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관리자 email gukhak@gukhak.org
작 성 일 2012-11-23 16:49:49 조 회 수 1199
제 목 국학과 역사(3)-우리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2)
내 용

 

國學歷史(3)- 우리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2)

 

1. 傳來史觀

 

역사학이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러 활동에서 시간적 및 공간적으로 이루어지는 발전의 모든 사실을 심리적인 인과관계 및 그때그때의 사회적 가치와 관련되는 인과관계에서 구명하고 또 서술하는 과학이다.”

 

에른스트 베른하임이 말하는 역사학의 의미다. 역시 사실에 대한 심리적 인과관계 및 사회적 가치의 인과관계를 중요시하고 있다. 특히 심리적 인과관계가 역사가의 가치판단의 함수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사관(史觀)과 직접 맞닿는 말이다. 즉 역사는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와 사회적 가치가 중요한 것임을 새삼 알게 된다.

따라서 국학과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도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국학적 입장에서의 역사 안목이 그것이다. 국학의 기본적인 축을 문철로 이해했다. 즉 그 나라의 어문과 역사와 철학을 중심으로 본 것이다. 또한 국학적 입장에서는 그 집단의 고유한 사상(事象)을 외면할 수 없다. 우리 국학의 본체 혹은 사유범위를 우리의 단군신앙(神敎 혹은 仙敎)과 연관된 문철로 테두리 지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국학을 통한 우리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도 신교의 정신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부르크하르트도 종교란 인간 본성의 영원하고도 파괴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욕구의 표현이다. 그것의 위대함이란, 그것이 인간의 초감각적인 모든 것을, 인간이 스스로 제시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표현한다는 점이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모든 민족과 문화시기가 하나의 거대한 또 다른 것 속에서 반영된 것이며, 또는 저 민족들과 문화시기가 영원 속으로 투영시키는 刻印과 개요이기도 하다.”라는 이해를 보였다. 즉 민족이나 문화의 가장 기존적인 원형을 종교에서 찾은 말이다.

근대 신교의 등장은 한국사학사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지난 시간 동안 불교와 유교 등 외래가치에 의해 소외되어 왔던 신교사관(神敎史觀)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것이다. 신교사관이란 역사 해석의 기준을 우리 고유의 신교정신에 입각해 이해하려는 역사관이다. 그러므로 그 특징은 신교의 교리나 교사(敎史)의 특성상, 정신사관적인 요소의 강조와 대륙사관적인 측면의 부각, 그리고 문화사관적인 방향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신교란 명칭은 이신설교(以神設敎)’에서 온 말이다. 본디 이신설교규원사화』「태시기(太始記)단군기(檀君記), 그리고 이종휘의 수산집(修山集)』「동사(東史)에 나오는 말로,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의미로써 단군신앙의 신시(神市)와 연관된 말이다. 규원사화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神市氏의 일을 듣는 사람들은 대개가 많은 의심을 한다. 지금까지도 단군만을 높이고 그 이전에 신시씨가 開天한 사실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는 근본 유래를 알지 못하고 단지 중국 책에 의지하여 仙敎黃老의 줄기에서 뻗어 나왔다고 말하나, 신령으로써 가르침을 베푸는 神敎가 신시시대부터 있어, 거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이지 못하고 있다.”

 

근대 단군신앙을 재천명한 백봉교단(白峰敎團)에서도, 전래 단군신앙이 바로 신교임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대황조의 지극한 도를 틀로 하여 일어난 본교의 종지가, 神敎라는 행위로 분명히 드러난 것은 대개 흘라사한(神敎文籍에는 단군 阿頓儉神 시대의 인물로 나타남-인용자주) 밝은이로부터 비롯되었다. 뒷날에 역사가가 본교를 仙敎라 칭하는 것이 간혹 있지만 그 연원은 오직 神敎이다."

 

정신사관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 사학사의 흐름을 유교사관불교사관 그리고 신교사관(道家史觀仙道史觀)의 흐름으로 이해해 할 수 있다. 따라서 국학적 입장에서의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과거 유교와 불교중심으로 흘러 내려오는 역사인식을 도가(道家) 또는 신교(神敎)적 역사인식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대륙사관적인 방향에서는, 그 동안 반도중심적, 즉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인식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청 등의 대륙중심의 인식으로 확산시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사관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외래사조에 침체되고 와해된 우리 고유문화, 즉 신교문화(神敎文化)를 복원하고 그것에 정체성(正體性)을 부여하는 작업과도 일치하는 작업이었다.

한편 이러한 요소들의 강조는 당연히 민족적 성향을 강하게 나타냈다. 그러므로 지난날 중화적 유교사관과 불교적 제석사관에 억눌린 신교사관을 복원하여, 타율성(他律性)정체성(停滯性)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위장된 일제 식민지학에 적극 대항하는 민족주의사학으로 자리잡아 갔다. 더욱이 이러한 역사의식은 민족적 자주성과 고유성의 고취를 통해 항일운동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것은 신교가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민족사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당위성을 얻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즉 신교에서 단군의 의미는 종교적 입장으로 본다면 창교주인 동시에 민족사의 관점에서는 국조(國祖)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교에서 단군의 위상을 올바로 세운다는 의미는 종교사와 국사를 동시에 바로 세운다는 뜻과도 일맥하는 것으로 신교사관 곧 선도사관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가령 우리의 상고사를 밝힌다는 의미와 신교(神敎)의 종교사를 구명한다는 것은 동질성의 연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상고 우리 사회의 특징이 교정일치(敎政一致)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현상은 자명해 진다.

그러므로 근대 신교의 부활체인 대종교가 중광 당시부터 단군교포명서를 통하여, 우리의 국조인 단군대황조가 신교의 개창자(開倉者)임을 밝히면서 단군대황조의 종교적 감화가 무릇 동북아 전역에 퍼졌음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유속과 가르침이 부여고구려백제발해신라고려조선, 나아가서는 요청까지도 이러한 가르침이 끊이지 않고 연면히 이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역대 강역인식에서도 신교의 경전인 신사기(神事記)를 비롯하여 단군교포명서」․「봉교과규(奉敎課規) 그리고 나철의 유시(遺詩)중광가(重光歌)등에 이미 대륙중심의 역사인식이 뚜렷하게 등장하고, 신교의 문화적 유속(遺俗)에 대해서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2. 史書亡失

 

사서란 지나온 과거를 일정한 체계로 기록한 서적이다. 관찬(官撰)이든 사찬(私撰)이든 사서 속에는 그 집단의 삶의 흔적이 녹아 흐른다. 과거 그 집단의 삶의 자취도 사서의 질과 양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침략의 뒤풀이로 반드시 분서(焚書) 혹은 탈취가 나타난다. 이것은 승리자의 기백을 세우는 최고의 세레머니ceremony로 통했다. 반면 패배자에게는 치욕적인 굴욕을 안기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전쟁은 역사를 빼앗고 뺏기는 사전(史戰)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로마의 정복전쟁 속에 행해진 수많은 만행과 스페인의 남미 침략 속에 숨겨진 집단 정체성의 파괴는 주지하는 바다. 심지어는 한 집단의 왕조 교체 때도 벌어진 것이 역사 수난이다. 중국 역시 과거의 정체성과 단절하기 위해 나타난 진시황의 분서갱유로부터, 왕조 교체마다 일어난 역사의 수난이 끊임없었다. 특히 우리는 10여 차례의 역사 수난으로 알토란같은 사서들을 모두 잃었다.

고구려 동천왕 18년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격하여 많은 사서를 소각한 것과, 백제 의자왕 당시 사자성의 함락과 함께 사고가 소진된 것, 고구려 보장왕 때 당나라 장군 이적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을 모두 탈취 한 것이 그것이다. 이어 신라 경순왕 당시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 책을 전주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멸 당할 때 방화 소각된 것과, 고려 인종 4년 금나라가 우리의 자주적 역사서를 거둬간 것을 기억한다.

고려 고종 2때는 몽고 장군으로 홀필렬에 의해 귀중한 서적이 소각되었다. 삼한고기』․『해동고기가 이때 없어졌다 한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 115부학당을 송나라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유교를 장려하고 비유교학 서적 일체를 없애버렸으며, 임진왜란 당시는 사대사고 가운데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병자호란 때도 귀중한 사서들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일제 강점 이후 일본이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군경을 동원하여 탈거, 개조 혹은 소각해 버린 것이 그것이다.

우리의 역사서를 잃어버림은 곧 우리 역사의 망각 혹은 말살과 연결된다. 더욱이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대변해주는 사서의 망실은 정체성의 붕괴와 함께 국학적 입장에서의 역사적 접근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했다. 일찍이 북애자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조선에 國史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다. 春秋를 지어 명분을 세우고綱目을 써서 正統閏統이 나뉘었는데, 춘추강목은 중국 선비의 힘으로 쓰였다. 우리나라 옛정서의 사서들은 여러 번 병화를 입어 다 흩어지고 없어졌다. 후세의 고루한 자들이 중국책에 빠져서 나라를 높이는 사대주의만이 옳은 것이라 하고 내 나라 근본을 굳건히 세워 그것을 밝게 빛낼 줄 몰랐다. 이는 등나무나 칡넝쿨이 곧게 뻗어갈 줄 모르고 얽어매기만 하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천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는 탄식을 했다. 그가 조선에 국사가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국사, 즉 신교사서들의 부재를 한탄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우리의 옛 정서를 담은 사서라 했다. 그것들이 병화에 사라져버리고 오직 중화적 가치에 함몰된 사서들이 득세함을 천박하다고까지 힐난했다. 한마디로 무역사의 시대, 망각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넋두리가 오히려 처연키만 하다. “檀君史가 전하거나 부여사가 전하거나, 고흥의 백제사가 전하거나, 이문진의 고구려사가 전하거나 거칠부의 신라사가 전하였으면, 我國今日에 지하여 民力이 팽창하여 동아에 稱覇함도 가하며, 國威震灼하여 西歐俯視함도 가하거늘, 嗚呼, 古代巨筆兵火하며 塵土하여, 一短篇도 전치 못하고 한 것은 奴輩史筆뿐이라.”고 절규한 신채호의 정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서다운 사서는 모두 없어지고 노예무리들의 사필만 남아있음이 한스럽다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서의 수난 속에서도 그 현존의 여부를 떠나, 사서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도 적지 않다 조선조 세조예종성종 때의 수서령(收書令)에 나타나는 서목을 보더라도 우리의 신교사서가 적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세조 3526(무자),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당시 팔도관찰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古朝鮮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三聖密記』『安含老元董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王居人薛業등 삼인이 기록한修撰企所1백여 권動天錄』『磨虱錄』『通天錄』『壺中錄』『地華錄』『道詵漢都讖記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면 진상하게 하라. 대신 원하는 책을 내려줄 것이다. 이를 관청과 민간, 절간과 단체에 널리 曉諭하라하였다.

또한 예종 1918(무술),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했다.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周南逸士記』『志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王居人薛業등 삼인이 기록한修撰企所1백여 권壺中錄』『地華錄』『明鏡數및 모든 천문지리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에 바치고, 外方에서는 가까운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公私賤口에게는 綿布 50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하고, 숨긴 자는 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中外에 속히 유시하라.”하였다.

그리고 성종 원년 129(무오),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수납하는 것에 대한 글을 보냈다.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周南逸士記』『志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王居人薛業등 삼인이 기록한修撰企所1백여 권壺中錄』『地華錄』『明鏡數와 무릇 천문지리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上項 明鏡數이상의 9책과 太一金鏡式』『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하였다.

수서령이란 말 그대로 책을 수거하라는 명령이다. 조선조 수서령은 비교적 신교와 관련된 역사책을 조선조 정부 차원에서 수거한 것이다. 그 서책명에 나타나는 의미가 유교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따라서 수서령의 정책 배경 역시 조선의 국시(國是)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조선의 국시는 바로 숭명의식(崇明意識)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중화질서에 어긋나는 우리의 주체의식은 쉽게 표출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국시를 거스른다는 것은 반체제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요, 더욱이 숭명(崇明)에 반한다는 것은 역천(逆天)의 의미로까지 해석되었다. 그렇다면 자명해진다. 수서령에 포함된 책들이 비교적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고사 혹은 신교가치를 담은 당대의 반체제 서적일 것이다. 숨기면 목을 베어 죽이겠다는(斬刑) 극단의 방법까지 동원한 이유가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조 수서령에는 안 나타나지만, 고구려의 유기(留記)100권이나 신집(新集), 백제의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등도 전하지 않는다. 또한 신지비사(神誌秘詞)』『신지비사역술(神誌秘詞譯述)』『조대기(朝代記)』『진역유기(震域遺記)』『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대변경(大辯經[])』『신선전(神仙傳)』『해동비사(海東秘詞)』『해동비록(海東秘錄)』『단군기(檀君記)』『해동고기(海東古記)』『선사(仙史)등도 제목이 익숙한 책들이다. 모두 신교적 내음이 물씬 풍기는 책들이다.

더욱이 전해오면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책들도 있다. 안함로원동중의 삼성기전과 이암의 단군세기, 그리고 이맥의 태백일사와 북애자의 규원사화, 최치원의 제왕연대력등등이 그것이다. 대부분이 신교와 관련된 사서들이다. 천여 년에서 몇 백년의 세월을 소외의 시간으로 보내온 책들이다. 과거에는 체제에 거스르는 이유로 소외를 받고, 이 시대의 소외 명분은 서지학적 이유다. 일부에서는 재야사서로 내몰기도 한다. 그러나 신교사서는 비기득권사서다. 우리의 정체성의 붕괴와 더불어 늘 탄압과 인멸의 대상이었다. 기득권을 가진 외래 사관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그 탄압과 인멸의 이유도 오직 하나다. 우리의 고유성을 대변하는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까닭에 신채호는 국사를 국민의 거울이라고 말하면서, 국사가 없음은 노예와 다름없음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國史는 국민의 明鏡이라. 此 明鏡이 없으면 국민이 무엇을 쫓아 선조의 참모습을 우러러보며, 이 명경이 없으면 국민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自家姸醜하며, 이 명경이 없으면 국민이 무엇으로써 國粹를 보전하여 自尊할 줄을 알며, 이 명경이 없으면 국민이 무엇으로써 타인과 비교할 줄을 알겠는가. 폐일언하고 국사가 있어야 국민이 愛祖心도 유할지며, 愛國心도 유할지며, 독립심도 유할지며, 진취심도 유할지라.”

 

3. 檀君記錄

 

이러한 수난 속에서도 우리의 역사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없지 않았다. 신교사관의 중심에 있는 단군에 대한 기록과 관심이 그것이다. 현존하는 사서 가운데 우리의 상고사 관련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2종류의삼성기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가 찬한 것과 행적이 불명확한 원동중이 찬한 것이라 전한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단군세기, 단군 관련 기록으로는 중요한 전거로써 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의 일들을 편년체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행촌 이암(李嵓:1297-1364)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암은 충선왕 때 도관정랑(都官正郞)을 역임했고 충혜왕 때에는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을 지냈으며 공민왕 때에는 문하시중까지도 올랐던 인물이다. 특히 이암은 단군의 역사적 기록뿐만 아니라 태백진훈(太白眞訓)이라고 하는 신교와 관련된 교리서도 남겼다.

조선 초기를 주도한 세력 역시 단군론을 주도한 정통단군론자들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세조실록에서 엿볼 수 있는 정통단군론자들의 사서 들이 유가의 그것보다 양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에서 확인되는 부분이다. 조선 초기에 단군론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특히 세조가 정통단군론자들의 단군 관련 서적을 수집하려는 의도는 무엇을 암시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조선초기 단군론의 의미를 살펴보는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세조는 단군 중심의 동국통감을 편찬하기 위해 당시에 존재했던 사서를 수집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세조가 수집하려고 했던 조선 초기의 단군관계 사서들은 단군론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면에서 세조의 단군에 대 한 천착의 정도가 어떠하였는지가 확인된다.

그러므로 세조는 동국사략(東國史略)』․『삼국사』․『고려사등에 나타나는 사서로서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조가 상고사를 단군중심으로 재구성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동국통감에 투영하려고 하였다는 지적은 양성지라는 인물을 총애한 세조의 성향으로 보아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세조의 단군에 대한 열정은 일정하게 정치적 의도를 함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말하자면 군신의 조화를 추구하면서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려고 한 신하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주의 위엄을 잘 드러내고 있는 단군에 대한 기록을 사서에 게재함으로써 그 권위를 강화시키려고 하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초기의 단군론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이론적 기반으로 작동되었으며, 동시에 사대성이 농후한 조선 성리학의 폐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이론으로 작동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단군론은 백성을 기반으로 존재하였다는 측면에서 백성과의 의사소통을 강화함으로써 관료들을 통제하려는 세조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15세기말 사림세력이 등장하면서 단군세력의 존재는 성리학적 기반 위에 구축된 집권층에게 위협적인 요소로 대두되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단군론이 강조되면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건설하는데 단군세력과, 성리학을 근간으로 구축된 조선의 지배세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세력은 일정하게 이들 단군론자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군론자들은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으므로 실질적인 위협세력으로 둥장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모화적(慕華的) 성향의 집권세력은 사서에서 단군을 배제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단군론을 급속하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결국, 단군론자들은 청학집에 나타나듯이 산속으로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4. 神敎史觀

 

한편 양란(兩亂) 이후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이었던 성리학의 한계가 노정되고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일면서, 단군의식에 대한 강조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단군의식에 대한 강조가 기존의 정치세력에서 소외되었던 소론(小論)남인(南人) 계열의 지식인들이나, 성리학적 사상적 경험을 달리하는 신교적(神敎的) 지식인들에 의해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특히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동사(東事)라는 저술을 통하여, 종래 기자중심의 역사인식을 단군중심의 역사인식으로 바꾸어 놓았고, 단군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대륙적 역사인식의 틀을 주장하기도 했다. 허목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후일 성호학파(星湖學派)를 중심으로 한 남인계열의 실학자들과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허목의 역사관 역시 성리학적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조선조 숙종조인 1675년에 만들어졌다는 규원사화야말로 단군과 관련된 중요한 기록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성리학적 성향을 완전히 벗어버린 단군 중심의 사서라는 점과, 현존하는 조선조의 기록 중 단군에 관한 체계적인 내용을 편년체의 형식으로 묶어놓은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북애자(北崖子)의 저술로 알려진 이 책에서는 단군기라는 부분을 통하여 1세 단군 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의 행적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규원사화에서는 단군신앙의 원류인 신교의 기원과 흐름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규원사화의 등장 배경을 간단히 살피면 이렇다. 단군에 대한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차있던 조선초기의 단군세력은 세조대를 정점으로 서서히 지하로 숨어들어갔다. 이러한 와중에서 중종 때 이맥(李陌), 선조 때 조여적(趙汝籍)을 거쳐 숙종대에 이르러 북애가 본격적인 단군론을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북애는 암굴에 비장된 단군관련 사서인 진역유기라는 책을 바탕으로 규원사화를 저술했다 한다. 또한 진역유기는 북애의 주장대로 이명(李茗)이라는 사람이 조대기라는 책을 저본 쓴 사서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명은 고려 공민왕대의 인물로 호는 청평(淸平)이며, 이암(李嵓) · 범장(范樟)과 함께 천보산(天寶山)의 태소암(太素庵)에서 고기류(古記類)의 사서를 보고 진역유기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북애는 규원사화를 통해 유교에서 본질적으로 벗어나지 못한 허목 등의 탈성리학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성리학의 본질적 한계성을 냉철하게 지적하면서, 요동치는 국제질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본질적인 변혁이 필요함을 주창하였다. 요컨대 성리학에 편승한 단군론이 아니라, '본성(本性)' 에 입각한 단군론을 제시하였다는 면에서 유학을 근간으로 한 단군론자들과 차원이 다른 사상적 혁명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서인계(西人係)의 유력한 가문 출신인 홍만종(洪萬宗:1643-1725) 역시 사상적 측면에서의 단군문화 창도를 적극적으로 주창한 인물이었다. 그는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이란 저술을 통해 단군과 기자를 외기(外紀)로 처리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판하면서, 단군조선을 정통국가로 규정하고 단군문화를 복원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조선 단학(丹學)의 연원을 중국의 전진교(全眞敎)에서 찾고자 했던 한무외(韓無畏)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대항하여, 조선 단학파(丹學派)의 연원이 단군에서 출발한다는 해동이적(海東異蹟)을 저술하기도 했다.

18세기 들어 단군의 존재를 강렬하게 부각시킨 인물로 수산(修山) 이종휘(李種徽:1731-1797)를 꼽을 수 있다. 이종휘는 동사(東史)라는 저술을 통해 단군을 본기(本紀)에 수록하면서, 단군을 중국황제와 대등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우리 민족 고대 신교(神敎)의 근원을 단군에서 찾은 인물로, 마니산 제천태백산의 단군사(檀君祠), 기자의 교신명(交神明), 부여의 곤연사(鯤淵祀), 고구려의 태후묘(太后廟)동맹동명묘(東明廟)수신사(隧神祀)선인(仙人), 신라의 신산신앙(神山信仰) 등이 모두 단군의 신교를 계승한 것이라 했다.

또한 19세기 말에는 한국 무속(巫俗)의 기원까지도 단군에서 찾으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1885년 필사본으로 나온 무당내력(巫堂來歷)(서울대학교 규장작 소장)이 그것이다. 무당내력에서는 한국 무속의 기원이 단군신인(檀君神人)의 신교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조선 말기의 민간 무속신앙 속에도 단군신앙이 급속히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백봉(白峰)이라는 인물이 주도한 백두산 수련집단(修鍊集團)은 단군신앙의 맥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집단으로서, 단군과 관련된 경전류(經典類)와 사서류(史書類)를 세상에 내놓아 20세기 단군 열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5. 日帝官學

 

한편 일제는 대륙침략의 야욕을 노골화시키면서, 19세기말부터 우리 역사에 대한 목적성 연구를 본격화했다. 본디 일본의 조선연구의 출발은, 에도시대 일본의 주자학자들이 조선의 주자학, 특히 이 퇴계의 학문을 존경연구하는 입장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고사기』『일본서기및 그 밖의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國學者)들이 등장하면서, 일본이 태고시대부터 조선을 지배해 왔다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형성한 조선관은 막부말기의 정한론’, 메이지 이후의 조선침략의 유력한 관념적 지주가 되었고, 소위 일선동조론일한일역론으로 불려지는 의식형태로 고착화된 것이다.

20세기 초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일제의 한국사 연구는 그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소위 식민지주의사학을 접맥시킨 것이다. 식민지사관의 목적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역사적 견지에서 정당화 하려는데 있었고, 그 내용의 핵심은 한국사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강조함에 있었다.

타율성론이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즉 한국의 역사는 북쪽의 중국몽고만주와 남쪽의 일본 등 이웃한 외세의 침략과 압제 속에서 비주체적으로 전개 되어졌다는 것이다. 이 타율성 이론은 만선사관, 반도적성격론, 사대주의론 등의 특수한 관점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또한 정체성론은 한국이 왕조의 교체 등 사회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 사회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려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자였던 후쿠다는 근대사회의 성립을 위해서는 봉건 제도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전제에서, 한국이 근대화에 늦어 혼미하고 있는 근원을 조선에 봉건제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사를 비교하여 20세기 초의 한국의 사회 경제발전단계는 일본에 있어 고대 말 10세기 경의 후지와라시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체성이론은 한국사의 사회경제적 낙후성을 지적하는 단순성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논리는 이렇게 소위 정체된 한국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한 일제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그 저의가 있기 때문으로 식민지사관의 근본정신과 직결되는 것이다.

 

6. 檀君史料

 

일제의 조선 침탈은 역설적으로 우리 상고사와 단군에 대한 인식을 고양시키는 결정적 계기로도 작용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단군과 상고사와 관련된 역사인식이 급속도로 더욱 확산된 것이다. 이러한 열기의 발판에는 1896년에 설립된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한 독립신문황성신문의 역할 뿐만 아니라, 1906년에 결성된 서우학회(西友學會:후일 西北學會로 개편)의 활동과 더불어 대한매일신보라는 매체가 큰 기여를 하였다. 1905년 정교(鄭喬)와 최경환(崔慶煥)이 편찬한 대동역사(大東歷史)에서는 단군조선을 서술함에 있어, 우리 민족이 단군시대부터 문물제도와 문화를 갖춘 민족이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황성신문과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유근이 원영의(元泳義)와 함께 편찬한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의 의미를 설명한 후, 단군조선기(檀君朝鮮紀)를 맨 앞에 싣고 있음이 주목된다. 여기서는 개국기원을 시작으로 단군 탄생으로부터 도읍과 국호를 정하는 과정을 서술했을 뿐만 아니라, 문물제도를 비로소 세웠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마니산 제천단과 삼랑성(三郞城)의 연유를 서술함과 아울러, 태자 부루의 도산회의(塗山會議)에 대해서도 언급했으며, 구월산 당장경(唐藏京)으로 도읍을 옮긴 과정까지도 말하고 있다. 더욱이 단군의 부인인 비서갑 뿐만 아니라, 구월산 삼성사와 평양의 단군릉숭령전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단군에 대한 열기는 1909년 나철의 신교 부활과 더불어 최고조를 맞게 된다. 신교에 있어서의 단군이라는 존재는 국조이며 시조인 동시에 창교주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신교적 역사관이 정신사관적(精神史觀的)인 요소의 강조와 대륙사관적(大陸史觀的)인 측면의 부각, 그리고 문화사관적(文化史觀的)인 방향이 중시되었던 것도 이러한 측면과 밀접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고사와 단군에 대한 역사문화적 의미를 근대 최초로 집성한 획기적인 자료집이 단조사고(檀祖事攷). 김교헌유근박은식 등에 의해 엮어진 이 책은 역사 속에 흩어진 단군과 우리 상고사의 흔적들을 정성스레 모은 것으로, 관찬사서(官撰史書)로부터 패사(稗史:민간재야사서)에 이르기까지 총망라되었다. 단군이 탄생하여 우화(羽化)할 때까지의 업적과 단군과 직접 혹은 간접으로 연결된 문화적 자취까지 낱낱이 나타난다. 까닭에 단조사고는 단군과 관련된 역사서요 문화서인 동시에 사상서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김교헌은 그의 저술인 신단민사(神壇民史)』․『신단실기(神壇實記)』․『배달족역사에서 단조사고의 자료를 중심으로 실존하는 단군의 역사관을 정립시키려 했다. 신단민사에서는 우리 단군민족의 혈통의 흐름을 구족설(九族說)에 그 근원을 찾음과 함께, 역사적 강역인식에서는 대륙을 주요 활동무대로 설정하여 고조선부터 조선조까지 철저하게 대륙적 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까닭에 고려와 조선시대도 여요시대(麗遼時代)여금시대(麗金時代)조청시대(朝淸時代)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에 대해 단군의 오훈(五訓)을 시작으로 역대국가들의 제천행사를 밝힘과 함께 구서(九誓)오계(五戒)팔관(八關)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고유성과 공유성(公有性)전통성자주성을 강조한다.

배달족역사, 정확히 말하면 김교헌이 교열(校閱)한 것을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가 발간한 것으로, 신단민사의 굵은 줄기만을 간추려 놓은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신단실기는 단군에 대한 사적(事蹟)과 신교사상에 대한 자취를 모아 자료집의 성격으로 정리해 놓고 있다. 이것은 단조사고내용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단조사고가 김교헌의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시켜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후일 단조사고의 역사정신은 신채호 역사정신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낭가사상(郎家思想)의 형성 배경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박은식 역사정신의 고갱이라 할 수 있는 국혼(國魂) 역시 단조사고의 정신적 구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근대 민족주의사관 형성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친 단조사고,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단군 관련 집대성으로서의 의미를 더욱 새롭게 하고 있다.

 

7. 史觀省察

 

문득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기록된 한상국(韓相國)의 농사를 떠올려 보았다. 상국 한응인이라는 농사의 어설픈 이가 벼[]와 강아지풀[稂莠]를 구별 못해, 벼를 다 뽑아버리고 진정한 농사꾼인 양 우쭐해 하는 이야기다. 혹여 우리의 역사학이 이런 것은 아닐까. 역사의 어설픈 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답시고 남의 다리를 긁어준 것은 아닌지 궁금키도 하다. 신채호는 우리의 얼굴과 혹도 구별 못하는 사가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조선사를 지은 旣往의 조선의 史家들은 매양 조선의 을 베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이 쓴 眼鏡이 너무 凸面인 고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이라 하여 베어 버리고, 어디서 무수한 을 가져다가 붙이었다. ‘붙인 조선사도 기왕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大通하면서 외국인들이 往往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물으면,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고로, 慙愧한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 있도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붙은 조선사요 올바른 조선사가 아니었다.”

 

유몽인이 벼와 강아지풀을 구별 못한 한응인을 비웃은 것이나, 신채호가 우리 얼굴과 혹을 구별 못한 역사가들을 힐소(詰笑)한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것은 본질을 놓치고 현상에 기우러진 이치를 비판하는 것이며, 거짓을 가지고 진실이라 호도하려는 부류에 대한 공박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강아지풀 속에서 벼를 찾아 환호했던 모습도 보인다. 다음과 같은 북애자의 경험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골짜기에서 淸平이 저술한 震域遺記를 얻으니, 그 가운데 삼국 이전의 옛 역사가 있음에 비록 간략하여 상세하지는 않으나 항간에 떠도는 구구한 말들에 비하면 자못 내비치는 기상이 견줄 바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중국의 사서에 전하는 모든 글들을 가려 뽑아 史話를 지으니, 그 재미로움은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러한 것에 뜻이 있어 이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으리오!”

언제부턴가 우리의 역사는 소외와 위축의 역사로 진행되어 왔다. 공교롭게도 우리 사서의 수난과 더불어 흔들린 신교의 쇠퇴와 맞물린다. 사라진 서적도 대부분이 신교서적이다. 남아서 천대받는 서적도 하나같이 신교사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뒤집혀진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정사(正邪)가 전도(顚倒)되고 주객(主客)이 역전된 삶이 우리의 역사적 삶이다. 혹과 강아지풀인 외래사관에 의해 얼굴과 벼인 신교사관이 압살당해 온 것이다. 우리는 그 투쟁에서 밀려났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과정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이 ''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팔 것 없이 얕이 말하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서 있는 자를 아라 하고, 그 밖의 것은 비아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등을 비아라고 하지만 영로 등을 저마다 제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고 하며, 무산계급은 무산계급을 아라 하며 지주나 자본가를 비아라고 하지마는, 지주나 자본가는 저마다 제 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계급을 비아라 한다.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밖에 무엇이든지 반드시 본위인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대치되는 비아가 있고, 아 가운데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가운데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쉴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前途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라는 신채호의 지적이 틀리지 않는다.

다시금 우리는 사관을 시비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문제는 역사가의 가치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역사학도 사실의 문제를 넘어 가치의 문제로 연결된다. “사실이란 역사가들이 그것을 찾아줄 때에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고, 어떠한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그리고 어떠한 순서와 전후 관련 속에서 이야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역사가인 것이다.”라고 외친 카의 지적도 그것이다. 그러한 역사학이 살아있는 역사학이요 인간을 외면치 않는 역사학이다. 과학적 역사학은 필요조건이지만 역사학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과학적 역사학을 신주처럼 떠받드는 역사학자들에게 월쉬는 이렇게 내뱉었다.

 

역사에 있어서 본질적 중요성에 관한 판단이 실재하고 있고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부인하기 힘든 일로 보이며, 만약 이것이 옳다면 완전히 과학적인 역사학이라는 敎理, 사실들로부터 이러한 판단을 읽어낼 수 없다는 명백한 이유 때문에 내 던져 버려야 한다.”

 

월쉬가 말하는 본질적 중요성에 대한 판단이란 바로 역사가의 가치와 직결된다. 그는 역사가들이 신앙처럼 떠받드는 과학적인 역사학을 내 던져 버리라했다. 본질적 중요성에 대한 판단을 외면한 역사학은, 이미 기록 주체로서의 인간을 외면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사가의 건전한 가치관이다. 노예의 눈으로는 주인의 역사를 볼 수가 없다. 박은식은 노예의 눈으로 만들어진 노예의 역사로, 모든 것이 노예가 되어버린 시대적 아픔을 이렇게 토로한다.

 

조선 백성의 정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는 없고 다른 나라의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천여 년 이래의 조선은 단지 형식상이 조선일 뿐이지 정신상의 조선은 망한 지가 이미 오래된 것이다. 처음 배우는 교과가 이러한 즉, 어릴 때에 벌써 머리 속에 노예 정신이 깊게 뿌리 박혀, 평생의 학문이 모두 노예의 학문이고 평생 사상이 모두 노예 사상이다. 이와 같이 비열한 사회에 처하여 소위 英雄者가 누구이며 소위 儒賢者가 누구이며 소위 忠臣者가 누구이며 소위 功臣者가 누구이며 소위 名流者가 누구인가? 필경 노예의 지위일 뿐이다.”

 

우리가 삼국사기에 담겨있는 역사인식과 기술태도에 안타까움을 갖는 것도, 역사가의 가치관, 곧 사관 때문이다. 김부식과 함께 이 책을 지은 사관들은 유교사관에 젖은 유학자들이다. 공자가 쓴 춘추는 경전으로 꼽힐 정도로 뚜렷한 사관을 제시한 책이다. 어지러운 춘추시대에 정통을 강조하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여지없이 매도하는 사관을 담고 있다. 뒷날 유학자들은 공자의 유교사관을 충실히 따랐다. 김부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는 임금의 인덕을 강조하고, 신하의 충성을, 자식은 효도를, 여자는 정절을 다하는 실천도덕을 중심으로 엮었다. 허탄한 이야기는 빼버리고 현실성 있는 사실을 위주로 적었다. 말하자면 유교적 합리주의에 바탕한 역사기술 방법을 택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술을 충실히 본받은 것이다. 삼국의 건국설화를 모두 제외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춘추필법에 의한 역사 정리는 중국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춘추필법은 의리(義理)와 대의명분(大義名分), 그리고 중화주의에 따른 정통성 등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대간과 사관의 활동 역시 당연히 유교의 실천을 위한 것으로, 이들의 활동은 곳 유교사관의 체계화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고고학금석문학(金石文學)고전학(古錢學) 등의 주변을 살필 줄 모르는 우리 역사학계의 고집도 문제다. 요하(발해)문명권에서 발굴되는 수많은 유물들은 우리 상고사와 가장 가깝게 와 닿는 것들이다. 또한 일본에서 발굴되는 유물들 역시, 우리 고대사의 연장으로서의 일본사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산동지역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이 중국의 상고사와는 무관한 것이 많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한편 산서성에서 발견된 백이숙제묘비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죽국의 위치 비정, 즉 우리 상고사의 판도가 달라지는 변수다. 명도전이 연의 중심 강역인 북경을 중심으로 출토가 되지 않고 주로 고조선 영역에서 출토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역사가를 정확하다고 해서 칭찬한다는 것은, 잘 말린 목재를 썼다거나 잘 혼합된 콘크리트를 썼다고 해서 건축가를 칭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의 일의 필요조건이지 본질적인 기능은 아닌 것이다. 이런 유의 일이라면 역사가들은 당연히 역사학의 보조과학이라고 불리우는 고고학금석문학고전학(古錢學)연대학(年代學) 등등에 의뢰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카의 이러한 주장은 이제 역사학의 상식과도 같은 말이다. 그러면 천문학을 통한 박창범 교수의 삼국사기천문현상에 관한 증명을 언제까지 외면만 할 것인가. 그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수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지구상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라고 했다. 그리고 서기 2-3세기에 주로 나오는 고구려의 일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가 만주와 몽고에 이르는 백제보다 북위도 지역이라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신라의 일식 기록은 서기 201년 이전과 787년 이후로 양분된다고 했다. 그중 서기 201년 이전 하대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로는 양자강 유역이며, 서기 787년 이후에 나오는 하대 신라에서는 한반도 남부가 최적 관측지라고 밝힌 것이다. 사서에 나타나는 대륙 백제와 대륙 신라를 연대학으로 구명했다. 연대학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이다. 과학을 그리도 내세우는 부류들이, 왜 이런 것은 외면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본성을 잃어버린 자는 대상도 직시하지 못한다. 우리의 본성은 무엇인가.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바로 역사가의 올바른 가치관이기도 하다. 본바탕[本性]을 망각하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북애자의 말을 기억하자.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강한 나라의 요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였으니, 그 첫 번째가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한 것이고, 그 두 번째가 사람이 많으면서 화합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항상 그 본바탕을 지키며 자기의 장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는 지리적 이익과 사람의 화합 및 본바탕의 보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 되며, 사람들은 화합을 잃은 데다 본바탕을 망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만세에 걸친 근심이라 할 것이다.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된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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