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관리자 email gukhak@gukhak.org
작 성 일 2013-01-23 15:32:08 조 회 수 1530
제 목 국학과 수행
내 용

國學과 文化 - 修行을 中心으로

 

1. 修行과 人間

 

요즘은 수행의 홍수시대다. 도시건 시골이건 자칭 도인들도 많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을 행한다는 바람에 현혹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이러한 경향은 두 가지의 상반된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세상이 점점 수행과 멀어지는 상황에 대한 역설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사람들이 수행의 본질적인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여 달려드는 경향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수행을 통해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찍이 공자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고 했다. 풀이하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이야기이다. 수행으로 도를 구하고 닦는 것이 그만치 어렵고 귀하다는 것을 웅변해주는 셈이다.

수행은 인간과 뗄 수 없는 전제가 된다. 인간의 마음과 몸․숨쉼 그리고 행동거지 모든 것이 수행의 그릇[器]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마음공부를 겸함 수행은 모든 수행의 필수가 될 것이다. 또한 그 그릇을 닦고 행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도교적 방법으로부터, 유교적 방법, 불교적 방법, 기독교적 방법 등등 헤아리기조차 쉽지가 않다.

도교는 신선방술을 기본으로 하여 불노장생의 수행에 힘썼다.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벽곡(辟穀:오곡을 먹지 않음, 일종의 식이법), 복이(服餌:여러 가지 약의 제조법과 복용법), 조식(調息:심호흡법), 도인(導引:보건체조 또는 안마법), 방중(房中:성생활의 조화) 등의 일을 중시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선사상에서는 인간이 특수한 수련을 통하여 영생불사하는 신선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신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게 해준다.

유교의 수행으로는 좌정(坐定)이나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공부가 있지만, 대표적 방법으로는 독서(讀書)가 손꼽힌다. 독서라고 하면 글자 그대로 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수행으로써의 독서는 단순한 책읽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주역이나 중용같은 경전 가운데서 자기 사상(思想)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택일(擇一)하여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읽는 것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주역 만독(萬讀)에 도를 통했다느니 중용을 평생 읽고 도통했다는 따위의 말은 이 방법의 유효성을 증거하는 셈이다.

불교의 수련방법으로는 독경(讀經)․염불(念佛)․참선(參禪)․진언(眞言)․고행(苦行)․기도(祈禱) 등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독경하는 방법은 유가의 방식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염불하는 것은 부처님을 염(念)하는 것이므로 정신통일 방법으로 탁월한 효능을 지닌다. 참선은 여래선(如來禪)이니 달마선(達摩禪)이니 해서 구분 짓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은 정심(定心) 곧 마음자리는 찾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언이나 기도의 경우도 그 심리적 효과에서는 염불이나 참선과 다름이 없다. 또한 고행은 석가모니 부처의 6년 고행을 본받아 하는 수련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을 자비(慈悲)․인욕(忍辱)․일체법공화(一切法空化)해 버리기 위해서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바로 고행이다.

기독교적 수련방법은 한 마디로 ‘기도’에 집약된다. 예수가 40낮 40밤을 광야에서 금식(禁食) 기도한 것이 기독교적 방법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그 이후에도 시나이산에 올라 혼자 기도하곤 했다. 예수의 기도는 피땀을 흘리는 기도였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예수는 밤새워 기도했다. 기독교의 기도 역시 천지(天地)를 주재하는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2. 三法修行의 必要性

 

수행은 인간 완성을 위한 중요한 방편이다. 국학적 시각에서의 수행이란 전래 신교수행과 통하는 말이다. 신교의 수행은 마음공부․숨공부․몸공부를 통하여, 인간과 사회의 질적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교를 중광한 나철은 신교수행이야말로 종교적 삶의 처음이자 끝으로 인식했다. 실제로 나철은 신교를 다시 일으켜서 순교할 때까지, 그의 8년 동안의 삶을 수행으로 일관했다. 이것은 홍익인간이라는 교의(敎義) 실천과 성통공완이라는 종교적 완성의 필수조건으로써, 배달민족 수행의 본체를 담은 「삼일신고」의 핵심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철은 그가 순교할 당시 남긴 「중광가」에서도, 신교수행을 삼법이라 말하면서 그 요긴함을 재차 강조했다. 우리 마음에서의 깨달음을 먼저 하라는 가르침과 함께 참과 가달이 우리 마음 속에서 결정됨을 다음과 같이 암시한다.

 

“工夫한 형제자매 三法 먼저 배우되 / 한배의 소리기운 밖에서 求치 말고 / 네 神府 공경하라 네 靈臺 밝히어라 / 玄玄코 精一하면 한울사람 한 旨趣”

 

“네 眞性 求할 때 皎皎한 저 달 보라 / 한 달이 各各 물에 똑같이 찍혔건만 / 고요코 맑은 물엔 맑은 빛이 훤앙청 / 흔들고 흐린 물엔 흐린 빛이 어스름“

 

이렇듯 나철은 ‘인간사의 모든 것이 수행에 있다’고 강조했는데, 그의 마지막 죽음을 보면 더욱 수행의 의미가 무언가를 알 수 있다. 나철은 순교하기 며칠 전인 1916년 8월 11일, 방 앞의 기둥에 “전수련삼진리 보구리오고계(專修硏三眞理 普求離五苦界)”란 대아적 수행관을 써 붙이고 수행에 정진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수행의지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일관된다.

즉 나철은 그의 죽음에서도, 삼법 중 하나인 ‘조식법’을 통해, 스스로 절식(絶息)함으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폐기(閉氣)의 수행경지는 최고의 수행경지를 보여준 것인데, 일관된 도력으로 육체의 생리작용을 버리고 정령(精靈)을 돌이켜 통성(通性)․지명(知命)․보정(保精)의 삼미(三美)를 온전히 갖춤으로 얻을 수 있는 성철(聖哲)의 죽음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나철은 마지막 유서로서도 교인들에게 삼법수행을 힘써 행하여 마음의 욕심을 가라앉히라고 당부하면서, 「중광가」에서는 삼법수행의 공효를 다음과 같이 다시금 일깨웠다.

 

“셋 하나 참 理致를 힘쓰라 工夫하라 / 十八지경 세 길로 妄에서 眞에 가면 / 五苦界 아주 떠나 四神機 바루 얻어 / 通性한 이 길 우에 萬德門 光明光明”

 

한마디로 나철의 유언은, 우리 인간의 삶에 ‘왜 삼법수행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주는 동시에, 나철 스스로 수행정진으로 일관한 이유에 대한 해명을 찾을 수 있다.

3. 三法修行의 槪念

 

수행이란 말 그대로 생리적 욕구를 금하고 정신과 육체를 훈련함으로써, 정신의 정화나 절대적 존재와의 합일을 얻으려고 하는 구도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삼법수행은 역시 우리 고유의 구도 행위로, 신교에 연면히 전승되어 흘러오는 성통공완(性通功完)의 비결(秘訣)이요 홍익인간의 지침(指針)을 말한다.

신교수행의 원리인 삼법수행이란 말은, 삼일철학의 수행적 원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삼일신고」‘진리훈’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삼법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나철이다. 나철은 삼법을 신교수행의 처음이자 끝으로 이해했다. 그의 유서 중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소운 兄丈께 삼가 道鑒을 드립니다. 神訓에서 말한 ‘自性求子降在爾腦’는 믿음의 근본이며, 眞理訓에서 말한 ‘止感調息禁觸’은 정성의 근원이니, 이 말을 소중히 받들어 수행하십시오. 단제강세 4373년 병진 가경절에 홍암 나철(謹贈 小雲兄丈 道鑒 神訓曰 自性求子降在爾腦 信之本也 眞理訓曰 止感調息禁觸 誠之原也 昻哉 專修. 檀帝降世四千三百七十三年丙辰之嘉慶節弘巖羅喆)"

 

나철은 구월산 삼성사에서 조천(朝天)하면서 여러 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도감(道鑑)’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유서로는 이것이 유일한 것이다. ‘도감’이란 문자 그대로 ‘수행하는데 거울[鑑]’을 삼으라는 뜻으로, ‘수행의 핵심을 깨우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감’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삼일신고」의 ‘신훈’에 있는 자성구자(自性求子) 항재이노(降在爾腦)라는 말이다. 둘째 부분은 지감(止感)․조식(調息)․금촉(禁觸)으로 수행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삼일신고」‘진리훈’에 나오는 말이다. 이 두 부분은 믿음과 수행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알파이고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성구자항재이노’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자성구자’란 ‘자기의 본성(本性)’에서 하늘 또는 한얼의 ‘씨앗(子)을 찾으라’는 뜻이고, ‘항재이노’란 그렇게 찾으면 ‘너희 머리 속’에 ‘내려와 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자성 즉 자기의 본성이란 자기의 진성(眞性)을 말하는 것이며, 노(腦)란 머리골 즉 신부(神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교의 근본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늘과 내가 하나이고 하늘의 씨앗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내 머리 속에 있다는 생각과 믿음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까닭에 『참전계경』에서는 그 본성[道]을 찾아가는 방법을 이렇게 말한다.

 

“彰道란 하느님의 바른 도를 밝게 빛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하느님의 바른 도를 행하면 요사스러운 귀신이 감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며 사악한 마귀 또한 간사함을 부리지 못한다. 무릇 하느님의 바른 도란 中道를 말하니, 중도의 법도를 잘 지켜 나가면 마침내 하늘의 도가 밝아진다.”

 

도가 하느님의 정도를 밝히는 것이라 했다. 또한 하느님의 도는 중도(中道)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중도의 의미를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로 이해했다. 유교의 가치로 보면 중용의 가치와도 통하는 것이다. 중용이 모자람도 지나침도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교(神敎)의 중도는 그것과는 다르다. ‘사람이 행하는 하느님의 정도’란 바로 ‘자성구자항재이노’를 관(觀)하라는 뜻이다. 그 관하는 첩경이 신교의 제천(祭天)이요 기도(祈禱)다. 모두 하느님과 통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삼법수행은 ‘자성구자항재이노’를 붙잡고, 정성의 근원인 지감․조식․금촉을 부단히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三法修行의 傳乘

 

삼법수행은 「삼일신고」‘진리훈’에 그 뿌리를 둔다. 따라서 삼법수행의 역사는 신교의 고유경전인「삼일신고」의 출현과 출발을 같이 한다. 원동중의「삼성기전(下)」에 보면 환웅이 교화를 베풀고 천경(天經)과 신고(神誥)를 가르쳐 모든 무리들을 다스렸다 한다. 이것은 「삼일신고」가 본시 환웅 때에 나온 것이라는 말로, 삼법수행 또한 이 시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신교의 근대적 부활체인 대종교의 기록에도, 발해 문왕이 적었다는 「삼일신고 간직해 온 내력」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삼가 상고하건대, 『古朝鮮記』에 이르기를, ‘삼백 예순 여섯 갑자에 한배검께서 天符印 세 개를 가지시고 雲師․雨師․風伯․雷公 등 神將을 거느리시고, 한밝메(백두산) 박달나무 아래 내려 오시사, 산과 물을 개척하고, 사람과 만물을 낳아 기르시며, 두 돌 갑자 지낸 무진년 상달 초사흗날에 이르러, 신령한 대궐에 거동하사, 한얼님의 말씀(삼일신고)를 가르치시니, 때에 팽우는 三千團部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와서 머리 숙여 받들며, 高矢는 동해가에서 푸른 돌을 캐어 오고, 神誌는 돌에 이것을 그려 전했다’고 하였으며, 또 『後朝鮮記』에는 ‘箕子가 一土山 사람 扶餘의 법학자 王受兢을 맞아 박달나무를 다듬어 殷나라 글로써 「삼일신고」를 써서 읽었다’고 했으니, 그러므로 「삼일신고」는 본디 돌과 나무의 두 책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돌로 된 책은 부여의 나라곳간[國庫]에 간직되었고, 나무로 된 책은 衛氏朝鮮에 전하였다가, 둘 다 아울러 戰亂에 잃었다 하며, □□□□□□□□□□□□, 이 책은 바로 고구려에서 번역하여 전한 것이요, 우리 할아버지 高王께서 읽으시고 예찬하신 것이니라. 소자(발해문왕-인용자주)가 이 「삼일신고」를 받들어 온 뒤로, 항상 잘못될까 두려워하며, 또 옛날 돌과 나무에 적은 두 책이 세상 풍파에 없어진 것을 생각하여, 이에 靈寶閣에 두었던 임금 지은 예찬을 붙인 진귀한 책을 받들어 한밝메 報本壇 돌집 속에 옮겨 간직하노니, 이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大興 3년 3월 15일에 간직하노라.”

 

즉 「삼일신고」를 단군한배검이 삼천단부에게 가르쳤다는 것이며, 이것을 신지가 써 둔 고문(古文)과 왕수긍이 번역한 은문(殷文)은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고구려 때 번역하고, 발해 때 해석한 한문으로 된 것만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신시시대 환웅에 의해 가르쳐진 「삼일신고」를, 단군시대의 제1대 단군인 왕검이 계승하여 삼천단부에 가르쳤다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삼법수행의 역사가 환웅시대에 출발하여 단군시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삼법수행의 전통은 고구려로도 이어진다. 신교사서에 실려 있는 고주몽의 다음 가르침이 그것을 구체화 시켜주고 있다.

“『대변경』에 말하기를, 고주몽 성제께서 조서를 내려 ‘하느님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 하나의 형상으로써 고르게 세 참함(성품․목숨․정기-인용자 주)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삼진(三眞: 性․命․精)이란 하느님의 본성으로써, 인간이 육신의 탈을 쓰면서부터 나타나는 삼망(三妄: 心․氣․身)과 반대가 되는 의미다. 진정한 인간은 거짓인 삼망을 물리치고 참인 삼진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신교의 전래 수련법인 삼법수행(三法修行: 止感․調息․禁觸)이 바로 그것이다. 『太白逸史』에 언급된 고구려 을지문덕의 다음 훈계가 이것에 대한 답이다.

 

“을지문덕은 말한다. ‘도로써 하늘을 섬기고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덮는다. 나(을지문덕-필자 주)는 이러 말이 세상에 있음을 안다. 삼신일체(하느님-필자 주)의 기운을 받아 이를 나누어 성품․목숨․정기를 얻으니, 광명을 마음대로 하고 우러러 움직이지 않으나, 때가 되면 감동이 일어나니 도가 이에 통한다. 이것이 몸이 되어 삼물인 고이․슬기․힘을 행하고, 화하여 삼가인 마음․기운․몸이 되며, 즐겨 삼도인 느낌․고룸․부딪힘을 채우는 이유이다. 그 중요함은 날마다 재세이화하고 정수경도(靜修境途)하여 홍익인간을 생각함에 있다….’”

또한 을지문덕이 고구려 석다산(石多山) 사람으로서, 일찍이 입산수도하여 꿈에 하느님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것이나, 마니산에 올라 경배를 드리고 백두산을 찾아 제천을 했다는 기록 또한 의미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을지문덕도 삼법수행의 숭배자요 실천자였던 것이다.

또한 삼법수행의 묘리를 설파한 고려말 이암의 「단군세기」를 보면

 

“성․명․정(三眞-인용자주)이 잘 어울려서 빈 틈이 없으면, 삼신일체의 하느님과 같아서 우주만물과도 잘 어울리고 심․기․신(三妄-인용자주)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취없이 오랫동안 존재하게 된다. 감(感)․식(息)․촉(觸)[三途-인용자주]이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다를 바 없으니, 온누리에 두루 그 덕을 베풀고 함께 즐기어, 천․지․인(三妙-인용자주)이 절로 조화를 이룬다.”

 

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고려시대에도 삼법수행의 전통이 연결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4. 三法修行의 正體性

 

정(精)․기(氣)․신(神)에 근원을 둔 중국 내단사상(內丹思想)은, 중국 초기 도교(道敎)로부터 시작된 ‘기(氣)와 도(道)는 일기(一氣)’라는 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도덕경』에 나타나는 희(希)․이(夷)․미(微)나, 『여씨춘추』의 형(形)․정(精)․기(氣), 그리고 『회남자』에 기록된 형(形)․기(氣)․신(神) 등이 정․기․신의 원형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는 도교 수행의 중요한 소재를 제공했다. 『포박자』에는 금단술(金丹術)에 관하여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단을 연마하는 방법(煉丹術 또는 練丹術)에는 2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 외부의 물질을 섭취하여 수명을 연장시키는 방법이다. 이 외부의 물질(不死藥)이 금단(金丹)이며, 이러한 방법을 외단(外丹)이라고 한다. 둘째, 인간의 정신적인 수련을 통한 방법이다. 이것은 자신의 체내에서 금단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러한 방법을 내단(內丹)이라고 했다.

후자의 내단은 인간의 육체 속에 깃들어 있는 3가지의 근원적인 힘, 즉 원정(元情)·원기(元氣)·원신(元神)을 기르는 방법이다. 중국 단학에서는 정․기․신을 육신이 본유한 고귀한 약물로 간주해왔고, 정․기․신을 수련한다는 것은 곧 정신수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일원기(一元氣)의 흐름을 역행시켜 정을 기로 변화시키고, 기를 다시 신으로 변화시키며, 신도 궁극에는 허(虛)로 환원시키려는 것이다. 결국 정․기․신을 그 근원처로 되돌리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요체는 수중(守中)과 포일(抱一)이니, 모든 인위적인 사념(私念)을 배제한 가운데 마음을 고요히 하여 정신을 통일하는 것이 바로 중국 단학의 수련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단법은 기를 단련하여 금단을 완성시킴으로써 신선이 된다는 것이다. 내단법은 『포박자』의 신선사상 중에서 호흡법(혹은 行氣法)을 택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단학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문헌은 2세기경 오나라 사람 위백양(魏伯陽)이 저술했다고 하는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참동계』라고도 부름)이다. 『참동계』는 주역과 음양오행설을 연결시킨 저술이다. '참동계'라는 말의 뜻은 그의 사상이 '주역'과 같은 원리이며 뜻이 통하고 대의가 합한다는 것이다. 『참동계』에서의 연단법은 연명장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천지의 법칙에 따라 단을 제련하는 문제이다. 구체적인 방법에는 내단적인 것과 외단적인 것이 있다. 그런데 『참동계』의 문장은 기괴하여 그에 대한 해석도 구구하다. 어떤 학자들은 『포박자』가 외단의 대표적인 저작이라면, 『참동계』는 내단의 대표적인 저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위백양의 『참동계』와 갈홍의 『포박자』는 한국 도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정․기․신이 중국 도교의 내단적 수련원리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당말․송초의 시기다. 이 시대에는 외단에 대한 비판과 내단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즉 정․기․신은 중국 도교에서 말하는 삼보(三寶)로서, 인간 삶의 기본을 이루는 요소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간에 정․기․신에 형(形)이 의존하고 명(命)이 부리며 생(生)이 의탁하므로, 정․기․신이야말로 선도에 드는 참된 약물이라고까지 강조했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대부분의 수행도 중국 도교에 거론된 정․기․신의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나타난 내단수련이라는 점이다. 조선조의 문헌들 중 수행 혹은 양생과 관련된 수많은 서책들, 즉 김시습의 『잡저(雜著)』, 정북창의 『용호결(龍虎訣)』, 한무외의 『해동전도록』「단서구결(丹書口訣)」「단가별지구결(丹家別旨口訣)」, 허준의 『동의보감』, 곽재우의 『양심요결(養心要訣)』, 허균의 『한정록(閑情錄)』, 이수광의 『지봉유설』, 권극중의 『참동계주해』, 홍만선의 『산림경제』, 홍만종의 『순오지』『해동이적』, 서명응의 『참동고(參同攷)』, 서유구의 『보양지(葆養志)』,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강헌규의 『주역참동계연설』 등이 모두 정․기․신을 토대로 한 수행과 양생을 말하고 있다.

또한 작자 미상의 『직지경(直指經)』『중묘문(中錨門)』(17C 이후 저술)이나, 1920년대에 저술된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 등도 이러한 정․기․신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더불어 정․기․신에 대한 삼단전(三丹田) 대응의식도 중국 도교의 가치와 가까운 것으로써, 『종여전도집[鍾呂傳道集(論還丹)]』에서 기인한 것이다. 조선조 작자 미상의 『직지경(三丹田工夫)』에서도 『종려전도록(논환단)』을 인용․답습하여 “정구(精區)는 하단전, 기부(氣府)는 중단전, 신사(神舍)는 상단전”이라는 논리로 연결되고 있으며, 『동의보감(形身)』에서도 『선경(仙經)』의 말을 인용하여 “뇌(腦)는 수해(隨海)로서 상단전이요, 심(心)은 강궁(絳宮)으로서 중단전이요, 배꼽 아래 삼촌(三寸)은 하단전이다. 하단전은 정부(精府), 중단전은 신부(神府), 상단전은 기부(氣府)”라고 하면서, 하단전에 모아지는 정은 기로 변하여 정기의 통로인 미려(尾閭)․녹로[轆轤(夾脊)]․옥침(玉枕)의 삼관(三關)을 뚫고 상단전의 이환(泥丸)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이 충만하면 기가 장해지고 기가 장해지면 신이 밝아진다는 ‘정충기장신명’의 원리 역시 정․기․신의 운용 내에서 존재한다 할 수 있다.

정․기․신의 수행 윈리는 중국 도교에서 기인한다는 것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 고유의 수행과는 거리가 있다. 먼저 그 목적에서 홍익인간인[弘益人間人(性通功完者)]를 완성으로 하는 우리의 대아적 삼법수행과는 달리, 소아적 신선이나 불로장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또한 삼법(止感法․調息法․禁觸法)의 수행원리가 우리의 수행원리라면, 중국 정․기․신의 수행은 형식상 삼원론적 수행인 듯하나 성명쌍수(性命雙修)의 이원론적 수행에 바탕을 둔다.

더욱이 중국의 정․기․신 수행은 우리의 삼법 중에 조식법의 범주에 국한된 것으로, 지감법(기쁨․두려움․슬픔․노여움․탐함․싫어함)이나 금촉법(소리․빛깔․냄새․맛․음탕․살닿음)에 대해서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우리 삼법수행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 수 있다.

 

5. 三法修行의 方法

 

우선 삼법수행은 제천과 기도를 전제로 한다. 전술한 나철의 유서에서도 본 바와 같이, 믿음의 근본인 ‘자성구자항재이노’를 붙잡고, 정성의 근원인 지감․조식․금촉을 부단히 수행하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신교에서의 인간은 하느님의 신성분자(神性分子)를 받은 하느님의 분신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세참함[三眞-性․命․精]을 세가달[三妄-心․氣․身]를 물리쳐 다시 하느님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진리관이기 때문이다. 지감․조식․금촉은 삼망을 돌이켜 삼진으로 가는 신교의 방법론이다.[도표참조]

우리 신교의 사서들이 왜 삼신제천을 중요시했는가도 이해할 수 있다. 제천과 기도는 삼신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신교적 방법이다. 신교에 내려오는 오대종지(五大宗旨)에 보면, 단군시대 때는 염조신(念祖神)과 연명성(演明性)이, 고구려 때에는 경천조(敬天祖)와 감영성(感靈誠)이 종지의 우선으로 나타나 있다. 즉 하느님을 먼저 공경하고 마음에 품으라는 것과, 다음으로 인간의 성품을 정성껏 닦으라는 것이다. 제천과 기도가 우선시됨이 신교의 전래 전통임을 헤아리게 된다. 근대 신교의 중흥자인 나철이 신교를 다시 일으킴에 제천을 통해 천명했음도 그 이유일 것이다.

삼법수행의 방법론을 보면 「삼일신고」‘진리훈’에 토대를 둔다.「삼일신고」‘진리훈’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성(性)․명(命)․정(精)의 세 참함[三眞]을, 육신의 탈을 쓰며 나타나는 심(心)․기(氣)․신(身)의 세 가달[三妄]에 함몰되지 않고 온전히 하여, 성품을 트고 공적을 마침[性通功完]으로 얻어지는 신인합일․천인일여의 경지로 들어가는 가르침을 적은 글이다.

그러나 삼망(三妄)을 물리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쉬운 일이 아니다.

 

“心․氣․身은 반드시 서로 의지해야 할 일이로되 아직은 영원토록 서로 지키지 못하고, 靈․智․意의 三識은 곧 靈․覺․生의 三魂이 되고 또 그 소질에 따라 능히 形․年․魂혼을 넘치게 하는 것이다. 일찍이 境界에 따라서 感․息․觸이 있으니, 眞과 妄은 서로 三途(感途․息途․觸途-인용자주)를 끌어들여 갈라지고 말았다. 때문에 이르기를 眞이 있음으로서 살고 妄이 있음으로서 滅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거짓을 돌이켜 참으로 간다는 것이 극히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느낌지경[感途]․숨쉼지경[息途]․부딪힘지경[觸途]에 결려 참[眞]과 거짓[妄]이 서로 대립하고 헤맨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을 물리치고 참으로 가는 것은, 멸망을 피해 삶으로 가는 길임을 일깨워준다. 그 물리치는 방법이 새삼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나철의 제자인 서일이 그의 「회삼경」에서, 삼진(三眞)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삼망(三妄)을 물리치는 방법을 천운(天雲)․화풍(火風)․자철(磁鐵)에 비유하여,

 

“心은 性에 의지함이 하늘에 구름 같으니 하늘이 비이매 구름이 날치[騰]고, 氣는 命에 의지함이 불에 바람 같으니 불이 뜨거우매 바람이 빠르[驟]고, 身은 精에 의지함이 자석에 무쇠 같으니 자석이 굳세면 무쇠가 녹느니라.”

 

고 열린 하늘처럼 마음을 고루고(心平-天曠), 매서운 불꽃처럼 기운을 합치며(氣和-火烈), 굳센 자석같이 몸을 단련(身康-磁强)하라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서일은 또한 마음이 평안(心平)하면 안과 밖의 헤아림이 같아지고, 기운이 고루면(氣和) 나고 듦이 일정해지며, 몸이 강해지면(身康) 겉과 속이 균형을 이룬다고 소개함으로써, 가달을 물리치고 참을 지킬 수 있는 방법론이 바로 신교의 삼법수행임을 알려 주고 있다.

만물 중에 인간만이 하늘의 삼진(세참함-性․命․精)을 옹글게 받는 존재로써, 육신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삼망(세거짓-心․氣․身)을 돌이켜 참으로 나아감이 진정한 진리의 길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을 뉘우쳐 참된 성품을 보는 것이 지감법(止感法)이요, 기운를 바로 하여 참된 목숨을 얻는 것이 조식법(調息法)이며, 몸을 바꾸어 참된 정기을 가꾸는 것이 금촉법(禁觸法)이다. 신교의 삼법수행이란 이 세 가지의 수행을 말하는 것으로, 이 역시 삼위일체적 실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삼법수행의 근본원리가 삼일사상에 토대를 둠은 다음의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性․命․精을 三關(關이란 神과 통하는 막-인용자주)이라 하니, 關을 ‘守神의 要會’라 한다. 性은 命을 떠나지 않고 命은 性을 떠나지 않으니 精은 그 가운데 있다. 心․氣․身을 三房이라 하고 房(房이란 妄과 合하는 집-인용자주)을 ‘成化의 根源’이라 한다. 氣는 心을 떠나지 않고 心은 氣를 떠나지 않으니 身은 그 가운데 있다. 感․息․觸을 三門이라 한다. 門(門이란 修를 行하는 길)을 ‘行途의 常法’이라 한다. 感은 息을 떠나지 않으며 息은 感을 떠나지 않으며 觸은 그 가운데 있다.”

 

즉 삼관(三關)인 삼진(三眞-성․명․정)과, 삼방(三房)인 삼망(三妄-심․기․신), 그리고 삼문(三門)인 삼도(三途-감․식․촉)의 상호관계를 삼일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守神의 要會’란 인간의 머릿골 속에 내려와 있는 하느님[降在爾腦]을 말하며, ‘成化의 根源’이란 거짓에 빠져 함부로 치닫는 것[境途任走]을 일컫고, ‘行途의 常法’이란 거짓을 물리쳐 참으로 가는 방법[三法修行]을 이르는 것이다. 또한 성․명․정과 심․기․신과 감․식․촉을 말함에 있어, 성과 명, 심과 기, 감과 식이 각기 떨어지지 않음과 더불어, 그 연결체로 정과 신과 촉을 내세움도 주목된다. 이 역시 상계(上界)인 성과, 하계(下界)인 명을, 중계(中界)인 정으로 연결하는 이치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高麗八觀記에 三神說이 있는데, 上界의 主神은 그 이름을 天一이라 하고, 造化를 주관하며 절대지고의 권능을 갖고 있다. 無形으로써 形을 삼으며,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性을 통하게 한다. 이를 淸眞大의 體라 한다. 下界의 主神은 그 이름을 地一이라 한다. 敎化를 주관하며 지선유일의 법력이 있어 하는 바 없이 만들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命을 알게 하니, 이를 善聖大의 體라 한다. 中界의 主神은 그 이름을 太一이라 한다. 治化를 주장하며 최고무상의 덕량을 가지고 말 없으면서 교화하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精을 보정하게 하니, 이를 美能大의 體라 한다.”

 

「삼일신고」‘진리훈’에 나타나는 가달[妄] 십팔경(十八境-열여덟 경지)을 벗어나는 방법에서는 삼도의 지경이 더욱 구체화 된다. 즉 느낌 지경 여섯[喜․懼․哀․怒․貪․厭]과 숨쉼 지경 여섯[芬․歹+闌․寒․熱․震․濕], 그리고 부딪힘의 여섯 지경[聲․色․臭․味․淫․抵]이 그것이다. 삼법수행은 바로 그 십팔지경을 그침[止]․고룸[調]․금함[禁]의 방법으로 물리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본시 가달[妄]의 십팔경에 함부로 빠지고 날뛰는 존재다. 서일은 이로부터 벗어나는 구체적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정성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기뻐하되 얼굴빛에 나타내지 아니하며, 성내되 기운을 부리지 아니하며, 두려워하되 겁내지 아니하며, 슬퍼하되 몸을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탐하되 염치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싫어하되 뜻을 게으르게 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지감법(止感法)이다.

풀과 나무의 기운은 향기로워 시원하고 숯과 송장[屍]의 기운은 더러워서 썩으며 번개의 기운은 급하여 줄어들며 비의 기운은 느려서 새며 찬 기운은 능히 독하고 모질며 더운 기운은 능히 마르고 답답하게 하니, 이 여섯 가지는 하나도 없을 수 없으며 다 갖추어 있는지라, 심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기운을 흐리게 하여 도리어 그 해로움을 받게 되므로, 밝은 눈은 이것을 살피어 능히 삼가고 조절하니, 이것이 조식법(調息法)이다.

교묘한 말이 귀에 들리지 아니함은 나의 귀 밝음을 생각함이요, 아첨하는 빛을 눈에 접하지 아니함은 나의 밝음을 막을까 두려워함이요, 입에 시원한 맛을 들이지 아니함은 병을 삼감이요, 코에 비린 냄새의 기운을 맡지 아니함은 더러움을 막음에서요, 음란한 욕심을 절제함은 그 몸을 사랑하는 까닭이요, 살에 닿음을 미워함은 그 몸을 보호하는 까닭이니, 이것이 금촉법(禁觸法)이다.“

 

한편 ‘진리훈’에서는 마음공부[지감법]의 기준을 선악(善惡)에 두라 한다. 착하면 복이 되고 악하면 화가 된다는 것이다. 선악이란 모든 종교의 윤리적 근본 문제이자, 인류 보편적인 가치기준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인간 생활의 상투적 가치로 치부되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문제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 최고의 윤리로 인정받음이 그것이다. 착함은 하늘본성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착한기쁨[善喜]․착한두려움[善懼]․착한슬픔[善哀]․착한노여움[善怒]․착한욕심[善貪]․착한내침[善厭]이 바로 지감의 첩경이다. 신교의 「단군교포명서」에도

 

“단군교를 숭봉하여 착함을 따르며 악함을 피하여 영원한 福利가 자연히 한 몸 한 가정 한 나라에 미치기를 希願하나니”

 

라는 말을 피력함으로써, 신교의 근본이 착함을 따르고 악함을 피하는데서 출발함을 말해주고 있다. 백봉교단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이러한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즉 “대개 善惡應報의 이치는 하느님께서 상주고 벌하시는 법전이다.”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더욱이 단군대황조의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윤리가 무너지면서 단군조(檀君朝)도 흔들렸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규원사화』에도 부선멸악(扶善滅惡-선을 도와 악을 멸함)이나 장선정악(仗善征惡-선에 기대어 악을 침) 등의 내용이 많이 나온다. 특히 착함을 떠받듦이 한울집[神鄕]에 오르는 지름길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유교와 불교와 단군의 말에 대해 증명할 만한 겨를이 없으나, 인생이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 靈이 있으므로, 善을 돕고 惡을 없애며(扶善滅惡), 性을 통하고 功을 다하면(性通功完), 죽는다 하더라도 英靈은 없어지지 않고 능히 하늘로 올라가서 神鄕에 들어간다는 것을 믿을 만하다.”

 

“儒家에서는 魂은 오르고 魄은 내린다고 한다. 佛家에서는 영혼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열반․지옥․윤회․해탈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퍼졌다. 단군은 말하기를, ‘功을 다하고 하늘로 올라가니 神鄕으로 돌아간다’하고, 또 ‘만 가지 善을 행하고 惡을 버리면 性을 통하고 功을 다하여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또한 숨공부[조식법]의 기준은 청탁(淸濁)을 잡으라 했다. 맑으면[淸] 오래 살고 흐리면[濁] 일찍 죽기 때문이다. 숨쉼에 있어 맑은부드럼[芬]․맑은물름[歹+闌]․맑은차움[寒]․맑은더움[熱]․맑은마름[震]․맑은젖음[濕]이 바로 조식의 정도가 되는 것이다. 흡식(吸息-들숨)이나 호식(呼息-날숨)․지식(止息-멈숨) 따위는 차선이다. 장식(長息)이나 단식(短息) 등도 부차적인 문제다. 부드럼이나 물러터짐, 차가움이나 더움, 메마름이나 젖음 따위에 아랑 곳 않고, 탁함을 물리치고 맑음으로 호흡하는 것이 신교 조식의 으뜸이다.

신교의 몸공부[금촉법] 역시 기준이 있다. 후박(厚薄)을 구별하라는 것이다. 후하면 귀(貴)하고 박하면 천(賤)하기 때문이다. 후(厚)란 넓은 것을 말하며, 크게 있는 것을 뜻한다. 몸이 크고 넓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땅을 닮으라는 말이다. 땅은 우주의 기운이 최초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 우주의 기운을 온전히 함이 몸공부가 된다. 그 온전히 하는 방법이 두터운소리[聲]․두터운빛깔[色]․두터운냄새[臭]․두터운맛[味]․두터운음함[淫]․두터운살닿음[抵]으로, 금촉의 방도라 할 수 있다.

또한 신교의 삼법은 도달하면 모두 한 경지다. 다음의 내용처럼 성․명․정으로 돌이키면 모두 하나로 꿰어진다.

 

“사람에 三眞이 있다. 性․命․精 三受의 眞이다. 眞은 즉 衷(정성된 마음-인용자주)이고, 衷은 곧 業(모든 일의 시초-인용자주)이고, 業은 곧 續(끝없이 이어짐-인용자주)이며, 續은 즉 一이다. 그리하여 一에서 시작하여 一에서 끝난다는 것은, 돌아서 眞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곧 一이 곧 三이라 하는 것은 善에 합하는 것이다. 미립의 작은 알갱이를 쌓아서 일로 되돌아오는 것이 美이다. 곧 性이 善한 바요, 곧 命이 淸한 바요, 곧 精이 厚한 바다.”

 

『태백일사』에서는 참[眞]을 물들지 않는 것, 반면에 이 물듦을 거짓[妄]이라 구별했다. 그리고 착함[善]을 불식(不息)이라 하고, 그 식(息)을 악함[惡]이라 했다. 맑음[淸]을 불산(不散)이라 하고, 산(散)을 흐림[濁]이라 한다. 두터움[厚]를 불축(不縮)이라 하고, 축(縮)을 박함[薄]이라 했다. 식(息)을 악함이라 한 것은 질서 없는 삶을 경계하는 것이다. 산(散)을 흐림이라 한 것은 흩어져 집중하지 못함을 내치라는 것이다. 또한 축(縮)을 박함이라 한 것은 볼품없이 쪼그라듦을 멀리하라는 경계다.

한편 신교에서는 몸공부보다는 숨공부가, 숨공부보다는 마음공부를 위에 둔다. 몸은 숨을 가누지 못하고 숨은 마음을 부리지 못한다. 그러나 숨은 몸을 다스리며 마음은 숨을 거느린다. 부딪힘[觸]은 숨쉼[息]으로 누를 수 있고, 헐떡거림[喘]은 느낌[感]으로 잡을 수 있다. 몸이 죽어도 숨은 남을 수 있고, 숨이 멈춰도 마음이 살 수 있는 것은 이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삼일신고」‘진리훈’에서는, 지감(止感)을 통해 참성품[眞性]을 통달한 이를 으뜸밝은이[上哲]라 했다. 조식(調息)을 통해 참목숨[眞命]을 알아낸 이를 버금밝은이[中哲]라 했다. 금촉(禁觸)을 통해 참정기[眞精]을 보전한 이를 딸림밝은이[下哲]라 했다.

신교의 지감법이 불교의 명심견성(明心見性)과 통하고, 조식법이 도교의 양기연성(養氣鍊成)과 부합하며, 금촉법이 유교의 수신솔성(修身率性)과 일치하는 것으로, 신교수행을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이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삼법수행을 접화군생(接化群生)의 도(道)라고도 하는 까닭은, 신교의 삼법수행이 소아적 비결이 아닌 대아적 비방으로써, 홍익인간을 통한 신인합일(神人合一)․천인일여(天人一如)․인물불이(人物不二)의 경지를 통한 신과 물질과 인간의 조화적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서일의 「회삼경」에 나오는 다음의 삼법일묘(三法一妙)에 관한 풀이가 이를 뒷받침한다.

 

“고요히 꺼짐[寂滅]을 구함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구함에 있고, 날아오름[飛昇]을 구함은 기운을 길러 성품을 단련함에 있고, 크게 같음[大同]을 구함은 몸을 닦아 성품을 거느림에 있느니라.”

 

여기에서의 적멸(寂滅)은 불가에서 말하는 열반(涅槃)의 법을 일컫는 것이고, 비승(飛昇)은 도가에서 내세우는 우화(羽化)의 이치를 표현한 것이며, 대동(大同)은 유가에서 추구하는 치평(治平)의 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수행적 측면에서도 우리 고유의 신교가 유․불․선 삼교합일의 묘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을 근거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견성(見性)하기 위하여는 청정(淸淨-불교에서 마음의 번뇌를 떨쳐 버리는 것)에 도달해 막힘이 없어야 하며, 연성(鍊性)하기 위해서는 희이(希夷-도교에서 듣고 보지 않는 것)를 초월하여 저절로 되어야 하며, 솔성(率性)을 위하여는 중화(中和-유교에서 道와 德에 통달하는 것)에 이르되 펴지 않는 것이 성통의 길이라고 말한다.

 

6. 三法修行의 窮極的 指向

 

삼법수행은 지감(止感)을 통한 무선악(無善惡-착함과 악함이 없는 마음)과 조식(調息)을 통한 무청탁(無淸濁-맑음과 흐림이 없는 기운), 그리고 금촉(禁觸)을 통한 무후박(無厚薄-두터움과 엷음이 없는 몸)의 경지를 추구한다. 무선악․무청탁․무후박의 경지란 더 이상의 경지가 없는 지고의 지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망즉진(返妄卽眞-거짓을 돌이켜 참으로 나아감)과 반진일신(返眞一神-참을 돌이켜 하느님께로 합함)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성통(性通-소아적 수행의 완성)과 공완(功完-대아적 수행의 완성)을 하여 신인합일(神人合一)․홍익인세(弘益人世)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과 같은 말이다. 일찍이 발해 국상(國相) 임아상은 「삼일신고해설」해설에서, 삼진의 성(性)은 원[圓(○)]이고 명(命)은 방[方(□)]이며 정(精)은 각[角(△)]이라 했다. 이것은 천원(天圓)․지방(地方)․인각(人角)의 어울림은 곧 신과 물질과 인간의 조화요 이것은 바로 세 참함을 바르게 세우는 삼법수행의 묘리와도 상통함을 말하는 것이다.

서일도 오직 인간만이 만물의 영수(靈秀)로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직 사람은 본 정신(靈)이 만물 중에 빼어나[秀]서, 위로 하느님께 합하며 아래로는 뭇신령과 합하는지라. 귀와 눈이 밝고 슬기로움은 하느님과 사람이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세 가달[三妄]이 있는지라 혹은 아득하고, 깨닫고 움직이는 것은 사람과 만물이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세 참함[三眞]이 온전한지라 능히 깨닫느니라.”

 

한편 흔히들 수행이라 하면 숨공부(조식법)에 많이 경도되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삼법수행은, 금촉을 통해 정욕의 그릇인 몸을 강하게 하는 것이요, 조식을 통해 생사의 문인 기운를 고루는 것이며, 지감을 통해 길흉의 집인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 까닭에 삼법수행은 생명이나 연장하는 소아적 건강법이 아니라, 인간계(인간사회의 모든 관계)의 다섯고통[五苦(生․長․肖․病․歿)]를 벗고 천리[天理(신교의 교리로 본다면 ‘返妄卽眞 會三歸一’이라 할 수 있다)]에 합쳐 깨달아 가는 것(性通功完)이라 하겠다.

민세 안재홍 또한 삼법수행에 있어, 소아적 자수련(自修鍊)과 대아적 선봉행(善奉行)이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수련과 봉행은 표리본말한 것으로, 자수련에만 정진하면 소승독선(小乘獨善)에 그치므로 홍익인간의 대도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즉 홍익인간이 성통공완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안재홍의 논리인데, 대아적 수행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삼법수행이 인간혁명(성통)이요 사회갱생(공완)의 방법이라는 것도 이런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서일도 지[知-性通]와 행[行-功完]의 일치(一致)를 주장하면서, 성통과 공완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능히 나의 본연의 참됨을 아는 것을 성통(性通)이라 이르고, 능히 나의 당연함을 행하는 것을 공완(功完)이라 이르니, 알고 행하지 못함이 아는 것이 아니요, 알지 못하고 행함이 행하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은 성통이 없이는 공완이 없으며, 공완이 없는 성통 또한 의미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성통과 공완이 하나가 될 때 진정한 홍익인간구현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안재홍의 표리본말론(表裏本末論)과 일치됨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홍익인간과 삼법수행이 불가분의 관계가 되는 연유를 설명한 이맥의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을 보면 삼법수행의 목표가 더욱 분명하다.

 

“三神一體의 氣를 받아 이를 나누어 性․命․精(三眞-인용자 註)을 얻으니, 光明을 마음대로 하고 昻然하여 움직이지 않으나, 때가 되면 감동이 일어나니 道가 이에 통한다. 이것이 體가 되어 三物인 德․慧․力(三大-인용자 註)을 행하고 化하여 三家인 心․氣․身(三妄-인용자 註)이 되며 즐겨 三途인 感․息․觸을 채우는 이유이다. 그 중요함은 날마다 在世理化하고 고요히 境途(三法-인용자 註)를 닦아 弘益人間함을 간절히 생각함에 있다.”

 

아무튼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사대신기[四大神機(見․聞․知․行)]가 발(發)하여, 하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見神機), 하늘과 자연과 인간이 소리교감을 할 수 있으며(聞神機), 하늘과 땅의 질서를 알 수 있음(知神機)은 물론, 속세의 힘을 넘어 하늘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行神機) 안재홍은 이 사대신기를 원(圓)․진(眞)․미(美)․선(善)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원은 백[百(온)]으로써 구전(俱全)․원융(圓融)의 의미로 온전하게 보는(見神機) 것이요, 진은 천[千(즈믄․참)]으로써 충실부만(充實溥滿)의 뜻으로 참(즈믈)되게 듣는(聞神機) 것이며, 미는 만[萬(골)]으로써 균제(均齊)․조화(調和)를 나타내는 것으로 고루(골) 아는(知神機) 것임과 함께, 선은 억[億(쟐)]로써 최고의 경지까지 가는 일단(一段)의 신시원(新始元)을 말하는 것으로 잘(쟐) 사는(行神機)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런 논리로 본다면, 온전히 보기(圓見)․참되게 듣기(眞聞)․고루 알기(美知)․잘 살기(善行)를 하면 홍익인간적 삶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쉽고 상식적인 삶을 행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수행이 전제가 된다는 점이다.

 

7. 三法修行의 價値

 

수행은 나를 찾는 것이다. ‘육신의 나’로부터 ‘정신의 나’를 향해 감이며, ‘갇힌 나’로부터 ‘열린 나’로 나가는 것이다. 우리 민족 전래의 수행은 그 기준을 내 마음 속의 하느님을 만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초월적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수행,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그것이 신인합일이며 천인일여(天人一如)다. 삼법수행은 그 방법론이다. 그러면 ‘나’라는 인간이 ‘우리’라는 신인간으로 달라진다. 사회의 질이 달라진다. 삶의 차원이 달라진다. 까닭에 삼법수행은 인간혁명이며 사회혁명이다.

또한 수행은 그 집단에 있어, 과거로 보면 정체성이요 미래로 보면 경쟁력이다. 그 집단에 수행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삶의 지침 유무와도 관련된다. 수행을 잃어버린 집단은 자신을 모른다.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유럽의 기사도정신이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연결된다는 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무사도가 근대 일본의 힘으로 연결 되었다는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교의 수행인 배달도(仙人道․花郞道․선비도)를 잃어버림으로, 긴 세월의 질곡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삼법수행의 의미는 그래서 주목된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나를 주인으로 보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물질을 지양하고 정신을 추구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너와 합하는 가치를 말해주고 인류로 우주로 가는 인간의 길을 알려준다. 그리고 하느님에게 돌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즉 삼법수행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세 참함(성품․목숨․정기)을, 육신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세 거짓(마음․기운․몸)에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비방이다. 삼법은 느낌을 그치고(지감법-止感法) 숨을 고루며(조식법-調息法) 부딪힘을 금하는(금촉법-禁觸法) 세 가지의 방법이다. 더욱이 정충기장신명(精充氣壯神明)이라는 중국 도교의 조식적(調息的) 수련과 성명쌍수(性命雙修)라는 중국 도교의 음양적 수행이 아닌, 삼법병수(三法竝修)라는 삼일철학적 수행원리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한편 삼법수행을 삶과 연관시키면 인간의 가치 문제와 직결된다. 가치론이란 인간 삶의 가치에 대한 물음인데, 주로 지(知)를 통한 가치 판단인 진위(眞僞) 문제와, 정(情)을 통한 가치 판단인 미추(美醜) 문제, 그리고 의(意)를 통한 가치 판단인 선악(善惡)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지적(知的) 능력․감성적(感性的) 능력․행위적(行爲的) 능력이 더불어 요구되는 부분이 가치론이다. 인식론과 존재론도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는 가치론을 목적으로 한다. 가치야말로 우리 삶을 열어주고 인도하는 철학 세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행과 인간의 가치의 밀접함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삼법수행이라는 수행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얻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즉 육신적 가치, 윤리적 가치, 예술적 가치, 사회적 가치, 종교적 가치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육신적 가치는 곳 인간의 건강과 직결된다. 삼법수행이 지향하는 마음공부․숨공부․몸공부를 통해, 인간의 순환계․신경계․홀몬계 등, 의학적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 더욱이 알파파 훈련이나 엔돌핀의 활성화를 통한 삼법수행의 자기치유 효험 역시 인간 건강의 중요한 수단이다.

윤리적 가치는 삼법수행의 마음공부와 직결된다. 마음공부는 선복악화(善福惡禍)라는 인간 보편적 가치 기준을 통해 무선악(無善惡)을 지향하는 것이다. 선악이야말로 인간 삶의 가치에 최고의 기준이고 삼법수행의 궁극적 목적이 홍익인간임을 생각해 본다면,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도 자명해진다. 즉 착하게 홍익인간하며 사는 것이 최고의 윤리적 삶이다.

다음으로 예술적 가치 역시 인간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깨달음과 예술은 둘이 아니다. 선다일여(禪茶一如)나 악도불이(樂道不二)를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외쳤던 '과학과 예술과 종교는 하나다'라는 주장 역시 이러한 사고에서 가능하다. 수행을 통한 직관이나 각(覺)은 과학이나 논리로 설명하기 힘들다. 삼법수행은 예술의 자양분이라 할 무한한 감수성과 창조성의 수단임을 염두해 두자.

삼법수행의 사회적 가치는 그 수행의 목적과 부합된다. 삼법수행의 목적은 홍익인간이다. 개인적 깨달음[性通]을 넘어 사회적 깨달음[功完]을 지향함이 홍익인간이며, 삼법수행의 목적 역시 그것[性通功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삼법수행은 결코 소아적․이기적 득도(得道)를 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로장생이나 이적염력(異蹟念力)을 추구하지 않는다. 나를 넘어 가족, 사회, 국가, 그리고 인류의 각성을 지향함이 삼법수행이다.

마지막으로 삼법수행의 종교적 가치 또한 중요한 요소다. 종교적 가치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민족의 일생을 보면 ‘돌아감의 미학’과 밀접하다. 죽는 것을 ‘돌아갔다’고 표현하는 의미 속에는, ‘삼신의 점지로 삼가르고 태어나 다시 삼신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전래 신교(神敎)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삼법수행의 차원에서 ‘돌아감의 미학’을 재고한다면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찾아가는 것’이다. 삼일신고에 나오는 ‘자성구자강재이뇌(自性求子降在爾腦)’가 그에 대한 근거다. 더불어 임아상이 풀이한 대로 하늘집[天宮]이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도 있고 인간에도 있다는 이치도 이러한 사고에서 이해될 수 있다.

 

2013년도 1월 국학강좌 안내

1. 일시 : 2013년 1월 16일(수요일) 오후 7시

2. 주제 : 도마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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