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관리자 email gukhak@gukhak.org
작 성 일 2012-11-23 16:51:24 조 회 수 1529
제 목 국학과 국어
내 용

 

國學國語 - 國語史中心으로

 

1. 言語學槪念

언어학이란 말 그대로 인간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언어학의 대상이 되는 인간 언어에 대한 몇 가지의 정의를 보면, 상징기호에 의한 인간의 내적 심리를 전달하는 측면을 강조한 것과, 언어의 사회적 기능을 내세운 것, 인간의 현실 표상기능을 언어가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의사소통의사전달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측면이다. 특히 촘스키는 이제부터 언어를 문장들의 유무한적 집합으로 간주할 것이며, 이 문장 하나하나는 길이가 유한하며 유한집합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강조하면서, 수학적이고 형식적인 관점, 언어의 생산적 특성을 내세웠다.

언어학은 연구의 대상과 방법에 따라 일반언어학과 개별언어학으로 나눠 이해할 수 있다. 일반언어학은 세계 모든 언어에 공통되는 속성을 찾고자 하는 학문이고, 개별언어학은 특정한 언어를 골라 그 언어의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즉 국어학영어학중국어학독어학 등등이 개별언어학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학이란, 개별언어학으로로서의 국어학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국어학 연구의 태도에 있어서도 개별성과 보편성이 양축을 이룰 때에 바람직한 결과를 끌어 낼 수 있다. 개별성 없이는 보편성도 있을 수 없으며, 보편성 없이는 개별성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학의 일반 원리도 감아하면서, 우리 국어의 특성 파악에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언어학의 법주는 넓다. 언어의 구조적 측면에서 본다면, 음운론형태론통사론의미론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어족(語族)에 속하는 다양한 언어 연구의 구분과 함께, 역사적 단계에서의 연구로 보면 고대중세근대현대의 언어 연구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개별언어학으로서의 우리의 언어학, 그 중에서도 우리의 언어사 즉 국어사를 중심으로 더듬고자 한다. 국어사란 국어만을 대상으로 하는 통시언어학으로서,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진화하고 변화발전 하는 우리말의 양상을 대상으로 연구한 체계적 서술이다.

문제는 우리의 국어사를 정리함에도 다시 부딪치는 것이 문헌접근의 한계다. 국어사의 대상이 되는 문헌이, 늘 서지학적 판단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혹은 인정되는 문헌으로는 우리 고대국어의 자료들을 발견하기가 무척 힘들다. 또한 정음이 정리된 시기 이전의 문헌을 통해 정음 이전의 우리 문자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도 많은 제약이 따른다.

국학과 국어를 밝힘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정체성을 토대로 한 우리 문자와 국어사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등장 이전의 문자는 쉽게 언급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특히 체계적인 접근은 근본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국어사 역시 신교사서 외에는 고대국어를 밝힐 만한 자료가 없다.

 

2. 國語史觀點

 

우리 국어의 계통에 대해서는, 이기문이 1961년 발간한 국어사개설(國語史槪說)1967년 정리한 한국어형성사(韓國語形成史)의 줄기가 큰 수정 없이 수용되고 있다. 이기문은 이 글을 통해 우랄알타이어계통설과 알타이어계통설을 소개하고, 우리가 알타이계통에 속한다는 구조적 특징을. 모음조화가 있다 어두의 자음조직이 제한을 받고 있다 접두사가 없고 단어는 어근으로 시작한다 모음교체가 없다 자음교체가 없다 관계대명사 및 접속사가 없다 동명사(動名詞)가 많고 또 큰 중요성을 지닌다 부동사converb가 있다 등의 8가지로 말했다.

특히 핀란드의 람스테드가 1928년 이후에 발표한 일련의 연구들을 높이 평가 했다. 이기문은 이러한 람스테드의 연구를, 한국어와 알타이 제어(諸語)의 진정한 비교를 통하여 이들의 친족관계를 증명하려는 진지한 노력의 소산으로 본 것이다.

이기문은 이러한 전제 위에서, 알타이제어를 검토하고 알타이제어의 친족관계를 살폈다. 또한 그 비교연구의 성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韓國語核心部에서 알타이계 要素들 이외에, 이에 匹敵할 만한 어떤 다른 系統要素들이 확인될 可望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한국어에는 아직 未知의 요소가 많이 있다. 이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의 存在가 한국어 핵심부의 알타이계통을 威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우리는, 한국어가 알타이諸語親族關係에 있음을 결론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이기문은 국어의 형성 단계를 부여계 제어로부터 한계(韓系) 제어고구려어백제어신라어중세국어로 나누어 설명했다. 특히 이기문은 부여계 계통의 북방어와 한계(韓系) 계통의 남방어로 나누고, 각각 그 원시어가 되는 원시부여어와 원시한어를 상정하여 보여한조어(夫餘韓祖語)라 명명하였다. 즉 북방어로서는 부여조어(夫餘祖語)원시부여어고구려어로 이어지고, 남방어로서는 한조어(韓祖語)원시한어백제어신라어(신라어를 계승한)중세국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국어는 언어의 계통상 국어는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인식은 알타이어 학자인 핀란드의 람스테드가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몽골어, 만주-퉁구스어, 투르크어에다가 우리 국어를 첨가시키면서 알려져 온 견해이다. 이어 포페, 스트리트, 이기문을 중심으로 하여 국어가 알타이 어족에 속한다는 견해가 흔들림 없이 인정되어 왔다.

한편 김방한이 제시한 가설로, 한국어 기층에 원시 한반도어라고 부르는 정체불명의 비알타이어 기층이 있고, 그 위에 알타이어계 요소가 덮어지거나, 그 반대로 알타이 기층에 비알타이어가 덮어져서 한국어의 뼈대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그는 원시 한반도어와 계통적 친연성이 있는 언어로 편의상 고시베리아어족으로 분류되어 있는 니브히어(길랴크어)를 지목하였다.

또한 김수경은 원시조선어설을 주장했다. 우리민족이 전기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실로 수십 년 간을 이 땅의 주인공으로 살아오면서, 고유한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원시문화를 창조하여 발전시켜온 집단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그 원시조선어가 결코 고립적으로 영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 언어와 끊임없이 접촉교류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지금의 우리말과 이웃의 언어들(만주퉁구스몽골투르크어군고아시아諸語일본열도어 등)과 많은 유사점과 공통점이 발견된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주장은 류열의 주장과도 흡사하다. 류열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같은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그 시대의 이두(吏讀) 사용을 통해 증명하면서,

 

한자에 의한 이두식 표기는 이미 고조선시기부터 모색되고 시도되었으며, 고구려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발전되었고 백제와 신라에서까지 널리 쓰이게 되어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라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원시조선어설과 맥을 같이 했다. 이밖에도 헐버트는, 고대 한반도 남부의 삼한족이 한반도의 북쪽 민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전제하면서, 우리말의 남방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기존의 우리 국어사에 대한 정리를 본다면 기존의 우리 역사 평가와 맞물려 흐른다. 이기문은 우리의 국어사를 고대국어와 전기중세국어, 후기중세국어, 근대국어 그리고 현대국어로 나누어 설명했다. 여기서 훈민정음(후기중세국어)이 나타나기 이전인 고대국어는 중국 삼국지』「위지동인전의 기록과 612년 임신서기석의 기록, 629양서』「백제전의 기록과 888삼대목의 향찰표기, 1285년경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향가 14수 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전기중세국어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는 계림유사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손목(孫穆)12세기 초(1103-1104)에 편찬한 책으로, 365개의 고려어를 한자의 음을 이용하여 기록하고 있어 전기 중세 국어(신라어)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1417향약구급방중간본을 꼽을 수 있다. 향약구급방은 민간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로 급한 병을 구하는 방문(方文)을 모아놓은 것으로, 약재나 병의 한어명(漢語名)에 해당하는 우리말[鄕名]을 차자(借字)로 기록하여 민간인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향명(鄕名)13세기 중엽의 국어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국어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3. 알타이어의 再考察

 

문제는 알타이어로 지칭되는 알타이 지역에 대한 문화성에 있다. 즉 현금 연구되고 있는 여러 업적을 보면, 알타이문화가 오히려 흥안령 혹은 요하지역에서 건너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알타이 지역은 신강(新疆)의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고, 서북쪽은 카자흐스탄과 북쪽은 러시아와 동북부는 몽골리아와 접해있다. 알타이 지역은 한나라 때 흉노족(훈제국), 당나라 때는 돌궐족(투르크제국), 송나라 때는 서요, 원나라 때는 몽골의 오고타이 부족의 영토에 속해 있었으며, 청나라 때는 오이라트 몽고족과 카작족의 유목지 였었다.

국어를 알타이 어족의 일원으로 보고 이 어족 안에서의 위치에 대한 가설을 세워 본 것은 람스테드Ramstedt와 포프Poppe였다. 람스테드는 알타이 조어가 말해 진 지역, 즉 알타이 어족의 고토는 흥안령(興安嶺) 산맥 근처였으리라 추측하고 나아가서 그 시기에는 퉁그스 족과 한족의 조상은 동방, 즉 현재의 만주 방면에 살았고, 흥안령 산맥 서방에는 몽고족과 터키족의 조상이 살았으며, 한편 몽고족과 퉁그스 족의 조상은 북방에, 터키족과 한족의 조상은 남방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한편 새로이 주장되는 동북아시어어족설 또한 주목을 끄는 부분이다. 즉 몽골어와 터키어의 관계가 차용관계라는 것은 인정이 되지만, 이것이 만주어와 몽골어, 한국어의 관계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즉 만주어와 몽골어, 한국어는 서로 뗄 수 없는 같은 계통의 언어라고 주장하는 관점이다. 우선 이들이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언어군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가칭 동북아시아어족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그 개별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몽골, 만주,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같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으며, 인종적으로도 몽골반점이 있고, 체형인류학적 형질이 유사하게 나타나며, 고고학 유물이 유사하고, 민속학적 풍속도 매우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측면을 중시했다. 따라서 이들은 언어도 같은 계통의 언어에서 갈라졌을 것이라는 가설이 가능하기에, ‘동북아시아어족’(North-East Asis family)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이들 3개 언어를 집중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자에 관심을 끄는 것은 스타로스틴의 연구다. 스타로스틴의 논리대로라면 알타이어의 고향을 중국의 앙소문화(황하문명) 대신 동북부의 문화중심이었던 요하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 사용된 언어가 분화하여 몽골-터키어, 퉁구스-만주어, 한국어-일본어 등이 되었음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는 니콜라스 디 코스모와 재미 중국학자 주학연(朱學淵)의 논리를 끌어올 수 있다. 즉 중국 북부에 사는 유목민들의 영역이 요하요역 뿐만이 아니라, 만리장성보다 훨씬 남쪽인 황하지역까지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신강성에까지 이르렀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디 코스모는, 이곳 북방 사람들이 빙하가 끝나면서 북쪽에서 내려와 기장 등을 재배하고, 돼지를 사육했으며, 토기를 제작하면 문명을 일구었다고 했다. 그리고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민들이 알타이어 외에 다른 언어를 썼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요녕성과 산동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DNA 유전자 분포가 한국인일본인과 거의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해안문명(요하문명)을 만든 사람들은 우리와 유전적으로 같고, 같은 문화를 가졌으며, 중국북부에 가장 먼저 문화를 만든 집단이었다.

이러한 판단은 2009년 미국 과학잡지인 Science에 두 번에 걸쳐 다루어진 주제로도 확인된다. 이 기사는 중국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소개하면서, 요하유역에서 가장 오래된 흥륭와문화와 자산문화와 함께 초기 앙소문화인 배리강문화, 그리고 내몽골자치주와 황하 중부의 오르도스문화 등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 기사의 요점은, 중국문명이 황하부근에서 시작되어 확대되어 나갔다는 과거 황하문명단일기원론은 폐기되었다는 것과, 현재 중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발생한 문화들이 긴 역사를 두고 상호작용하며 형성되었다는 시각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동북지방 특히 요하문명이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음을 강조한 내용이다.

문명이 시작하는 곳에는 반드시 문자가 함께 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황하문명에는 갑골문이 있었으며, 이집트문명에는 히에로글리프(hieroglyph神聖文字)라는 상형문자(그림문자)가 존재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문명에는 수메르문자인 쐐기문자(cuneiform楔形文字)가 나타났으며, 인더스문명에는 인더스문자(상형문자, 구라자트문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발해문명(요하문명)과 함께 가림토문자를 떠올리게 됨은 자연스런 논리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알타이지역 어느 곳을 더듬어도 발해문명(요하문명)에 앞서는 것이 없다. 즉 알타이어의 고향이 바로 요하지역임을 말하는 것이다. 람스테드도 당시에 발해문명을 경험했더라면, 알타이어의 고향을 흥안령이라는 막연한 비정이 아니라, 요하문명이라고 단언했을 것이다.

 

4. 訓民正音 創製說에 대한 是非

 

문제는 훈민정음에 대한 가치규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기존의 통설처럼 세종이 창제한 문자로 정리가 된다면, 우리의 문자발달사 또한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다. 훈민정음 이전의 문자의 존재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훈민정음 친제설(親製說)이나 비친제설(非親製說) 어떤 경우든 마찬가지다. 즉 비친제설(非親製說)의 명제설(命製說:세종이 학자들에게 명하여 만들게 하였다는 것)이나 협찬설(協贊說:세종이 학자들의 협력을 얻어 만들었다는 것)의 경우도 차이가 없다.

훈민정음 등장 이전에, 한자의 차용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한 인물은 권덕규다. 그는 1923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에서 삼황내문(三皇內文) 신지비사문(神誌秘詞文) 왕문문(王文文) 수궁내문(手宮內文) 남해도지면암석각문(南海島地面巖石刻文) 각목자(刻木字) 고구려문자 백제문자 발해문자 고려문자 등의 예를 들어 고유문자설을 새롭게 주장했다. 또한 1938년 김윤경은 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에서 이두향찰구결을 이에 첨가시켰다. 이어 이탁(李鐸)연암집(燕巖集)몽계필담(夢溪筆談)그리고 해동역사(海東譯史)등의 기록을 들어 탐라문자설(耽羅文字說)을 내세우기도 했다. 한편 1947년 권상로는 조선문학사에서 고대에 우리의 문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글월만은 분명히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도 했다. 고유문자설은 신교문헌(神敎文獻)을 근거로 한 것이 많으며, 비교적 단편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역시 신교문헌의 역사적 수난과 무관치 않은 것이다.

 

5. 가림토文字岩刻書

 

문제는 가림토문자나 삼황내문신지비사문왕문문수궁내문남해도지면암석각문각목자고구려문자백제문자발해문자고려문자 등에 대한 구명이, 기존의 서지적 접근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단순히 증거조작이나 증거불충분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漢字借用 外에 고려 이전에 固有文字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는 科學的 論證이 서지 않는 한 推論에 그칠 뿐이다라는 판단을, 모면키 어렵다.

다시 신교사서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 태백일사에 의하면 신시시대에는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 때는 투전목(鬪佃目), 부여시대에서는 서산(書算)이 있었고 또 우서(雨書), 용서(龍書), 녹도문(鹿圖文) 들이 있었으며 단군 때에는 가림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림토문자 이전에 이미 여러 단계의 문자가 나온다. 산목이란 나무로 계산을 하는 방법으로써, 셈에 사용하는 나뭇가지를 주()산목(算木)산가지 등으로 부르고, 셈하는 법을 주산(籌算)산목산(算木算)산가지셈이라고 한다. 투전목이란 그림을 목판에 그려 놀이를 즐기는 것이며, 서산이란 한문책을 읽을 때 읽은 횟수를 세는 종이 계산기로 산표(算表)’ ‘서수(書數)’라고도 불렀고, 우서란 비오는 모습을 형상한 상형문자체로 보인다.

한편 용서란 복희가 한자의 뿌리가 되는 육서(六書)의 원리를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그 자체인 듯하다. 역사기록 의하면 그는 용봉(龍鳳)을 토템으로 하여 관명을 지었다고 하며 새로 만든 문자를 용서(龍書)라고 했다고 전한다. 참고로 후대인 황제헌원 때 창힐이라는 인물이 새 발자국 모양을 따서 새발글자[鳥跡書]를 만들었는다고 하며, 현재 그의 고향 섬서성 백수현 사관촌에 그 비석이 남아있다. 즉 복희씨의 용서와 창힐의 조적서 등이 후대에 갑골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금문연구자인 낙빈기(駱賓基)가 금문의 해석을 통해 신농과 황제 등 삼황오제시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이것이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였음을 고증한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태백일사의 내용이 더욱 신빙성을 갖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전래 신교문헌에서도, 단군왕검이 무리들에게 가르칠 때 풍백은 동해에서 푸른돌[靑石]을 캐오고 신지는 삼일신고를 그 청석에 새겼다는 기록과 더불어, 은나라 자작인 기자 서여가 단군조선에 망명하여 사사인 왕수긍에게 부탁하여 삼일신고를 단목판에 은문(殷文)으로 옮겨 적게 하여 읽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러한 고문자에 대한 흔적 역시 신교문헌에는 간헐적이지만 나타나고 있다. 경남 남해군 상주해수욕장 기슭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고문자 금석문(金石文)이 있다. 이 암각문에 대한 기록은,

 

南海縣 郎河里岩壁神市古刻이 있다.”

南海縣 郎河里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 神市古刻이 있다. 그 글에 桓雄이 사냥을 나가서 三神에게 祭祀를 드리다라고 했다.”

崔致遠이 일찍이 神誌가 새겨진 옛 비석을 찾아(중략)郎河里岩刻이 그 실제의 자취다.”

 

등과 같이 여러 문헌(神誌秘詞』『大辯說』『三聖記())에 나타난다. 특히 조선조의 이맥은, “소문을 듣건데, 南海島 郎河里의 계곡과 鏡珀湖 先春嶺烏蘇里 바깥의 돌 사이에서 언젠가 彫刻을 발견하였는데, 梵字도 아니고 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사리 解讀하지 못한다.”는 내용과 함께,日本紀伊에는 徐市이라는 題名刻字가 있다.伊國神宮에는 서불의 묘지와 사당이 있다. 到着紀念으로 남겨논 彫刻이 있다고 한다. 徐福은 일명 徐市로서, 이 서로 혼동된 것이다.”라고 적었다.

조선조의 모든 비석의 글을 종합하여 놓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攬)에도 이 암각을 고문자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학자인 오경석도 이것을 초기 한자(漢字)인 상형문자로 보아 서시기배(徐市起拜) 즉 서시(徐市)가 일어나서 솟아오르는 태양에 예를 드렸다는 말을 새긴 것으로 보았고, 그 후 정인보는 그의 저서 조선사연구에서 이 암각을 임검 或 將上大人山行(狩獵) 길을 나서 山獸, 飛鳥射獲하고 魚類를 넘어가 를 꽂다는 내용의 고문으로 해석하였다.

()나 진() 등의 국가들에서도 횡서(橫書)결승(結繩)계목(鍥木)을 혼용하였다는 말이나, 고구려가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하였다는 기록, 또 진()나라 때의 정막(程邈)이 숙신에 사신으로 가서 얻은 왕문(王文)의 예법(隸法)과 한수(漢水)에 가서 얻은 것을 약간 고쳐 팔분(八分, 八分體)을 만들었다는 기록, 그리고 왕문(王文)의 후손인 왕차중(王次仲)이 해서(楷書)를 만들었다는 내용 등에서도 고대에 문자가 존재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진()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지금의 한자 역시 동이가 사용한 글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한글을 비롯한 일본어 또한 과거로부터 이어온 언어를 토대로 정리된 것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6. 訓民正音起源

 

이것은 훈민정음 등장 당시의 설왕설래로도 짐작할 수 있다. 즉 훈민정음을 창작이 아닌 옛 글자의 모방으로 추단할 수 있다. 먼저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서(解例序)에 나오는 우리 임금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 보이시면서 이름 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해서 만들되 글자는 고전을 본뜨고(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라고 한 구절이나, 세종실록2512월조에는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제작하였는데,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是月 上親製諺文 二十八字 基字倣古篆)”라고 기록된 것이 그것이다.

또한 세종26220일에 집현전 부재학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언문은 다 옛 글자를 근본으로 했으므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 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 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바가 없사옵니다.(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라는 내용뿐만 아니라, 18세기 신경준은 우리나라에는 옛날에 俗用文字가 있었으나 그 수가 갖추어지지 않고 그 모양도 정리되지 않아, 어떤 말을 형용한다거나 어떤 용처에 사용하기에는 부족하였다.(東方舊有俗用文字 而其數不備 其形無法 不足以形一方之言 而備一方之用也)”라는 기록을 적고 있다.

이러한 정황에서 본다면 훈민정음은 분명한 모방이다. 만약 모방이라면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여러 가지 문자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을 참고했을까. 가림토문이 가장 유력하다. 그 모양의 비교로도 확실하다.

가림토문 38자가 그대로 실려 있는 고려 말 공민왕 때 행촌 이암이 지은 단군세기는 훈민정음 반포(1446)보다 불과 83년 전에 지은 책임을 볼 때, 앞의 내용이 싑게 이해가 간다. 또 훈민정음 반포 74년 후인 1520년에 지은 이맥의 태백일사는 가림토문이 실려 있는 앞의 단군세기를 인용하여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훈민정음 창제당시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문을 참고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훈민정음이 가림토문자와 같이 그 제자의 배경이 천문학이라는 점도 주목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도 가림토문자와 모양이 거의 흡사한 문자가 존재 한다는 것이다. 신대문자(神代文字)가 그것이다. 아히루(阿比留)문자라고도 불리우는 이 문자는, 일본에서 신대문자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신대문자가 천조대신이 강림할 때부터 있었던 일본 고유의 글자이며, 한글은 이것을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가 그 주창자다. 그러나 오늘날 신대문자는 일본이나 한국 학계에서 모두 부정되고 있다. 특히 일본국어국문학회에서도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즉, 한글을 일본 국학학자들이 조작하고 짜집기하여 전쟁 이전까지 인정해왔다고 자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세신궁에도 신대문자라고 추정되는 고대문자가 있는데, 한글과 무척 비슷하며, ‘아타노거울에 새겨진 신대문자를 비롯해서 5백여 점 이상의 신대문자가 존재하고 있다. 또한 708년에 세워진 비석에 신대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은 나라시대 이전 즉, 5-6세기부터 신대문자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들이 아히루문자라 부르는 이 문자는 일본의 본토에 지금도 남아 있는데 오히려 숨기기에 급급한 느낌을 주고 있다.

 

7. 國學國語

 

문제는 우리의 국어학을 논함에 있어서도 국학적 안목을 어떻게 접맥시키느냐가 관건이다. 공교롭게도 훈민정음 이전의 문자에 대한 기록을 담은 서적도 모두 신교서적이다. 이 역시 가치관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천대 받았던 국학의 위상으로 보면 우리 국어의 변천 역시 비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최만리 부류들이 올린 다음 상소의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 우리나라는 조종조 이래로 지성으로 사대(事大)하고,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수하여 지금 동문동궤(同文同軌)의 때를 당하옵는데 언문을 창작하신 것을 듣고 봄에 이상히 여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중략)만약 중국에 흘러가서 혹시 옳지 못함을 의논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어찌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 예로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가 비록 다르나, 방언으로 말미암아 따로이 문자를 만든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의 무리들이 각각 문자를 가지고 있으나, 이는 모두 이적의 일일뿐 족이 말할것이 못되옵니다. ()에 이르기를 오랑캐를 중화(中華)로 변()케 한다고는 하였으되, 중화로 하여금 오랑캐로 변케 한다는 말은 듣지 못 하였습니다.(중략)이제 별도의 언문을 지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夷狄)과 함께하니, 이야말로 소합(蘇合)의 향()을 버리고 당랑(螳螂)의 환()을 취하는 것이라, 어찌 문명의 큰 누()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 신라 설총의 이두(吏讀)는 비록 비루(鄙陋)하고 속() 된다고 하더라도 모두 중국에서 통용하는 글자를 빌려서 어조사에 쓰는 까닭에 문자(文字)와 더불어 본시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옵니다.(중략)이와 같이 하여 수십 년이 지낸 다음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반드시 적을 것이오며 비록 언문으로서 관공서의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온들 성현의 한자를 알지 못함은 곧 배우지 못함이 담장을 면대한 것과 같아,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데 어두울 것이오니 부질없이 언문에 힘쓴들 장차 무엇에 쓰겠나이까? 우리나라는 누대(累代)로 쌓여온 우문(右文)의 풍화가 점차 땅을 쓴 듯 없어져 버릴지 두렵나이다. 앞서 써 온 이두는 비록 문자에 벗어남이 없음에도 유식자들은 아직도 이것을 비루히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이것을 바꾸고자 생각하거늘 하물며 언문은 한자와는 조금도 상관함이 없는 것이며 시장거리의 속된 말만을 쓰는 것임에 있어서야(더 무엇을 말하겠나이까)(후략)

. (전략)여러 제왕에게 물어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시옵고, 백세에 성인이 나타나셔도 의심스러운바가 없은 연후에야 이에 가히 행하실 것이옵나이다.(후략)

 

누구든 말을 한다. 한글이야말로 그 세계성과 과학성이 남다르다고. 21세기 우리가 정보화시대의 선진국 지위를 차지함에 한글의 공헌이 지대하다고도 한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이 정보화 속도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음은, 다름 아닌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글의 우수성과 편리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 국학과 국어학의 일차적 과제도 자명해진다. 즉 세계문화의 보물이라 할 한글의 역사적철학적 의미를 구명하는 일이다. 한글은 결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기형문화(畸形文化)가 아니다. 거슬러 구결이두고려문자발해문자향찰백제문자고구려문자각목문왕문문갑골문가림토신전(神篆)화서(花書鬪佃目)용서(龍書)산목(算木)신지녹서(神誌鹿書) , 재구(再構)해 가면 수많은 흔적들이 널려 있다. 그 자취 속에 한글의 모형(母型)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 알타이어의 고향 발해문명(요하문명)까지 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국어사와 문자발달사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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