현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홍산문화의 종교 현상을 우리민족의 고유신앙과 연결시키려 한다면, 합당한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다음에 자세히 밝히겠지만, 분명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홍산문화는 그 문화적 지표가 고대의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설정된 ‘중국’ 혹은 ‘중화’적 질서와는 다른 것임이 고고학 및 문헌 자료로 충분히 입증 가능합니다. 또한 박선희의 『고조선 복식문화의 발견』에 서술되었듯, 홍산문화는 한국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데에 일반적으로 중심을 두어왔던 고대의 국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입증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고고학 및 여러 문헌 자료로 홍산문화에서 우리 고유신앙과 고유가치관을 탐색하는 작업은 가능한 것입니다. 단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방법상에서 명확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틀을 짜놓고 꿰어맞추는 식의 연구작업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틀에 맞추는 이런 방식은 바로 우리 학계가 무엇보다 비판해야 할 방식으로서, 그런 방식에 의해 우리 역사와 문화가 외래적인 논리에 의해 왜곡되어 왔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Martin Bernal의 저서 『Black Athena』에서(한국에서 이미 번역됨) 비판했던 실증주의란 방법을 은연중 적용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Martin Bernal은 고대 그리스 문명이 이집트와 페니키아의 영향으로 성립되었다는 史實, 즉 유럽인의 문화적 조상인 그리스가 이집트라는 소위 아프리카 국가의 후예라는 史實을 왜곡하기 위해 우수한 유럽인종과 그보다 열등한 비유럽인종의 인종적 편견을 만들어내고, 이런 인종적 편견에 과학의 옷을 입히는 것을 집단적 책무로 했던 실증사학을 비판합니다. 실증주의는 유럽의 식민주의가 전성기를 향하던 시기에 그 바탕이 되는 인종주의를 완성하고, 유럽이 세계를 식민화하고 지배할 근거를 만들어낸 논리였습니다. 사료 비평이라는 소위 근대적 기법을 통해 자신들의 목적에 맞지 않는 史實 기록들은 오히려 신빙성이 없는 혹은 부족한 신화로 만들어 버리고, 나아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과거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실중주의 방법이었습니다. 더욱이 내부 모순이 극에 달한 현재의 한국 학계는 다수 연구자가 식민지 지식인이 되어 정녕 우리가 비판해야 마땅한 과학과 진보라는 마법의 실증주의를 종교처럼 받들고, 또한 그런 방법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심하게 왜곡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홍산문화에 대한 연구는 기존 연구성과를 전반적으로 비판하고 또 극복하는 방법으로 접근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고고학 자료와 문헌을 통해 여신상과 그에 관련된 祭儀의 종교적 현황을 명확히 파악하여 제시해주고, 황하 중하류 유역의 앙소문화와 산동반도 주위의 용산문화 및 장강 유역의 양저문화와는 분명하게 차별되는 특성을 지닌 그 종교 현상을 우리 민족 상고사 초기 역사의 고유신앙과 연결시켜 내는 것입니다(李伯谦, 「中国古代文明演进的两种模式-红山、良渚、仰韶大墓随葬玉器观察随想」『文物』2009第3期) 참조). 만약 앞으로의 연구에서 이러한 연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민족 정체성의 기저에 자리한 홍산문화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에서 기존에 중국 및 한국 학계에서 사용하던 몇가지 용어나 고정관념들에 대해 처음부터 정정을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될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홍산문화 무덤에서 발굴된 옥기 중의 어떤 것을 ‘玉龍’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처음부터 잘못된 표현입니다. ‘옥룡’이란 표현 자체에는 유물이 형성된 홍산문화 시기보다는 훨씬 후대에 형성된 ‘중국’의 ‘용’ 중시 관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옥룡’이란 표현에는 홍산문화를 소위 ‘중국’ 혹은 ‘중원’의 문화 개념에 종속시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용’ 관념은 홍산문화 건설 주체들에게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정착 농경보다는 수렵과 목축의 비중이 더 컸을 수도 있는 홍산문화인들에게, 특히 그들이 지닌 유목 지대에서 농경 지대로 넘어가는 과도지역에 문화를 건설한 홍산문화 담당자들에게, 더욱이 서기전 3500년에서 3000년경의 그 지역의 기후나 지질 및 지형을 생각할 때 ‘용’은 결코 홍산문화 건설 주체가 상상해낼 필요가 없는 상징입니다. 何新은 『神龙之谜:东西方思想文化研究与比较』(延边大学出版社, 1988)에서 중국 용은 고대에 실재했던 악어였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何新은 『诸神的起源:中国远古太阳神崇拜』(光朋日报出版社, 1996)에서 홍산문화 유물로서의 ‘옥룡’을 거론하지만, 이 ‘옥룡’은 돼지머리에 비늘이 없는 형태인데, 고고학적으로 뱀 형태에 비늘이 있는 용이 나타난 시기는 商 중기 이후라고 설명합니다. 何新의 용에 대한 관점을 정리해보면, 홍산문화 옥기에 나타난 ‘용’은 商 중기 이후에 비로소 나타난 용(이것이 중국적 용의 기원 형태임이 틀림없다)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홍산문화 옥기에서는 돼지, 곰 등의 토템 상징을 표현한 것인데 홍산문화를 발견한 중국학자들이 이 옥기에 ‘용’자를 덧붙여 그 성격을 ‘중국’적인 것으로 조작했다고 보여집니다. 때문에 홍산문화의 정체성을 우리민족 고유성과 연결시키려는 시도에서 먼저 중국학계의 이러한 命名法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용과 관련한 논의를 더 진전시키면, 홍산문화는 용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蘇秉琦 등 홍산문화 연구자들이 ‘옥룡’이나 ‘옥저룡’ 등으로 명명했지만, 사실 홍산문화 옥기가 표현하려 했던 것은 절대로 용이나 돼지가 아닙니다. 홍산문화 담당자들이 표현하려 했던 옥기의 상징은 바로 곰임이 틀림없습니다. 곰을 토템화한 유목 혹은 수렵 위주의 집단에서 死者를 위한 儀禮 즉 祭儀 과정에 곰의 상징을 副葬했던 것은 아닐까요? 중국의 고대신화를 검토해보면 용은 고대 중원 황하 및 장강 유역의 농경 위주 집단에게 구름, 강우, 천둥, 번개 등과 관련되어 나타난 상징입니다. 또 그 상징의 유추는 악어로부터 이루어졌음을 위에 소개한 何新의 연구 등에서 알 수 있습니다. 물론 巫敎라는 우리 학계의 용어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교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해서는 안됩니다. 巫敎라는 용어보다 더 민족 고유신앙을 잘 포괄할 수 있는 용어를 모색하자는 제의를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새로운 용어에 대한 제기와 다수의 수용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그 용어 자체에 대한 부정적 문제 제기는 무의미하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러한 연구들은 이후 우리 민족종교 전반의 화합과 발전적 통합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홍산문화를 우리민족 고유가치관의 源流로서의 고유신앙과 연결시키고 그럼으로써 우리민족 정체성을 홍산문화에서 찾아보고 동시에 우리 상고사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최근 몇 년간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해보니 홍산문화 연구를 우리민족 고유가치관, 고유신앙, 민족정체성을 찾는 출발점으로서의 탐색작업으로 의미부여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듭니다.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이런 방향의 연구가 가능하며, 그 결과는 성공적일 수 있다는 확신이 섭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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